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만 가주세요,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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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만 가주세요, 팀장님
2022.08.16.
재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굵은 꼬임이 들어간 니트 티셔츠와 면바지, 점퍼에 운동화. 캐주얼하게 차려입은 규민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재인은 스무 살 때의 규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규민아, 너무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유라가 규민을 반기며 재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유라 넌 7년 만인데 하나도 안 변했다.”
“그거 여전히 예쁘다는 칭찬이지?”
“당연하지.”
“하여튼, 규민이 넌 말을 예쁘게 해서 맘에 들어.”
어떻게 된 일이야?
흡족해하는 유라에게 재인이 해명을 촉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며칠 전에 규민이랑 통화하다가 주말에 재인이 너 만난다고 했더니, 같이 만나고 싶다고 난리여서 나오라고 했어. 잘했지?”
“미리 얘기 좀 해주면 안 되니? 규민이 우리 회사 왔을 때도 그렇고,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 그래도 서프라이즈가 재밌잖아?”
“최유라, 서프라이즈 하게 절교당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한규민 너도!”
“알았어. 미안, 미안. 대신 너 먹고 싶다는 거 내가 다 사줄게.”
규민이 재인을 달래려는 듯 메뉴판을 내밀었다.
재인은 배가 불러야 한없이 관대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규민이었다.
“정말이지? 나 아침 안 먹고 나왔으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재인이 못 이기는 척 메뉴판을 펼쳤을 때.
갑자기 유라가 재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오! 오늘 예쁘게 하고 나오랬더니 진짜 힘 좀 줬네, 서재인?”
과연. 오늘 재인은 날씬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블랙 니트 원피스에, 새하얀 얼굴을 살려 주는 독특한 문양의 스카프를 둘렀다.
속눈썹도 붙인 데다 평소에는 귀찮아서 자주 생략하는 아이라이너까지, 공들여 화장한 티가 났다.
지난 며칠간 도혁에게 속박당한 걸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한껏 꾸미고 나온 재인이었다.
“뭐야, 너 규민이 나올 거 눈치챘었던 거 아냐?”
“아니거든! 내가 무슨 독심술 하냐? 오랜만에 유라 너 만난다고 기분 좀 내 본 거지.”
괜스레 민망해진 재인은 유라에게 눈을 흘겼다.
옥신각신하는 둘을 지켜보던 규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구나, 너희들. 이렇게 모이니 정말 좋다! 오랜만인데도 엊그제 봤던 것 같아.”
규민이 아련한 눈빛을 하며 옛 추억을 끄집어냈다.
“같이 아르바이트했을 때 참 재밌었는데. 지금도 그 카페 남아 있어?”
“글쎄. 너 유학 가고 난 다음에 나랑 재인이도 바로 관둬서 잘 몰라.”
“그랬구나.”
“재인아, 그거 생각나? 네가 케이크 엎어서 아르바이트 잘릴 뻔했던 거. 그때 규민이가 매니저한테 사정해서 무사히 넘어갔었잖아.”
“기억나지. 그거 네 발에 걸려 넘어져서 그랬었지, 아마?”
“친구야, 좋은 기억만 담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아.”
재인의 어깨를 주무르며 천연덕스럽게 넘어가는 유라도 함께했던 대학 시절이 떠올랐는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재인이 음식을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띠링.
출입문이 열리면서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무심코 그와 눈이 마주친 재인은 헛것을 본 건 아닌지 눈을 감았다 떴다.
재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이는.
조금 전 헤어진 도혁이었다.
‘팀장님이 왜 여기에……?’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눈을 비비고 몇 번을 다시 쳐다봐도 바로 그 차도혁이 맞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 안과 가봐야 하나?’
좌우 시력 2.0을 자랑해왔던, 시력만큼은 자신이 있는 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더없이 기이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마치 느리게 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도혁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심지어 그의 주위에는 말로만 들었던 후광까지 환하게 비쳤다.
식당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 모두 쏠려 있었다.
도혁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머리를 쓸어 올리자,
“하아……!”
어디선가 깊은 탄성이 터졌다.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슬쩍 웃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재인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맞다! 멜로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할 때!’
이게 실제로 가능한 거였다니.
현실을 영화처럼 보이게 만드는 도혁의 놀라운 능력에 재인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이윽고 재인의 테이블 앞에서 그의 발길이 멈췄다.
서늘한 바다 내음이 훅 끼쳐오며,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도혁의 눈빛이 재인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어, 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재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규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도혁에게 물었다.
갑자기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제야 규민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듯이.
“그러는 한 과장은 여기 어쩐 일입니까, 서 주임과?”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도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보시다시피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왔죠. 팀장님은요?”
“서재인 씨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도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재인은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규민의 등장으로 졸지에 거짓말을 한 꼴이 되어버렸음을.
억울하지만, 도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잠깐. 그럼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닌지 일부러 내 뒤를 몰래 따라왔다는 거야?’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어쩐지 순순히 돌아가더라니.
재인은 도혁의 의심은 둘째치고, 자신을 믿지 못해 뒤쫓아 왔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그때, 규민이 놀란 눈으로 도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재인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팀장이,
주말에,
부하 직원의 사적인 장소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재인은 답답했다.
