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안 가면…… 안 되겠지?
(17/129)
17화. 안 가면……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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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안 가면…… 안 되겠지?
2022.07.30.
도혁은 뚫어지게 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또 왜 저러시지?’
당황한 재인은 부담스러운 눈길을 피해 하릴없이 고기만 뒤집었다.
불판 위에서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팀장님이 내게 할 말이라면…….
아! 역시 그건가?
“팀장님, 고기 더 드세요! 눈치 없게 저만 너무 많이 먹었죠?”
재인은 싹싹하게 웃으며 도혁의 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수북이 올려 주었다.
규민에 대한 오해는 접어두라는, 아부 100퍼센트의 눈물겨운 노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혁은 한쪽 눈썹을 실룩 올릴 뿐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우리 팀장님, 아직 오해가 안 풀리셨구나.
아직 갈 길이 먼 재인이었다.
* * *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리 기사가 도착하자, 잔뜩 술이 오른 박 과장이 시뻘건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각.
박 과장이 이대로 가긴 아쉽다며 3차로 노래방에 가자고 물고 늘어지는 걸 지훈이 겨우 뜯어말린 뒤였다.
“모두 조심히 들어가요. 내일 봅시다.”
도혁은 2차로 들른 호프집에서도 심기 불편한 얼굴로 별말이 없었다.
덕분에 재인은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나마 먹은 것마저 얹힌 것 같았다.
규민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도혁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행여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경계하는 듯했다.
‘하필이면 규민이가 장난치는 걸 들어서. 어쩐지, 생전 밥 한 번 같이 안 먹었으면서 왜 회식에 적극적으로 나서나 했어.’
재인을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해서 감시하러 쫓아온 게 분명했다.
‘날 그렇게 못 믿나? 스파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가 억울해서라도 프로젝트 꼭 성공시키고 차도혁이랑 멋지게 빠이빠이 한다!’
재인은 제 앞을 가린 도혁의 쩍 벌어진 등에 대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좋아하는 고기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 편히 먹지 못한 울분을 담아서.
“팀장님, 저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집까지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도혁의 옆에 선 나희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간드러진 목소리.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짓는 눈웃음. 살짝 휘청거리는 몸짓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나희의 행동에서 어떻게든 도혁의 차를 타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강나희.
재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제 도혁이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하던 찰나,
갑자기 고개를 돌린 도혁이 어깨너머로 재인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곤란한데…….”
아, 같은 집에 사는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러시는구나.
재인은 환하게 웃으며 도혁의 등을 떠밀었다.
“팀장님, 전 알아서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강 대리님 데려다주세요.”
“어서 가요, 팀장님.”
나희는 괜스레 재인에게 눈을 흘기며 도혁을 재촉했다.
그때, 어디선가 애타게 나희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리, 우리 집 방향이잖아! 가는 길에 내려줄게, 타!”
차에 올라탄 박 과장이 나희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는 팀장님 차로 갈게요.”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나희가 억지웃음으로 박 과장의 제안을 튕겼다.
하지만 오지라퍼 박 과장의 레이더망에 걸린 이상 쉽사리 빠져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하지 말고 어서 타!”
“정말, 괜찮은데…….”
“아, 대리 기사님 기다리시잖아. 괜찮으니까 어서 타래도!”
“강 대리님 타기 전엔 박 과장님이 출발 안 하실 것 같아요. 어서 타세요!”
박 과장과 같은 동네라 이미 차에 타고 있었던 지훈까지 거들었다.
거절할 명분이 아예 없는 상황.
결국, 나희는 쓸데없는 배려에 입이 댓 발 나온 채 도살장에 끌려가듯 박 과장과 함께 떠났다.
시끌벅적한 이들이 떠나자, 줄곧 잠자코 재인의 옆에 서 있던 규민이 입을 열었다.
“재인아, 집이 어디야? 택시 탈 건데 내가 내려주고 갈게.”
“아, 아니야! 너 집이 목동이라며. 우리 집은 반대쪽이라 너무 돌아가.”
“그래도 걱정되니까 내가…….”
“택시 타면 되니까 괜찮아. 내일 보자.”
“그러지 말고…….”
그때, 연지가 생글생글 웃으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 과장님, 저도 목동인데 저랑 같이 가요.”
“아아, 네. 그래요, 그럼.”
규민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서 주임님은 팀장님이 책임지시면 되겠어요.”
연지가 재인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순간 재인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런 거였어?
아무래도 연지 씨가 규민이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처음 봤는데 엄청 빠르네.
그렇게 두 사람마저 떠나자, 썰렁하게도 도혁과 재인 단둘이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의 그들 사이로 사나운 초겨울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재인은 두 손을 비벼 발그레한 볼을 감쌌다.
가시방석 같았던 회식이 끝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가지.”
도혁이 차에 오르며 말했다.
또 차 안에서 불편할 생각을 하니 재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팀장님, 저 바람도 좀 쐬고 술도 깰 겸 걸어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많이 늦었는데?”
