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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벗어 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18/129)


18화. 벗어 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2022.08.02.



‘설마 나한테 벗어 주려고?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춥다는 게 벗어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재인은 등줄기를 타고 찌리릿 전기가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맥박이 마구 널뛰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싫어서 그런 걸 거야.

그래, 맞아. 불편하면 막 긴장되고 떨리고 그러잖아.

우리 팀장님 코트 걸칠 생각을 하니 너무 황송해서 식은땀이 다 나네?

차라리 내가 벗어 주고 말지.


“괘, 괜찮아요!”

재인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마지막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도혁의 손이 멈칫했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저 하나도 안 추워요! 어우, 막 땀이 나는데요.”

재인은 강력한 저항의 표시로 손부채질까지 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혁이 나직이 말했다.


“조금 전에 춥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게…… 아, 반어법이었어요!”

“반어법?”

“반어법이 제 특기거든요. 하하. 좋으면서 싫다고 하고, 맛없는데 너무 맛있다고 하고, 뭐 그런 거요.”

뭐라는 거니, 너.

횡설수설하는 걸 자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어 재인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혁은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요점이 뭐야?”

“그러니까……, 절대 절대 코트 안 벗어 주셔도 돼요, 팀장님.”

그 말에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러고는 쿡쿡 웃으며 마지막 단추를 마저 풀었다.


“서재인 씨가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군.”

응? 착각?

재인은 영문을 몰라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도혁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지나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

팀장님은 그냥 코트를 열어서 입고 싶으셨던 거구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재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식간에 추위가 싹 달아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뭐, 착각? 그 상황에서 단추 풀면 누구라도 벗어 주려고 그러나 보다, 오해할 수 있지! 괜히 사람 민망하게 만들고 말이야!’

재인은 속으로만 툴툴거리며 거의 뛰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도혁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로지 이 민망한 상황을 단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툭!

재인의 어깨 위에 무언가 얹어졌다.


 
도혁의 밤색 롱코트였다.

순간, 시원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익숙한 체향에 마치 그에게 폭 안긴 것만 같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깜짝 놀란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혁을 쳐다보았다.


“이건…… 왜요?”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반어법. 하나도 안 춥다는 건, 곧 몹시 춥다는 얘기지.”

그러고는 다시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얼떨떨한 재인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앞서가는 도혁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팀장님, 의외로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일지도…….’

그동안 도혁의 단편적인 면만 보고 그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밤, 남자답게 쩍 벌어진 그의 등이 유난히 넓고 듬직해 보였다.

재인이 홀린 듯 멀어지는 도혁을 바라만 보던 그때였다.

갑자기 휙 뒤돌아선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말했다.


“뭐 해? 빨리 오지?”

“아, 네! 갑니다, 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재인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새 도혁은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어찌나 보폭이 큰지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헉헉. 헉헉.

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나마 감상에 빠졌던 자신을 나무랐다.

자상은 개뿔! 바랄 걸 바라라고!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은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어젯밤, 재인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꼼짝없이 도혁과 두 달을 붙어 있어야 하니, 불편함은 잠시 내려놓고 최대한 편안하게 내 집처럼 지내보기로.

그동안 더부살이 신세라 걸렀었던 아침밥을 차려 먹는 것이 그 첫 시작이었다.

때마침 출근 준비를 마친 도혁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오늘따라 탄탄한 몸을 감싼 감색 슈트가 유난히 잘 어울렸다.


“팀장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아침 드세요. 해장도 할 겸 북엇국 좀 끓여봤어요. 혼자 먹기도 그렇고 해서요.”

재인은 박애 정신을 몸소 실천한다는 마음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가 그랬지. 자고로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굴면 안 된다고.

도혁은 제법 그럴싸하게 차린 아침상을 보고 한마디 했다.


“나 어제 술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아, 맞다! 그랬지.

사실 재인이 순전히 제 속 쓰린 것만 생각해서 끓인 북엇국이었다.


