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멜로영화와 공포영화 사이
(20/129)
20화. 멜로영화와 공포영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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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멜로영화와 공포영화 사이
2022.08.09.
정곡을 찌르는 유라의 말에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역시. 최유라는 강적이다.
하지만. 난 너의 약점을 알고 있지.
재인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유라, 너 자꾸 이상한 소리 하면 호빵이 선물 보따리 몽땅 갖다 버린다.”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 저편에서 난생처음 듣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어! 서재인, 성질 급하긴.
“아니라는데 자꾸 친구 의심하고 그러면 못써, 너!”
―그래, 알았어. 믿을게. 친구인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겠니? 사랑한다, 친구야!
“진작 그랬어야지.”
이걸로 촉을 거둘 유라가 아니지만 일단 넘겼으니 됐다.
―근데 강나희는 진짜 괜찮대?
“응. 살아보니 별거 없다던데.”
진짜야. 죽도록 일만 했어.
―정말? 같이 산 지 얼마나 됐는데?
“4일째?
―말도 안 돼! 성인 남녀가 한집에서 나흘이나 붙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응, 서로 안 좋아하는데 당연하지.”
업무의 연속이었다니깐.
속 시원하게 말할 수도 없고, 이거.
―흐음. 혹시, 그 남자 잘생기긴 했는데 뭔가 엄청난 결함이 있니? 그쪽으로.
“그쪽? 무슨 쪽?”
재인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곧이어 유라의 자포자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됐다. 말을 말자. 모솔인 널 붙들고 내가 무슨 얘길 하니.
“그쪽이 뭔데? 야, 궁금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됐고. 혹시 그 남자가 별로 매력이 없니?
유라의 물음에 재인은 지난밤 산책할 때 보았던 도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밑에 언뜻 보인 우수 어린 눈동자,
밤색 롱코트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탄탄한 체격…….
잠시지만 산책로를 런웨이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도혁을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닐걸. 매력이 있긴 할걸.”
―그럼 강나희가 영 매력이 없나?
“그건 더 아닐걸! 걔가 생각보다 매력이 철철 넘쳐. 꽁꽁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그래서 슬프지만 아무도 몰라.
―…….
갑자기 유라가 말이 없었다. 무섭게.
너무 티 나게 말했나?
재인은 제풀에 찔려서 숨을 죽였다.
이윽고, 유라가 입을 열었다.
―흐음, 이상하네. 남자가 갑자기 뭔가 바뀌거나 하지 않았대? 갑자기 눈에 띄게 잘해준다거나.
“아, 그러고 보니 요새 좀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말해봐.
“음. 말도 전보다는 좋게 하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춥다고 하니까 옷도 벗어 주고…….”
―잠깐, 옷을 벗어 줬다고?
유라의 놀란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귀가 아플 정도였다.
“응. 그게 왜?”
―야, 그럼 진짜 시간문제네!
“뭐가?”
―둘이 불붙는 거. 곧 일 나겠네, 나겠어.
“그게 왜?”
―먹을 건 누구라도 사 줄 수 있지만 옷은 아무나 벗어 주는 거 아니다. 남자가 확실히 강나희한테 관심이 있네.
“뭐? 춥다고 하면 벗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얘가 진짜 뭘 모르네. 생각해봐. 이 엄동설한에 아는 여자가 추워한다고 막 옷을 벗어 주겠니? 남자는 무슨 변온동물이야? 일반적으로 남자는 관심 없는 사람한테 결코 그런 무모한 투자 따위 하지 않아.
“그래? 근데, 그 남자가 많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네가 차도혁 씨를 몰라서 그래.
―그럼 더 확실하지! 그 여자한테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거니까.
“그, 그런 거야?”
―응.
유라가 단호히 못을 박았다.
“아아, 그런 거였다니…….”
갑작스러운 깨침에 재인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어머, 벌써 12시가 넘었네. 재인아, 그럼 내일 보자.
“으응.”
―참, 내일 예쁘게 하고 나와. 꼭! 끊는다!
“……!”
뚝.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예쁘게 하긴, 뭘. 주말인데 편하게 나가야지. 어서 계약이 끝나서 유라한테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재인은 구시렁대며 침대에 큰대자로 누웠다.
요 며칠 정말 피곤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구 뒤엉켜 쑥대밭이 된 머릿속을 하나하나 정리해보았다.
차근차근 되짚어 보니 요새 도혁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갑자기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구내식당에 출몰하기까지 하고,
자꾸 뚫어지게 쳐다보고,
괜찮다는데 코트까지 벗어 주고…….
그게 유라가 말한 대로 내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순간 재인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누가 관심 있는 여자한테 맨날 뭐라고 하고, 일 잔뜩 줘서 혹사하겠어?”
제게 다짐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같이 있을 때도 일만 시켜먹고! 막 의심하고, 누구 만나지 말라고 윽박이나 지르고!”
그동안 쌓인 것을 입 밖으로 조목조목 꺼내니 더 열받는 재인이었다.
“고기도 편히 못 먹게 하고! 기껏 음식 차려줬더니 짜다고 불평이나 하고!”
그거야, 억지로 먹으라고 권한 건 나였지만.
그래도 한 그릇 다 먹었으면서.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렇게 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래, 팀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유라가 오해하는 거야.
신경 쓸 것 없어. 전혀.
재인은 애써 자신을 안심시키며 눈을 감았다.
명치를 간지럽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더는 올라오지 못하게 억누른 채.
* * *
토요일 아침.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살폈다.
