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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네가 책임져! (19/129)


19화. 네가 책임져!
2022.08.06.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한 남자라…….”

도혁이 이마를 짚은 채 나직이 읊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서 주임님이, 남자는 자고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한 남자가 최고라고 했었는데.」

오늘 아침 회의 시간에 연지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드니 성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할 때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온 도혁이 속된 말로 멍 때리다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심지어 맥락 없는 혼잣말까지.

점심시간.

도혁은 언제나처럼 25층에 있는 비공개 회의실에서 성준과 만나, 그룹 내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받는 중이었다.

시간이 부족한 도혁을 위해 본사에서 근무하는 성준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점심을 준비해 와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상 매일이었지만.

원래 성격이 낯을 가리는 것도 있지만, 도혁이 팀원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방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한 남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내가요?”

“네.”

골똘히 생각하던 주제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걸, 도혁은 뒤늦게 자각했다.

일하는 중인데 정신이 나갔군.

도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성준이 넌지시 물었다.


“도련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서재인 씨 때문이군.

눈치 빠른 성준은 이상행동의 원인을 금세 눈치챘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데다 일에만 빠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도혁이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자칫하면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는 가뜩이나 중요한 이 시점에.

대산그룹 일원에게는 반드시 따라야 할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분란을 방지하기 위한 장자 계승이 그 첫 번째.

두 번째는 경영에 참여하기 전, 반드시 3년간 실무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무를 통해 검증받지 못하면 설령 장자라도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장자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아들이었던 도혁은 일찌감치 후계자로서 수련을 받아왔다.

이미 해외 지사에서 2년간 근무하며 매출을 200퍼센트 넘게 상승시키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남은 1년, 대산F&G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도혁의 혼잣말 때문에 잠시 지체됐던 브리핑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영도 전무 쪽에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이상한 움직임이요?”

“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의 넘어왔던 사모펀드 측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차 대표님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지금 도혁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주주총회에서 작은아버지인 차정환 대표의 음모를 폭로하기 위해 비밀리에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차 대표는 우호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방법으로써, 사모펀드에 사업체들을 하나씩 팔아넘기는 계획을 몰래 진행해왔다.

그 첫 대상이 바로 핵심 사업체인 대산F&G였다.

15년 전, 대산그룹의 장자였던 도혁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그러자 그룹에는 큰 혼란이 들이닥쳤다.

아직 어린 도혁이 후계자 수업을 마칠 때까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차남 정환이 임시 대표직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막상 그 시점이 다가오니 정환은 도혁에게 회사를 넘겨주는 게 배알이 꼴려 그룹 전체에 해를 끼치려 하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를 생각하자 도혁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래요? 사모펀드가 발을 뺐다니 잘된 일이지만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계속 증거를 모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미 집중력이 흐트러진 도혁은 성준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 실장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나가죠.”

“네? 식사는 마저 안 하십니까?”

과연. 도혁은 로스트비프와 전복구이, 마리네이드 훈제연어 샐러드 등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넘어가는 최고급 도시락을 반도 먹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아침을 많이 먹었더니 속이 좀 불편해서.”

“아침을 드셨다고요?”

성준은 아침을 먹지 않는 도혁의 오랜 습관을 알기에 깜짝 놀랐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역시 서재인 씨 때문이군.

이쯤 되니 성준은 궁금증이 일었다.


‘천하의 차도혁을 이렇게 만든 서재인 씨의 매력은 대체 뭐지?’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도혁이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는 아는 체를 할 수는 없는 법.

도혁은 재인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지시를 하면서도 자세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같이 사는 것도 집을 비워야 하는 재인의 개인적인 사정과 프로젝트 때문이라고만 했다.

곧이곧대로 믿을 성준이 아니라는 걸 도혁도 알 텐데.

성준은 궁금증을 뒤로 미뤄두고 자리를 정리했다.


“도련님, 그럼 전 이만 본사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깍듯이 고개를 숙인 성준이 문밖으로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일이든, 다른 부분이든.”

연애 상담 대환영.

성준은 길 잃은 어린 양을 보듯 인자한 눈길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짙고 깊은 도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네. 그러죠.”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저기, 김 실장님…….”

성준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잔뜩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준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날 밤, 도혁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소파에 앉아 있는 재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내려놓았다.


“서재인 씨가 책임져.”

“이게 뭔데요?”

안을 들여다보라고 눈짓하는 도혁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재인은 뭐가 들었나 궁금해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게 다 뭐예요?”

쇼핑백 안에는 갖가지 강아지 간식과 샴푸, 액세서리 등 반려견 용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웃옷을 벗고 재인의 옆에 걸터앉은 도혁은 꽤나 답답했는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오늘 강 대리가 갖다 줬어.”

“이 많을 걸 다요?”

역시, 강나희.

뭘 하든 요란하게 하는구나.


“이건 뭐예요?”

‘해피’라는 이름표가 달린 목줄이 눈에 띄었다.


“자꾸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서.”

“그래서 둘러댄 이름이 ‘해피’예요? 팀장님, 생각보다 취향이 고전적이시네요.”