“아, 그래도 아침은 든든히 드시고 가셔야죠. 요새 아침을 걸렀더니 오전에 통 기운이 없더라고요.”

“나 원래 아침 안 먹어.”

하여튼 매정하기는.

그냥 차려준 거 잘 먹겠다고 하면 덧나나?

재인은 몰래 입술을 삐쭉이고는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굶으면 더더욱 안 되죠. 앞으로는 아침 차려드릴 테니 드시고 가세요.”

“됐어. 속 불편해.”

말 참, 예쁘게 하시네.

재인의 속이 상하든가 말든가 도혁은 무심히 덧붙였다.


“그리고, 힘들 텐데 이런 거 안 해도 돼.”

“이제 한동안 여기서 지낼 거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어요. 팀장님과도 잘 지내고 싶고요.”

흠흠.

갑자기 헛기침을 한 도혁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좋을 대로.”

“어머. 팀장님, 혹시 어제 코트 벗어 주신 것 때문에 기침하시는 거 아니에요?”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재인이 빤히 쳐다보자 도혁이 눈길을 피했다.

어라, 어째 얼굴도 빨개진 것 같은데?


“팀장님, 혹시 열도 있으세요?”

“그, 그런 거 아니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흐음. 그럼 따끈하게 북엇국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이왕 차려놓은 거 아깝잖아요.”

재인은 별 기대 없이 한 번 더 권해봤다.

그런데 웬일로 도혁이 순순히 자리에 앉더니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북엇국을 연거푸 먹는데도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맛이 없나? 왜 아무 말이 없지?’

요리라면 꽤 자신이 있는 재인인지라 도혁의 무심한 반응이 몹시 신경 쓰였다.


“팀장님, 맛은 어때요?”

“뭐…….”

그게 끝이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딱 세 번 같이 식사한 게 다지만, 그때마다 도혁은 별 반응이 없었다.

같이 밥 먹는 사람이 불편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잘 먹겠다, 맛있다, 예의상이라도 말 한 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말을 말자.

팀장님한테 뭘 바라니.

재인은 툴툴거리며 북엇국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 * *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가득 스며들어 온 회의실.

회의를 하러 모인 상품기획 1팀 팀원들은 급히 호출받아 부장님께 간 도혁과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규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회식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다들 몹시 피곤해 보였다.

들어올 때부터 반쯤 눈이 감겨 있던 지훈과 박 과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행여 도혁이 들어올까 걱정이 된 재인은 두 사람을 깨울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회의실 문을 주시하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나희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서 주임, 혹시 어제 팀장님이 데려다주셨어요?”

“맞아요.”

“설마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일은 무슨.

그냥 연인들 사이에 끼어서 단둘이 산책하고, 춥다고 했더니 팀장님이 코트 벗어 준 거?

괜스레 뜨끔해진 재인은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일은 무슨 일이요. 졸다 깼더니 집 앞이던데.”

“정말이에요?”

“그럼요. 강 대리님은 잘 들어갔어요?”

순간 나희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러더니 획 고개를 돌려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코를 골고 있는 박 과장을 째려봤다.

옆에 앉은 연지가 재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지훈 씨가 그러는데, 어제 결국 강 대리님이랑 지훈 씨, 박 과장님한테 붙잡혀서 새벽에 들어갔대요. 박 과장님이 고주망태가 되는 바람에 사모님한테 연락했더니, 오히려 길바닥에 버리라고 했다나요. 겨우 설득해서 들여보냈다더라고요.”

“강 대리랑 지훈 씨가 고생 많았네.”

팀장님을 코앞에서 놓친 것만으로도 한이 맺혔을 텐데, 술주정까지 상대하다니.

아무리 밉상인 나희라도 오늘만큼은 인간적으로 안쓰러워 보였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눈을 번쩍 뜬 박 과장이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실로 놀라운 생존본능이었다.

회의실을 쓱 둘러본 도혁이 규민을 찾았다.


