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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팀장님의 사생활 (16/129)


16화. 팀장님의 사생활
2022.07.26.



 
나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네? 서 주임이 한 과장님 여자친구라고요?”

누가?

재인이 고개를 드니,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캑. 캑.

감자샐러드를 오물거리던 재인은 된통 사레가 걸렸다.

오매불망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휙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규민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짓궂게 웃었다.

이런! 한규민, 또야?

규민은 대학 시절에도 친구들이랑 있을 때 유독 재인에게만 비슷한 장난을 자주 쳤었다.

이 시점에서 문제라면, 때는 업무의 연장인 회식이고, 팀원들은 친구가 아니라는 거?


“여자친구? 그럼 한 과장이랑 서 주임이 사귀는 사이라는 거야?”

대각선에 앉은 박 과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니, 흠흠……. 그게…… 흠흠!”

“재인아, 괜찮아?”

재인이 목이 잠겨 탁탁 명치를 두드리자 규민이 물컵을 내밀었다.

너 병 주고 약 주니?

재인은 눈을 흘기며 단번에 물컵을 비웠다.

겨우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지금 누가, 누구랑, 사귀는 사이라고 했습니까?”

뒤편에서 들려온 서릿발 같은 음성.

재인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이 순간,

차도혁이었다.


“팀장님,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막 시작했습니다!”

박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혁을 맞이했다.

굳이 쓸데없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이면서.


“아, 글쎄 서 주임이 한 과장님 여자친구라지 뭡니까?”

“아니에요!”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다른 테이블에서도 힐끔거릴 정도였다.

재인이 민망함에 우물쭈물하는 사이, 도혁은 무심히 박 과장을 지나쳐 비어 있던 나희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그 자리는 재인의 맞은편 자리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눈인사를 하려고 도혁을 쳐다본 재인은 서늘한 눈빛에 흠칫 놀랐다.

순간, 시원하게 쭉 뻗은 그의 눈매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아!

불현듯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계약서에 적힌 ‘이성 교제 금지’ 조항이었다.


「계약 기간 중에는 절대 이성을 사귀지 않는다? 이건 뭐예요?」

「보안을 위해 당연한 거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서요. 24시간 팀장님이 붙어 계실 텐데 사귀긴 누굴 사귀나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던 조항이 이렇게 소환될 줄이야.

우리 팀장님이 단단히 오해하셨나 보다.

재인은 황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팀장님, 생각하시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런 게 뭡니까?”

“규민이, 아니 한 과장님은 제 대학교 때 친구예요.”

“……규민이?”

도혁이 규민의 이름을 살벌하게 읊조리는데, 갑자기 박 과장이 끼어들었다.


“대학교 때 친구? 그럼 두 사람 그때부터 사귄 거야?”

“어머, 한 과장님 혹시 일부러 서 주임님이랑 같이 일하려고 들어오신 거예요?”

연지까지 눈을 반짝이며 치고 들어왔다.

대체 얘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거지?

재인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늘 7년 만에 우연히 만난 거예요.”

“서 주임, 정말이야? 근데 그냥 친구라면서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수상하게.”

“수, 수상하긴요! 일하느라 바빠서 회식 때 얘기하려고 한 거죠. 한 과장님은 왜 이상한 장난을 쳐서! 뭐,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네 이놈, 어서 책임지지 못할까!

재인이 나무라듯 눈짓을 하자 규민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예전에 장난쳤던 게 생각나서 그만. 재인이가 여자니까 여자친구인 건 맞잖아요.”

“한 과장님도 참. 전 또 서 주임이랑 진짜 사귀시는 줄 알았잖아요.”

나희가 한껏 눈웃음을 치면서 입술을 샐쭉거렸다.

규민의 넉살 좋은 웃음에 다른 팀원들도 어이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딱 한 사람, 도혁만 빼고.

이제는 오해가 풀렸겠지,

하며 도혁을 쳐다본 재인은 흡, 숨을 멈췄다.

레이저가 나올 것처럼 그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직도 오해하고 계신 거야?

에이, 그렇게까지 설명했는데 오해하는 게 이상하지.

아무리 별난 팀장님이라도…….

팀장님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에라, 모르겠다. 고기나 먹자.

재인은 애써 태연한 척 상추에 큼지막한 고기를 두 점 얹었다.


“서재인, 잘 먹는 건 여전하구나?”

규민이 싱긋 웃으며 재인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 주었다.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른 재인은 원망을 듬뿍 담아 속삭였다.


“너 때문에 기운 빠져서 그런 거거든! 고릿적 장난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이제 그만해.”

“미안, 미안. 오랜만에 너 놀라는 거 보니까 귀여워서.”

“퍽이나! 방금 너 때문에 한 3년 늙었어.”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그나저나 큰일이네. 너 고기 사 주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어.”

“장난 그만하라니까!”

얘가 원래 이렇게 능청스러웠나?

대학 때는 장난을 잘 치는 남동생 같았는데.

지금의 규민은 뭐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것 같은 규민의 웃는 모습에 재인도 그만 따라 웃어버렸다.

한편, 도혁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지 재인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완전 무방비 상태로군. 나랑 있을 때는 잘 웃어주지도 않으면서…….’

다정하게 ‘규민이’라고 이름까지 부르고.

도혁의 이름도 전에 딱 한 번 부르긴 했다.


「월권행위예요. 조심해주세요, 차도혁 씨.」

아주 냉랭한 표정이었지.

흠. 도혁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물컵을 부술 듯 쥐었다.

