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애인도 아니면서 (21/129)


21화. 애인도 아니면서
2022.08.13.


재인은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도혁을 말리지 못한 저를 탓하며 소리 없이 몸부림쳤다.

저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혁은 뚫어지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재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저 멀리 시청역이 보인다는 것뿐.


‘이제 10분만 더 참으면 내릴 수 있어! 시간아, 어서 가라! 제발 빨리 가라!’

되지도 않은 주문을 외우며 재인이 창밖만 바라보던 그때.

고풍스러운 원목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 ‘베이크 문(Bake Moon)’이다!”

재인은 반갑게 외치며 창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게 흥미를 자극했는지, 차에 올라탄 이후 처음으로 도혁이 질문이라는 걸 던졌다.


“그게 뭔데?”

“제가 정말 존경하는 문광일 제과 명장님의 베이커리예요. 몽블랑과 타르트로는 국내 최고인데, 한입 맛보면 바로 행복해져요.”

“종종 왔었나 보군?”

“네. 집 떠나 홀로서기 하면서 너무 지칠 때면 여기 와서 위로를 받았거든요. 나도 언젠가는 이런 멋진 베이커리를 가져야지, 하고 다짐도 하고요. 요샌 바빠서 통 못 왔었지만.”

재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실은 문광일 명장님이 나온 곳이라서 일본제과제빵학교에 가기로 결심한 거였어요. 저의 롤모델이거든요.”

“그랬군.”

그사이 ‘베이크 문(Bake Moon)’은 저만치 멀어졌지만, 잠시 스쳤던 디저트들의 화려한 자태가 재인의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재인은 늘 꿈꿔왔던 제 가게를 미리 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재인 씨는 언제부터 파티시에가 꿈이었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요. 엄마 아빠가 화순에서 30년 넘게 작은 제과점을 하고 계신데, 빵 만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거든요.”

“그렇게나 일찍?”

“그때부터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틈만 나면 빵 만드는 걸 옆에서 거들었어요. 말이 거드는 거였지 방해만 됐었지만요.”

“그 일이 그렇게 재밌었나?”

“그럼요! 발효된 반죽을 누르면 푸슈숙,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거든요. 지금도 그 소릴 들으면 스트레스가 싹 사라져요.”

재인은 마치 진짜 빵 반죽을 주무르듯 두 손을 오물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본 도혁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효과가 좋다니 한번 시도해보고 싶군.”

“팀장님이요?”

주방 일에는 손 하나 까딱 안 하시는 분이 빵 반죽을 주물러보고 싶다고 한 거야, 지금?

순간 재인의 눈앞에 하얀 제빵사 옷을 입고 커다란 빵모자까지 쓴 도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섹시하면서도 카리스마까지 흘러넘치는 게 상상 속인데도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왜 뭘 걸쳐도 멋있는 거야?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하이패션이라고 하겠네.’

그저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재인에게 도혁이 넌지시 물었다.


“서재인 씨, 졸업하면…… 2년 뒤엔 뭘 할 생각이지?”

“뭘 하긴요. 일본에서 몇 년 일하면서 실력을 쌓아야죠.”

“몇 년이나?”

“네. 그래서 일본어도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어쩌면 일본에서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까지 할지도 모르잖아요?”

“…….”

웃자고 던진 재인의 농담에 도혁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냥 좀 웃어주지.

무안해진 재인은 흘낏 도혁을 쳐다보다 움찔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 티 나게 혈관이 불거진 관자놀이.

한마디로, 도혁은 ‘나 건드리지 마’라는 오라를 뿜어대고 있었다.


‘왜 이러지?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아무리 곱씹어 봐도 걸리는 게 없었다.


“저기…… 팀장님, 괜찮으세요?”

그때였다.

끼익.

도혁이 갑자기 핸들을 틀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왜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도혁이었다.

차 안 가득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팀장님,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세요?’

Rrrrrrr.

Rrrrrrr.

그 순간, 경쾌한 휴대전화 벨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받지.”

도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재인은 주섬주섬 가방 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냈다.

유라였다.


“어, 유라야.”

―재인아, 너 어디야?

“아, 광화문 들어섰으니까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것 같아.”

―그래? 점심때라 사람 많을 것 같으니까 미리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 광화문 그린문고 맞은편 건물 2층에 ‘Sevilla(세비야)’라고 있어.

“그린문고 맞은편 2층, 세비야. 알았어. 금방 갈게.”

재인이 통화를 끝내자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도혁은 말없이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서재인 씨…….」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머뭇거리던 도혁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재인은 차마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라는 오라를 풍기며 도혁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

때마침 차가 식당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중요한 얘기면 나중에 하시겠지, 뭐.

재인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듯 털어내며 밖으로 나가, 뒷좌석에서 쇼핑백 두 개를 꺼내 들고 꾸벅 인사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집에서 봅시다.”

도혁은 깔끔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누구를 만나는지 진짜 확인하려고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재인은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여기까지 뭐 하러 오셨지?”

주말에도 유일한 취미 생활인 ‘일’ 하느라 바쁘신 분이.

도혁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재인이었다.