편안한 니트 티셔츠에 바지까지 깔끔하게 블랙으로 맞춰 입은 도혁은 다행히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저기, 팀장님…… 제가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계약하기 훨씬 전부터 잡아뒀던 약속이 있는데요…….”
“약속?”
못마땅한 듯 도혁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재인은 간이 쪼그라들었다.
“네. 제일 친한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어요. 근데 그게 바로 오늘이에요.”
“오늘?”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해요. 저도 요새 너무 일에 몰두하느라 깜박하고 있었거든요.”
그럴 리가.
미리 얘기하면 못 가게 할까 봐 그런 거지.
도혁은 생각에 잠긴 듯 묵묵부답이었다.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현관 쪽으로 뒷걸음질했다.
유라에게 줄 반려견 용품이 가득 담긴 쇼핑백 두 개는 이미 아침 일찍 일어나 현관 구석에 놓아두었다.
탈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황.
도혁이 방심한 틈을 타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도망치고 보자.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재인은 자유를 찾아 출구를 향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드디어 현관 앞에 도착한 재인은 잽싸게 짐을 챙겼다.
그때였다.
“서재인 씨?”
도혁의 굵직한 목소리에 재인의 발이 덫에 걸린 것처럼 멈춰 섰다.
그냥 순순히 보내줄 차도혁이 아니지.
“아, 팀장님! 시키실 일이 있으면 다녀와서 저녁때 하겠습니다.”
“그 친구가 누군지 물어봐도 되나?”
도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보안상 중요한 문제라, 내가 알고 있어야겠어. 서재인 씨를 믿어보려고 노력 중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경 쓰일 수 있는 문제였다.
‘비밀이 새나가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재인은 도혁이 괜한 의심을 키우지 않도록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예요.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비밀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친구는, 여자?”
“네. 저 여고 나왔어요.”
“그렇군. 손에 든 건 뭐지?”
“아, 강 대리가 준 강아지 용품들이요. 오늘 만나는 친구가 강아지 키워서 가져다주려고요.”
도혁은 짐을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알았어. 만나고 와.”
도혁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재인은 도혁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도망쳐야겠다는 일념으로 재빨리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면 더 꼬인다고 했던가.
당황한 나머지 문 앞에서 허둥거렸다. 평소에는 잘만 열었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무려 세 개나 있는데 하나를 열면 다른 게 닫혀 있고, 다른 걸 열었더니 걸쇠가 걸려 있고…….
시간이 지체되자 귀신에 쫓기기라도 하듯 재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 끝에 뒤죽박죽인 상황을 겨우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휴우.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재인은 무언가 굉장히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깊은 탄식이 터졌다.
“아! 호빵이 선물 보따리!”
자물쇠를 여느라 잠깐 현관 바닥에 내려놨는데, 띠리리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흥분해서 뛰쳐나오는 바람에 들고 나오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었다.
“아우, 이 바보!”
자책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냥 이대로 갈까?’
빈손으로 가면 잔뜩 기대에 부푼 유라가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부을 텐데?
아우우우!
재인은 도리질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 수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최대한 팀장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가지고 나와야 하는데…….
“으아아아아악!”
문을 열자마자 재인은 괴성을 내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팔딱거렸다.
진한 회색 롱코트를 멋지게 걸친 도혁이 스크린을 찢고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혁의 비주얼만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멜로영화인데, 재인의 눈에는 공포영화로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티, 팀장님! 놀랐잖아요! 왜 거기 서 계세요?”
재인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말했다.
“가지.”
“갑자기 무슨 가지요?”
“데려다줄게. 짐이 무거우니까.”
도혁은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재인을 지나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인은 생각했다.
‘팀장님이랑 지내다가는 정말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
* * *
“어? 저기 타르트 가게가 새로 생겼네요. 타르트 좋아하는데 가봐야겠다.”
“어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요. 날이 추워서 곧 첫눈이 내리겠어요.”
“차가 너무 막히네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재인은 벌써 30분째 혼자서 떠들고 있었다.
원래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하지만 좁은 차 안에 도혁과 단둘이 있는데 어색한 침묵까지 흐르자, 몸 둘 바를 몰라 ‘아무말대잔치’를 벌이게 된 것이다.
그동안 도혁은 음, 그렇군, 별로, 따위의 원만한 대화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했다.
결국 밑천이 바닥난 재인은 창문에 이마를 댄 채 속으로 절규했다.
‘아, 빨리 탈출하고 싶어!’
대체 왜 이 좋은 토요일에,
대체 왜 팀장님과 둘이 오붓하게,
대체 왜 함께 팀장님의 차를 타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때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아까 도혁이 쇼핑백을 들고 앞장섰을 때, 재인은 뒤쫓아 가며 괜찮다고, 하나도 안 무겁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귓구멍을 틀어막은 건지 도혁은 제 할 말만 했다.
“무거워.”
“전 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재인은 다급히 쇼핑백으로 손을 뻗다 헛손질을 했다.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안으로 도혁이 쏙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진짜!
“안 타?”
재인은 닫히려는 문 사이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어디로 가면 되지?”
“팀장님,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제발 혼자 가게 해주세요, 네?
“어디지?”
“진짜 괜찮은데…….”
순간 마주친 도혁의 눈동자에서 그녀는 읽고 말았다.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재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혹시 진짜 친구를 만나는 건지 확인하려는 거야?’
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재차 물었다.
“어디?”
“광화문이요.”
재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도혁을 올려다봤다.
너님 마음대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