단숨에 찬물을 한 컵 비웠는데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이제 와 자를 수도 없고…….’

규민을 뽑고 프로젝트에 딱 맞는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했는데,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기분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장난을 가장한 규민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거슬렸다.


‘분명 뭔가 있어.’

저 밑바닥부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젠장. 나민우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데.

대체 서재인의 주변에는 왜 이리 남자들이 많은 건지.

예상치 못한 적수의 출현에 도혁은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도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팀장님, 이렇게 밖에서 뵈니까 더 반가운 거 있죠. 기념으로 우리 건배해요.”

“됐습니다. 술을 안 마셔서.”

“어머, 안 드시는구나. 혹시 체질적으로 안 받아서? 전 너무 잘 받아서 탈인데. 호호.”

“…….”

도혁의 묵묵부답에도 나희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무슨 왕의 간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주 무기인 굴곡진 몸매를 한껏 드러내며 도혁에게 딱 붙어 앉아 질문을 던졌다.


“근데요, 팀장님은 퇴근하면 주로 뭐 하세요?”

도혁의 입에서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답이 나왔다.


“일합니다.”

“어머, 팀장님 농담도 잘하세요.”

나희의 말에 재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강나희, 그거 농담 아니야.

슬프지만 내가 산 증인이야.

재인은 입이 간질거리는 걸 꾹 참았다.


“그럼 주말에는요?”

“일합니다.”

“어머, 팀장님 너무 재밌으세요!”

나희가 까르르 뒤로 넘어갈 듯 웃었다.

하지만, 곧 주말을 앞둔 재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역시나.

주말에도 종일 일해야 하는구나.

지독한 워커홀릭 차도혁이니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다니.

이번 주 주말에 유라랑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말하지?

무려 후계자님께서 주말에도 온몸을 바쳐 일하시겠다는데.

일개 직원이 놀러 나가겠다고 간도 크게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재인의 시름이 깊어지는 가운데, 도혁의 사생활을 파헤치기로 작정을 했는지 나희가 또 질문을 던졌다.


“팀장님, 가족이 외국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혼자 살기 외롭지는 않으세요?”

뜨끔.

재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도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도혁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재인의 예감을 적중시켰으니.


“전혀. 둘이 사니까요.”

“팀장님!”

 

 
도혁의 폭탄 발언에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왜 서 주임이 놀라고 그래요?”

나희가 핀잔을 주는데도, 얼이 빠진 재인은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


‘팀장님, 미치셨어요?’

그나저나 대차게 ‘팀장님!’을 외쳤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

주춤하던 재인의 눈에 때마침 맛깔스럽게 익은 고기가 포착되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기를 집어 도혁의 앞접시에 놓으며 말했다.


“고기 좀 드셔보시라고요. 여기가 최상급 돼지고기만을 엄선해 72시간 와인에 숙성해서 그런지 깊이 있는 맛에 식감도 뛰어나고, 잡내도 전혀 안 나는 데다…… 암튼, 엄청 맛있어요.”

그거 먹고 제발 입 좀 닫아요!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아무말대잔치를 벌인 재인은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반면, 도혁은 폭탄 발언을 한 주제에 매우 느긋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진짜! 터뜨린 사람은 팀장님인데 왜 내가 수습을 해야 하냐고!’

재인이 소리 없이 분통을 터트리던 그때.

나희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팀장님, 누구랑 같이 사시는데요? 혹시…… 여자친구?”

“그건…….”

도혁이 입을 여는 찰나.

재인이 다급히 말을 가로챘다.


“팀장님! 외로워서 집에 강아지 키운다고 하셨었죠? 애인이나 다름없다고.”

“강아지요?”

나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혁은 안절부절못하는 재인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아주 눈치가 없어서 주인 맘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강아지랑 살고 있죠.”

설마, 그거 내 얘기 아니지?

도혁의 눈을 빤히 쳐다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들키지 않고 넘겨서 천만다행이었다.

재인이 찜찜함을 뒤로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

갑자기 나희가 물개처럼 박수를 쳤다.


“어머, 너무 귀엽겠다! 저 강아지 정말 정말 좋아해요. 지금 푸들이랑 포메라니안 키우거든요.”

나희는 신이 나서 지금까지 키워왔던 강아지들의 에피소드를 줄줄이 읊었다.

나희의 얘기가 지루한 탓인지, 다른 팀원들도 먹는 데 열중할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재인도 이때다 싶어 열심히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규민의 장난과 도혁이 던진 폭탄 때문에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여서 충전이 시급했다.

내 평생 강아지 덕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폭탄을 제거하고 나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규민이는 그렇다 쳐도 대체 팀장님은 무슨 생각인 거지?

동거하는 걸 티 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혼자 산다고 하면 끝날 일을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끝났나 싶었는데, 또다시 나희의 질문이 이어졌다.


“근데요, 팀장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강나희, 그만해. 하나도 안 궁금해.

나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울면서 씩씩하게 잘 먹는 여자.”

“네? 차……암, 독특하시네요.”

도혁의 이상형을 캐내 거기에 맞춰보려는 속셈이었을 텐데.

오히려 어이없는 답을 들어버리는 바람에 나희는 머릿속이 복잡한 눈치였다.

하지만 재인은 알고 있었다.

강나희라면, 울면서 먹는 연습을 하고도 남을 거라는 사실을.

그래, 애써라.


‘그나저나 울면서 씩씩하게 잘 먹는 여자라. 성격만 유별난 줄 알았더니 취향도 참 별나시네.’

재인은 무심코 고개를 내젓다 그만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순간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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