재인이 피식 웃자, 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갑자기 물어보니까…….”

“성별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수컷.”

“품종은요?”

“푸들.”

 

 
푸하하.

재인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있지도 않은 강아지에 대해 둘러대느라 진땀 빼는 도혁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출 줄을 몰랐다.

팀장과 강아지로 엮여보려는 나희의 노력도 눈물겨웠다.

우리 강 대리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네.


“몰라! 서재인 씨가 강아지랑 산다고 했으니 알아서 처리해!”

까르르 웃는 재인 때문에 바짝 약이 오른 도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에 재인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책임을 떠넘기시나.

그러고 보니 이 부분을 따질 타이밍을 놓쳤었다.


“그거야, 갑자기 팀장님이 둘이 산다고 하시니까 그랬죠.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어느새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온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둘이 사니까. 난 누구랑 달라서 거짓말을 못 하거든.”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그래요! 팀장님 때문에 하마터면 동거하는 거 들킬 뻔했잖아요.”

“그러게. 그랬으면 우리 둘이 같이 사는 거 모두 알았겠네.”

“들키면 난리가 났죠.”

“그랬겠지.”

“난리뿐이겠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둘이 같이 산다는 거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

도혁은 대답 대신 발끈하는 재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뭐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이 기분은?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팀장님, 약속……하시는 거죠?”

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그제야 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재인이었다.


“근데 강 대리님이 팀장님께 무척 관심이 많은가 봐요.”

재인은 엄청난 양의 반려견 용품들을 뒤적이며 혀를 내둘렀다.

도혁이 무심히 대답했다.


“난 관심 없어.”

“왜요? 강 대리님 엄청 미인이잖아요.”

좀 많이 밉상이긴 하지만.


“그런 타입 별로야.”

어쩌냐, 강나희.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나저나 그동안 그렇게 강 대리를 편애하더니, 정작 취향은 아니었던 거야?


“아, 맞다. 팀장님은 울면서 씩씩하게 잘 먹는 여자가 좋다고 하셨죠.”

다시 생각해봐도 취향, 참.


“맞아. 잘 기억하고 있네. 기억력이 나쁜 줄 알았더니.”

도혁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자존심이 상한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


“누가요? 저 기억력 엄청 좋거든요. 전화번호 외우고 있는 것만 해도 50개가 넘어요.”

“그래? 정말 기억력이 좋은지 앞으로 두고 보겠어.”

재인은 흠칫했다.

도혁은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도 바쁘신 분이 뭘 굳이 두고 볼 것까지야.

하지만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사람도 아니고.

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네, 그러세요.”

“내 번호는 외우고 있나?”

뜻밖의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뇨. 그건 휴대전화에…….”

“외워.”

도혁의 단호한 지시에 재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엉겁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좀 억울한 감이 있었다.

아니, 휴대전화라는 문명의 혜택이 있는 이 시대에 왜 굳이 회사 팀장님 번호까지 외워야 하지?

곧 회사를 그만두면 쓸데없는 TMI일 뿐인데.

재인은 도혁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는 팀장님은 제 번호 외우고 계세요?”

“010-9xxx-8xxx.”

“아, 예. 저도 팀장님 번호 바로 외우겠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 * *

그날 밤, 재인은 강나희의 선물을 처리하기 위해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라야, 기쁜 소식이 있어.”

―뭔데?

“이 언니가 호빵이를 위해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어.”

호빵이는 유라가 8년째 키우는 강아지의 이름이다.

새하얀 몰티즈인데 주인을 닮아 성격이 시크해서 주인 외에는 손! 해도 절대 손을 주지 않는 도도한 녀석이었다.


―선물? 뭔 일이야. 생전 개껌 하나 안 사다 줬으면서. 어디서 났길래?

“으응, 누가 주더라고.”

―누구?

“동물 좋아해서 막 퍼 주는 애 있어. 암튼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용품들도 수입 브랜드고, 간식들도 죄다 유기농에 수제야.”

―정말? 우리 호빵이 오랜만에 호강하겠네. 고맙다, 친구야!

“무거우니까 내일 꼭 차 가지고 와.”

―그 정도야? 그럼 내가 아예 너희 집으로 갈게.

“응. 그게 좋겠…… 아, 아니야! 절대 오지 마!”

재인은 깜짝 놀라 유라를 만류했다.


―뭐야, 다른 때는 집으로 간다면 좋다고 했으면서. 네가 들고 오려면 무겁잖아.

“괘, 괜찮아. 나 요새 팔에 근력이 부족해서 운동 중이야.”

재인이 당황해하는 걸 눈치챈 유라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뭔가 좀 이상한데…… 지난번부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알잖아, 난 언제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사람인 거. 하하하.”

최유라, 그냥 좀 넘어가자. 제발!


―흠. 그렇다 이거지. 아, 그 남자랑은 한집에서 잘 살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누, 누가 남자랑 산다고!”

도둑이 제 발 저린 재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유라의 시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나희 말이야. 왜 서재인이가 펄쩍 뛰고 그래?

“……!”

―마치 자기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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