팀장과 계약을 했다, 그래서 팀장이 의심해서 쫓아왔다, 그렇게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행여 도혁이 이상한 대답을 할까 봐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 여기 오기 전에 잠깐 회사에 들렀는데, 그때 광화문 ‘세비야’라는 식당에 스페인 요리 먹으러 간다고 자랑했었거든.”
“그래? 회사에는 왜 갔는데? 프로젝트 때문이면 나도 알아야지.”
“아니야! 전에 진행했던 것 관련해서 아직 남은 업무가 있어서…….”
“그랬구나.”
재인의 해명에도 규민은 여전히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더 캐물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그때.
넋이 나간 얼굴로 도혁을 올려다보고 있던 유라가 재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구……시니?”
“어어, 우리 팀장님.”
재인의 대답에 유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뭐? 그 성질 괴팍하다는?”
순간, 시원스레 뻗은 도혁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꺅!
재인은 황급히 유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더 큰 참사를 막아보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읍! 읍!”
손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유라의 눈을 보며 재인은 온갖 사념이 담긴 강렬한 레이저를 쏘았다.
‘최유라, 너 날 죽일 셈이야?’
뒤늦게 집 나간 정신이 돌아왔는지 유라의 몸이 움찔거렸다.
무심코 뱉은 말에 저도 놀란 모양이었다.
재인은 거의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도혁에게 시달릴 때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유라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었던 게 이렇게 터질 줄이야.
하지만, 그 누가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에 회사 팀장님과 절친의 오붓한 만남을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재인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자 규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재인아, 괜찮아?”
“아, 미안!”
재인이 화들짝 놀라 유라에게서 떨어졌다.
푸하! 풀려난 유라가 비장한 얼굴로 재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더 불안한 건 왜일까?
다음 순간, 재인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유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짝, 하고 손뼉을 부딪쳤다.
“아, 맞다! 성질 괴팍하다는 건 옆 팀 팀장님 얘기였지.”
야, 지나가는 개도 안 믿겠다!
기껏 생각해낸다는 게 고작 그거라니.
재인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 와중에 한술 더 떠 유라는 도혁에게 악수까지 청했다.
“안녕하세요? 전 재인이 친구 최유라라고 해요. 역시 듣던 대로 멋지고 아주 온화해 보이시네요. 재인이가 팀장님 칭찬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아하하하!”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미 늦었다고!
재인은 뒤늦게 수습해보려고 애쓰는 유라의 노력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가슴을 졸이며 도혁의 안색을 살피는데, 이게 웬걸.
심기 불편해할 줄 알았던 도혁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유라의 악수를 받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도혁입니다.”
“차도혁. 어쩜 이름에 목소리까지 다 멋지실까. 일단 앉으세요, 차 팀장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도혁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최유라, 언제 봤다고 살갑게 구는 거야!’
하여튼 붙임성 하나는 최고라니까.
최유라와 차도혁의 조합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 심히 염려되는 순간이었다.
재인은 빨리 도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퉁명스레 물었다.
“팀장님, 아까는 바쁘시다더니 괜찮으세요?”
확인 끝나셨으니 밥 좀 편히 먹게 이제 그만 가주세요, 라는 눈빛은 덤으로.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서 주임, 뭐 잊은 거 없습니까?”
“뭐요?”
“아주 중요한 거.”
찰나의 순간, 도혁의 눈동자가 규민을 짧게 곁눈질했다가 다시 재인에게 돌아왔다.
‘역시 계약 기간 중에는 이성을 사귈 수 없다는 조항 때문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인은 도를 넘어선 도혁의 행동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팀장님, 저희 오랜만에 옛 친구들끼리 식사하러 모인 거예요. 그러니까…….”
탁!
재인이 볼멘소리를 내뱉자, 도혁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서 주임이 사무실에 이걸 놓고 갔습니다.”
“어머, 이건!”
재인의 휴대전화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벨이 울려서 유라의 전화를 받느라 가방에서 꺼낸 기억은 나는데, 다시 넣은 기억이 없었다.
내릴 때 조수석에 흘리고 나온 거였구나.
이걸 가져다주려고 팀장님이 일부러 차를 돌려서 온 거였어. 엄청 귀찮았을 텐데.
이거야말로 웬만한 추리소설 못지않은 반전이었다.
그럼 차로 데려다준 것도 정말 짐이 무거워 보여서였던 거야?
재인은 도혁의 선의를 의심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했다.
차도혁 씨,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네요. 미안해요.
“어휴, 죄송해요! 급히 나오는 바람에 빠트렸나 봐요.”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도혁이 보기 드문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자! 오해도 풀렸겠다, 이제 팀장님만 나가면 위기 상황이 끝나는 거야. 괜히 또 오해해서 계약사항 들먹이며 꼬투리 잡힐라.
재인의 머릿속에는 빨리 도혁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팀장님, 직접 가져다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엄청 바쁘실 텐데 괜히 시간을 뺏었네요. 다음에 제가 커피 살게요.”
재인은 ‘오늘은 이만 가주시라’는 마음을 담아 다.음.에.를 특별히 강조해봤다.
이 정도면 팀장님도 눈치껏 일어나겠지?
그러나.
느긋하게 팔짱까지 낀 도혁은 아예 일어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우리 팀장님, 마치 우리 일행인 것처럼 앉아 계시네?
“저기, 팀장님 오늘 바쁘다고……?”
당황한 재인이 도혁의 2차 퇴장 시도를 하던 그때.
메뉴판을 펼친 유라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차 팀장님은 뭐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