”괜찮아요. 20분인데요, 뭘. 집에 가는 길인 데다 아직 사람들도 많고 불빛도 환하잖아요. 그럼 집에서 봬요.”
재인은 꾸벅 인사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 * *
회사 뒤편에는 강둑을 따라 긴 산책로가 나 있었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강물 위에 그려진 화려한 빛의 향연이 한데 어우러져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일인데도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흐읍. 후우-.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재인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언제나 이곳을 걸으며 머리를 식혔다.
강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다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만의 산책로를 남자와 단둘이 걷게 될 줄이야.
그것도.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준 장본인, 차도혁과.
인생 참, 재밌게 흘러가네.
“같이 걷지.”
조금 전, 재인이 산책로에 접어들었을 때 도혁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본인이 한 말을 충실히 실천하려는 듯 정말 순수하게 걷고만 있었다.
덕분에 어색함은 재인의 몫이었다.
‘분명히 규민이가 장난친 것 때문에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혁이 같이 걷자고 했을 때, 그 일로 한마디 듣겠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정작 도혁은 아무 말도 없었다.
‘혹시 신종 고문 방법인가?’
어색하게 만들어서 이실직고하게 만들려고.
풋. 재인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
잔뜩 굳어 있는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마주친 김에 오해나 풀어야겠다.
“팀장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요, 한 과장님이랑 저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절대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아셨죠?”
저 계약 위반한 거 아닙니다. 의심은 그만 접어두세요.
재인은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다음 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재인 씨, 한 과장이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네?”
도혁이 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내가…… 불안하니까.”
뜻밖의 말에 재인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래요? 한 과장님이랑 같이 프로젝트 하려면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는데.”
“그 얘기가 아니라…….”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그렇게 걱정이 되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 스파이 같은 거 아니고, 입도 무거워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
“그리고 어차피 두 달 뒤면 저희 계약도 끝이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서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도혁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음 편히 가지라고 한 말인데 오히려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어떡해야 하나, 재인은 눈치가 보였다.
“서재인 씨, 일본에는 꼭 가야 하는 거지?”
뜬금없는 질문에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요. 당연하죠!”
“혹시라도 못 가게 되면…… 안 되겠지?”
“네?”
딱.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거, 일본에 꼭 가고 싶으면 알아서 잘하라는 협박 맞지?
협박도 참 은근하게 하신다.
재인은 호흡을 가다듬고 힘주어 말했다.
“팀장님, 저 꼭 유학 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한 과장님이랑 합심해서 프로젝트 꼭 성공시키고, 스파이 누명도 벗을 거예요. 그러니까 팀장님도 장학금 받게 해주신다는 약속 꼭 지켜주세요. 아셨죠?”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 도혁의 미간에 깊은 세로줄이 새겨졌다.
재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무심히 대답했다.
“알았어. 서재인 씨 뜻이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원만하게 해결된 것 같지?
재인은 힐끔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그런 걸까?
비로소 도혁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체격에 긴 밤색 롱코트를 입은 도혁은 런웨이를 걷다 그대로 나온 모델 같았다.
바람에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우수 어린 눈빛과 어우러져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동안 무서워서 잊고 있었는데, 멋지긴 하다.’
스물일곱 평생 처음으로 만난, 몹시 취향인 얼굴을 마음껏 쳐다보지 못해 재인은 안타까웠다.
팀장님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성격도 무난하고,
재벌 후계자도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분명 위험했겠지?
좀 치명적인 외모여야 말이지.
휘잉. 휭.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으니 그만 꿈 깨라는 듯 제법 날 선 바람이 불었다.
재인은 망상을 떨쳐내려 도리질을 했다.
‘정신 차려, 서재인! 상대는 차도혁이라고!’
갑자기 술이 확 깨버린 재인은 으스스 오한이 들었다.
하프코트인 데다 원피스를 입어서 그런지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 바짝 움츠렸다.
“아, 바람이 차네요.”
“음. 춥군.”
도혁도 코트 깃을 세워 단단히 여몄다.
그때, 갑자기 앞서가던 한 커플이 우뚝 멈춰 섰다.
굽 높은 부츠에 짧은 치마로 한껏 멋을 부린 여자가 제 볼을 감싸며 말했다.
“오빠, 나 너무 추워!”
“그래? 잠깐만 있어봐.”
남자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긴 점퍼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앞섶까지 정성껏 여며준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와락 감싸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딸랑 티셔츠만 하나 입은 남자의 건강이 몹시 염려되긴 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저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더니.
27년을 꿋꿋하게 모솔로 살아온 재인으로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진짜 부럽다!’
난데없는 서글픔에 바람이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지는 재인이었다.
“아, 너무 춥다! 그죠, 팀장님?”
재인은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빨리 집에 가요,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재인은 기막힌 광경을 목격하고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도혁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코트 단추를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