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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아무래도 데이트 신청 같은데 (23/129)


23화. 아무래도 데이트 신청 같은데
2022.08.20.



“유라야, 요즘 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니?”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그럼, 오래전에 못다 푼 원한이 있다든가?”

유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아니라니까.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분노한 재인의 목소리가 화장실 벽에 부딪히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유라의 어깨를 붙든 재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납게 일렁이는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아, 아팟! 재인아, 왜 그래?”

“몰라서 물어?”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쓰여 있는 유라의 얼굴을 보자 재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 재인이 도혁의 등을 떠밀 듯하며 내보내려 애쓰고 있을 때였다.


「차 팀장님은 뭐 좋아하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해요.」

갑자기 유라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재인이 눈동자로 미친 듯이 X! X! 사인을 보내도 소용이 없었다.

유라의 눈은 도혁에게만 고정되어 있었기에.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니만큼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할 법도 한데.

도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넙죽 받았다.


「그럼 그럴까요?」

잠시라도 자유롭고 싶었던 재인의 꿈은 그렇듯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재인은 바득바득 이를 갈다 주문이 끝나자마자 유라를 화장실로 끌고 왔다.

최유라, 가만두지 않겠어!


“나 맨날 팀장님한테 시달리는 거 알면서 감히, 이 귀하고 싱그러운 주말까지 붙어 있게 만들어? 네가 친구냐?”

내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아침부터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데!


“일부러 네 휴대전화 가져다주러 오셨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야박하게 그냥 가라고 하니? 너 맨날 먹는 거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허를 찌르고 들어오다니!

급습에 당황한 재인이 머뭇거리자, 유라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리고 너, 차 팀장님이 저렇게 젊고 잘생겼다는 얘기는 왜 안 했어?”

“그게 뭐가 중요해?”

“아주 중요하지! 네가 하소연할 때마다 난, 배 툭 튀어나오고 머리 벗겨진 아저씨 상상했단 말이야. 아우, 억울해.”

“억울할 것도 되게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 팀장님 외모 정도면 무슨 짓을 하든 태평양 같은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겠다.”

유라가 경배하듯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모으자 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일을 같이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말 사흘도 못 가 쏙 들어갈걸?”

“정말 그렇게 되나 사흘만 너랑 바꿔서 일해보고 싶다. 암튼 서재인, 진짜 부럽다!”

“부럽긴 뭐가 부러워! 정신 차려!”

재인은 버럭 하며 유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한편.

나란히 앉아 빈자리만 쳐다보고 있는 도혁과 규민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식이라도 먹으면 좀 나으련만, 텅 빈 식탁 위에는 물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윽고, 규민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팀장님, 주말에도 일하신다더니 정말이었네요?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하하.”

“할 일이 많으니까.”

“가족들이 뭐라고 안 하십니까?”

“별로.”

“와, 부럽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틈만 나면 핀잔을 주시는데. 멀쩡하게 생겨서 애인도 없이 주말에 혼자 있다고요.”

“…….”

“뭐, 그동안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났거든요.”

규민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까지는요.”

 

 
이것 봐라?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이건 분명 잠자고 있는 야수의 본능을 자극하는 선전포고인데.

이제는 숨기지도 않겠다, 이거야?

서서히 굳어가는 도혁의 얼굴을 바라보는 규민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팀장님은 왜 애인이 없으세요?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지신데.”

“나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심중을 떠보는 듯한 규민의 질문에 도혁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몇 달 전까지는.”

“……!”

그 순간 규민의 눈동자에도 역시, 라는 눈빛이 스쳤다.

누군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남자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가 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라는 것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도혁이 입을 열었다.


“한 과장이 맡은 임무, 꼭 성공해야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차질 없도록 진행해줘요. 프로답게.”

젯밥에 관심 끄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은근한 경고였다.

그러자 규민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공사 구분은 철저합니다.”

“그 말, 잘 지켜주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급할 것 없으니까요.”

급할 것 없다?

그만큼 자신만만하다는 건가?

도혁은 미간을 좁히며 규민의 말을 되뇌었다.

계약으로 얽어매고 동거까지 하면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자신과 달리, 규민은 얼굴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몹시 거슬리게도.

그로부터 30분 뒤.

모르는 사람이 보면 2:2 미팅이라도 하는 줄 알 법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한창이었다.

재인은 웃고는 있었지만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최유라와 차도혁이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두 사람 때문에 진땀을 뺀 탓인지 재인은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잠이나 잘걸.’

하지만 다음 순간.

제 말에 큰 모순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 나 이제 집 없지. 그리고 여기 안 왔으면 팀장님이랑 머리에 김 나게 일하고 있을 텐데, 잠은 무슨.’

그나저나 지독한 워커홀릭 차도혁이 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팀장님 혹시…….’

재인은 도혁이 접시에 파에야를 덜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스페인 음식을 좋아하시나? 것도 아주 많이?’

휴.

괜한 생각으로 쓸데없는 데 에너지 낭비하지 말자.

재인이 잡념을 털어내려 상그리아를 한 모금 머금은 그때였다.

유라가 흐뭇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인이가 팀장님이 잘생기셨다고 그렇게 강조하더니, 정말이었네요.”

풉!

재인은 하마터면 상그리아를 코로 뿜을 뻔했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유라가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눈을 찡긋했다.


“……야, 내가 언제……!”