그러다 문득 믿기지 않는 결론에 도달했다.


“혹시 정말로 무거워서 힘들어할까 봐 데려다준 거야?”

에이, 설마.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돼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날 일부러 왜 데려다주겠어? 팀장님이 무슨 내 애인이라도 돼?”

애인.

그동안 있었던 적도 없고, 언제 생길지 기약도 없지만.

아무튼 도혁과는 결코 상관없는 그거.

재인 혼자 나름의 결론은 내렸어도 도혁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여전했다.

재인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이상하게.

* * *

토요일 한낮답게 시선이 닿는 곳마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도혁은 부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서재인 씨, 가지 마.

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도혁은 서재인 씨, 에서 말문이 막혀버린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왜 재인의 앞에서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지.

수백 명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으면서.

하마터면 재인을 이성으로 보지 않겠다는 계약을 어길 뻔했으니 말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긴 했다.

오늘따라 재인이 유난히 더 예뻐 보여서 잠시 이성을 잃은 탓이었다.

승부욕에 불타올라 반드시 넘어오게 만들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재인은 여간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뭐? 일본에서 결혼?’

하. 나민우와 한규민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이제는 일본에 있는 남자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가?

도혁은 자신이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일본에서 유학하겠다는 재인의 의지는 확고했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몇 년이나 기약 없이 떨어져 있을 걸 생각하니 불안해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하나뿐.

바로 일본으로 가기 전에 재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도혁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는 듯했다.


‘김 실장님과 다시 상의해봐야 하나?’

 

.
.
.

어제, 도혁은 문밖으로 나가려는 성준을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자상함’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그러자 성준은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을 띠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매우 추상적인 질문이군요. 대상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실례지만 상대는 서재인 씨인가요?”

“흠흠. 뭐, 그렇죠.”

도혁은 그새 새빨개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눈치 빠른 성준인 데다 주변에 있는 여자라고는 재인밖에 없으니 깨끗이 인정할 수밖에.

그러자 성준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자상하게 해준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배려하는 것이지요. 특히 여자들은 작지만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받습니다.”

일타강사의 강의라도 듣는 듯 도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들 때 도와준다거나, 목이 마른 것 같으면 물을 가져다준다거나, 일이 많은 것 같으면 도와준다거나,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는 것들이요.”

“커피 취향을 기억하는 것 같은?”

“맞습니다. 그리고, 행동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혹시 오늘 아침 드실 때 어떤 말을 하셨나요?”

도혁은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 이내 시선을 떨궜다.


“뭐…….”

“역시 예상대로 아무 말도 안 하셨군요.”

성준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럴 때 모범 답안으로는 ‘차려줘서 고맙다’나 ‘너무 맛있다’가 있고, 좀 더 높은 레벨로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나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다’ 또는 ‘맛있어서 다음에 또 먹고 싶다’ 등이 있습니다.”

윽!

듣기만 해도 낯간지러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고?

기겁한 도혁이 미간을 찌푸리자, 성준은 단호한 어조로 거듭 강조했다.


“익숙하지 않아도 꼭 하셔야 합니다.”

 

.
.
.

도혁은 성준과의 대화를 복기하며 다시 연습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평생 타인에게 떠받들려 살아온 게 당연한 도혁이었기에, 성준이 제시한 모범 답안을 말로 꺼낸다는 건 대학 입시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성준의 충고에 따라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 재인을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가는 내내 재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도혁은 답답한 마음에 조금 전까지 재인이 앉아 있었던 조수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

끼익.

급히 갓길에 차를 세운 도혁은 조수석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 *

‘Sevilla’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출입문을 열자, 언젠가 들어봤던 듯한 신나는 음악이 귓가에 들려왔다.

중앙에 걸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벽에 붙은 화려한 색감의 타일 장식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멋진 곳이었다.


“서재인! 여기야, 여기!”

출입문 맞은편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유라가 재인을 향해 손짓했다.

재인은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의 얼굴을 보자 그동안의 시름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유라야,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어머, 그런데 이건 또 뭘까?”

유라가 테이블 위에 놓은 쇼핑백들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제 말했던 호빵이 선물. 이 언니가 엄청 신경 썼다고 꼭 전해줘.”

“알았어, 알았어. 재인아, 고마워!”

신이 나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본 유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죄다 고급 브랜드야!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진짜였네? 들고 오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겠다.”

“요 앞까지 차로 와서 괜찮았어.”

“차?”

“아, 버스 말이야.”

“그래? 이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던가……?”

유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입조심하자.

재인은 유라의 남다른 촉이 또 발동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유라는 눈앞의 선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꼬르륵. 꼬르륵.

도망 나올 생각에 아침을 거른 탓인지 재인의 배 속에서 난리가 났다.


“유라야, 나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일단 음식부터 시키자.”

“아침 안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네가 웬일이야?”

“그럴 일이 있었어. 메뉴판 좀 줘봐.”

“아, 잠깐만. 올 때가 됐는데…….”

시간을 확인한 유라가 출입구 쪽을 쳐다봤다.


“응? 누가 또 와?”

“어! 왔다!”

유라가 번쩍 손을 들어 반갑게 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