“한 과장은 어디 갔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규민이 두 손 가득 커피를 사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모두 피곤하시죠? 회의 시작하기 전에 커피 한 잔 드시죠.”

싱긋 웃는 모습이 상쾌하기까지 한 규민은 오히려 어제보다 생기가 넘쳤다.


“어머, 자상하기도 해라! 역시 한 과장님 너무 멋지세요.”

“한 과장님 아주 센스가 넘치십니다!”

너도나도 규민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규민은 컵 뚜껑에 ♡ 표시가 된 커피를 재인의 앞에 내밀었다.


“서 주임은 연한 거 좋아하죠? 반 샷만 넣어달라고 했어요.”

“아, 고마워요.”

“어머! 서 주임님 취향까지 알고 계세요? 너무 자상하시다.”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규민이 눈을 찡긋했다.


“제가 기억력이 좀 좋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서 주임님이, 남자는 자고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한 남자가 최고라고 했었는데.”

“어? 그거 내 얘기 같은데요?”

규민이 넉살 좋게 웃자 연지가 부러운 듯 눈을 반짝였다.


“서 주임님은 좋겠어요. 세심하게 취향을 기억해주는 남자도 다 있고.”

“남자가 아니라 친구야.”

혹시라도 도혁이 오해할까 봐 걱정된 재인이 정색하며 정정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규민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서 주임은 아침 먹었어요?”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속이 좀 쓰려서 북엇국 끓였어요.”

“맛있었겠다. 난 혼자 살아서 그런지 집에서 밥 잘 안 먹는데. 나도 서 주임이 끓인 거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한규민, 또 시작이네.

재인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요새 인스턴트 북엇국 아주 잘 나오거든요. 이따가 하나 사 줄게요.”

“뭐? 북엇국?”

갑자기 박 과장이 눈을 번쩍 뜨더니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아이구, 속 쓰려. 아침에 우리 와이프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북엇국을 끓여주겠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북어가 똑 떨어져서 못 먹고 왔지, 뭐야.”

아아. 그러시구나.

하마터면 노숙할 뻔한 분이 잘도.

팀원들 모두 박 과장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박 과장은 꿋꿋한 얼굴로 도혁에게 아부성 멘트를 날렸다.


“어제는 팀장님이 계시니 더 화기애애하고 즐거웠습니다. 하하. 해장은 하셨습니까?”

“팀장님은 해장하실 게 없어요. 술 못 드신다고 어제 전혀 안 드셨거든요.”

나희가 저만 아는 정보인 양 으스대며 말을 가로챘다.
그러자 갑자기 도혁이 제 앞에 있던 생수병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팀장님, 목이 많이 마르셨나 봅니다?”

박 과장의 말에 도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아침에 먹은 북엇국이 좀 짜서.”

북엇국?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다더니?

눈이 주먹만 해진 팀원들이 재인과 도혁을 번갈아 보았다.

필사적으로 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에이, 말도 안 돼, 하는 얼굴로 시선을 거뒀다.

그 와중에 어금니를 질끈 깨문 재인은 이런 우연이, 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팀장님도 북엇국 드셨구나.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내 속도 방금 전까진 시원했었는데.

재인은 무신경한 도혁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그리고 뭐? 국이 짜?

기껏 차려줬더니 공개적으로 디스나 하고, 너무하시네.

도혁과 잘 지내보자고 마음먹은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시험에 들고 만 재인이었다.

한편, 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규민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혼자 사신다더니 북엇국도 직접 끓이시는군요? 전 요리는 하나도 할 줄 몰라서 부럽습니다.”

그러자 도혁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인스턴트는 영 입맛에 안 맞아서요.”

그 순간,

도혁과 규민의 눈이 딱 마주쳤다.

줄다리기라도 하듯 팽팽한 두 눈빛 사이에 파바바박! 스파크가 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재인은 생각했다.


‘둘 다 북엇국을 많이 좋아하나 보네? 어쩐지, 팀장님도 아침에 잘 드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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