그 순간, 재인은 뚫을 듯이 쳐다보는 도혁의 시선을 정통으로 맞았다.

몸이 절로 움찔거리면서 말문이 막혔다.


“반어법 아닙니까? 서 주임 특기가 반어법이라던데.”

“얘가요? 맨날 곧이곧대로 얘기해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할까 걱정했었는데요.”

“흠. 그렇군요.”

도혁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최유라, 네가 정녕 이 세상을 등지고 싶구나!

사색이 된 재인은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유라의 허벅지를 꽉 쥐었다.

그러자 아얏, 하며 유라가 눈썹을 찡그리더니 재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차 팀장님 웃는 걸 보니 아까 실수했던 거 만회 좀 한 것 같지?”

“제발 부탁인데 아무것도 하지 마. 아예 입을 열지 마!”

“알았어, 알았어. 별 걱정을 다 한다.”

“걱정 안 하게 됐어, 지금!”

그때, 규민이 급격히 어두워진 재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재인아, 괜찮아?”

“으응, 별일 아니야.”

일단 휴전.

오랜만에 만난 규민 앞에서 못 볼꼴을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이것 좀 먹어봐. 멀어서 먹기 힘들지.”

규민이 재인의 접시를 가져가 파에야를 덜어 주었다.

재인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규민이 새삼 고마웠다.

눈앞에서 대놓고 불편하라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도혁과는 딴판으로.

도혁은 내내 말없이 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규민이 재인에게 접시를 건네며 물었다.


“재인아, 너 지금도 떡볶이 좋아해? 예전엔 잘 먹었잖아.”

“응, 좋아하지.”

“다음에 먹으러 가자. 다른 건 또 뭐 좋아해?”

“아, 나는…….”

갑자기 도혁이 멋대로 대답을 낚아챘다.


“한우 안심스테이크랑 로브스터.”

바로 지난번 도혁이 데려갔던 DS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먹었던 메뉴였다.

재인이 놀란 눈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팀장님, 그 얘기를 왜 여기서 해요!’

재인이 무슨 짓이냐며 다급히 눈짓을 보내자, 도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부렸다.

수습은 또 재인의 몫이었다.


“아, 저번에 회식할 때 잘 먹은 걸 기억하고 계셨군요. 한우 안심스테이크랑 로브스터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하하.”

“여기 있는데. 난 로브스터 뭔 맛인지 잘 모르겠더라. 해산물은 별로야.”

유라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순간 재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최유라, 너 지금 맛있다고 먹고 있는 그거, 해산물 파에야거든!’

새우랑 오징어랑 홍합이 인정사정없이 막 막 들어간 이 맛있는 것을 입에 넣고도 모래를 씹는 것 같을 줄이야.

도혁이 유라의 오지랖을 흔쾌히 받아들일 때부터 불편은 각오했었다.

그래도 역시나.

기대 이상이네.

누굴 탓하랴, 휴대전화를 흘린 내 잘못이지.

이제는 따질 기운도 없는 재인이었다.


“재인아, 혹시 그 영화는 봤어? <프로젝트 M>.”

썰렁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규민이 최근 개봉한 첩보물 영화 얘기를 꺼냈다.


“아니, 아직.”

일에 치여 사느라 TV 볼 새도 없어.


“그 영화 엄청 시원시원하고 재밌대. 괜찮으면 다음 주에 같이 보러 갈래? 꼭 보고 싶은데 남자 혼자 영화관 가기가 좀 그래서.”

규민이 멋쩍게 웃자 유라가 입술을 쌜쭉 내밀며 핀잔을 줬다.


“한규민, 나한테는 가자고 안 해? 바로 옆에 있는데 서운하게.”

“미안, 미안. 유라 너도 같이 갈래?”

“됐어. 엎드려 절받기 싫다. 그리고 다음 주에 시골 다녀와야 해서 안 돼.”

“그래? 아쉽네. 재인이 넌 괜찮지?”

“아, 그게…….”

재인은 난감했다.

같이 영화 볼 사람이 없다고 부탁하는 건데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어쩌지? 그냥 친구로서 가자는 거지만, 팀장님이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 선뜻 대답할 수도 없고…….’

게다가 주말에도 같이 일을 해야 하니까.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는 재인에게 규민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셋이 심야 영화 자주 봤었잖아. 다시 예전처럼 같이 극장에 가고 싶어서.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요새 좀 바빠서, 라고 거절하려던 그때.

서늘한 음성이 재인의 말을 잘랐다.


“서 주임, 가지 그래요? 아무래도 데이트 신청 같은데.”

데이트 신청?

흠칫 놀라 쳐다보니 도혁이 팔짱을 낀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규민과의 사이를 멋대로 오해하고 재인을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뭐야, 지금 내가 계약사항 잘 지키나 시험하는 거야?’

또 멋대로 사람을 흔들려고!

재인은 지난 며칠간 도혁 때문에 진땀을 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 안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것을 느꼈다.


‘아, 한 번 사는 인생 언제까지 이렇게 눈치만 보며 살아야 하는 거야?’

스물일곱 서재인.

집안에서도 회사에서도 눈치 보고 마음 졸이며 꾹 참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갑자기 마개가 뽑힌 듯 억눌렸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재인은 팔짱을 끼며 도혁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그럼, 그럴까요?”

그 순간, 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왜 이래?

차도혁 씨가 가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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