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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팀장님, 혹시…… 아니죠? (15/129)


15화. 팀장님, 혹시…… 아니죠?
2022.07.23.



 
착 가라앉은 도혁의 목소리에 재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지금 민우 선배를 의심하는 거야? 최 전무가 민우 선배를 총애하는 건 맞지만 민우 선배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어!’

재인은 이참에 확실하게 민우에 대한 오해를 풀고 넘어가고 싶었다.


“팀장님,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저랑 친한 선배라서가 아니라, 나 팀장님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오해?”

“민우 선배는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

겨우 펴졌던 도혁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네, 맞아요. 그러니 괜한 오해로 민우 선배한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지금 내가 나 팀장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인 건가?”

“안 그러실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최 전무님과 가깝다는 이유로 괜한 의심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내게 간곡히 부탁할 정도로…… 나 팀장이 그렇게까지 소중한가?”

“당연하죠.”

친오빠 같은 사람인 데다, 친언니 같은 서연 언니와 결혼할 거니까요.

곧 새신랑이 될 건데 회사에서 잘리면 곤란합니다.

신혼집 얻는다고 대출도 최대로 당겨 받았다던데.

그러니까 잘 좀 봐주세요, 예비 대표님.

재인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눈빛에 담아 도혁에게 보냈다.


“서재인 씨가 그렇다면…… 알았어.”

도혁은 무심히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재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도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뀐 것을.


“팀장님, 감사합니다!”

알았다고 했으니 이제 민우 선배를 의심하진 않겠지?

재인은 오해가 잘 풀린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반면에 도혁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행여 시답잖은 상대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라. 대산그룹 후계자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면 절대 허락 못 한다.」

차 회장은 한 번 마음 먹으면 냉혹하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알기에 도혁은 그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재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모든 게 망가질 것 같아서.

아직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할아버지의 반대를 걱정하기 전에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재인을 걱정하는 게 먼저였다.


‘가장 믿을 만한 남자라고? 그렇게 소중하냐니까, 당연해? 내가 대표만 돼봐라, 제일 먼저 나민우부터 자른다!’

하.

너무도 한심한 제 모습에 도혁은 헛웃음마저 나왔다.

이젠 하다 하다 유치한 복수까지 꿈꾸다니.

지금껏 오는 여자들을 마다하기만 해봤지, 단 한 번도 마음을 얻기 위해 먼저 노력해본 적이 없었다.

재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쳐다보며 속으로 물었다.


‘제발 가르쳐줘.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얻을 수 있지?’

도혁은 이제까지 맞닥뜨렸던 그 어떤 문제와도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재인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내일 새로 오실 과장님께 드릴 자료 정리 끝났습니다.”

“수고했어.”

“근데 새 과장님은 어떤 분이에요?”

재인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퇴근 전, 도혁은 내일 새로운 과장이 올 거라고 공표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팀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빈자리가 일주일도 안 돼 채워지는 건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재인은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부담감을 나눠 가질 이가 누구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컸다.


“외국계 기업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 실력자야.”

“실력 있는 분이라니 정말 다행이네요.”

“이번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니까.”

“그래야죠. 그것 때문에 팀장님이랑 저랑 계약까지 하고 같이 살고 있잖아요.”

그것 때문만이 아닌데.

도혁은 대답 대신 복잡한 심경으로 재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재인은 쭉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지난밤의 피로까지 떼로 몰려와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입속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무방비 상태인 재인을 빤히 쳐다보며 도혁이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랑 복장이 꽤 다르네? 추위를 많이 탄다더니?”

“네?”

불시에 기습 공격을 받은 재인은 두 팔을 높이 치켜든 채 굳어버렸다.

어젯밤, 겹겹이 껴입은 옷 때문에 땀띠가 날 지경이어서 오늘은 평소처럼 얇은 옷 한 겹만 입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도혁이 제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폭 경계를 푼 이유도 있었다.

관찰력도 좋으셔라. 그냥 좀 넘어가지.

무안해진 재인은 슬그머니 팔을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 하루 있어보니까 예상보다 집이 엄청 따뜻하기도 하고…… 편히 있으라고 하셔서…….”

“잘했어.”

도혁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그만 들어가 봐. 어제처럼 식탁에서 엎드려 자지 말고.”

“식탁이요?”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잠깐만.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분명히.

생각해보니 잠깐 눈을 붙인다고 엎드린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식탁에서 침대까지 순간 이동을 했을 리도 없고…….

설마?

히익!

재인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보고 기겁했다.

자신을 번쩍 안아 든 도혁과 그 품에 폭 안겨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제 모습을.


“왜 그래?”

“팀장님, 혹시…… 아니죠?”

“뭐가?”

도혁과 눈이 마주치자 말문이 턱 막혔다.

몹시 궁금하고 찜찜한데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


“아,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빛의 속도로 자리를 정리한 재인은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 제 방으로 들어갔다.

탕.

방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가쁜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에이, 아니겠지. 누구나 귀소본능이란 게 있잖아? 몽유병 환자처럼 제 발로 침대까지 왔을 거야.’

그래, 그런 걸로 치고 어서 잠이나 자자.

이미 졸음이 싹 달아나 버린 마당에 더 깊이 파고들다가는 날밤을 샐 것 같았다.

팀장님과의 전략적 동거 2일 차.

재인은 풀리지 않는 의혹을 애써 묻어둔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출근 시간 10분 전.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는 언제나처럼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재인은 맨 뒷줄에 서서 칼바람에 시달리느라 빨갛게 된 두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런데 오늘따라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앞쪽에 있는 여직원들 몇몇이 뒤돌아 재인을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귓속말을 했다.


‘뭐지? 혹시 팀장님이랑 같이 산다는 걸 들켰나?’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데다 차를 같이 타고 다니면 회사 사람에게 들켜서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따로 출퇴근을 해왔다.

차만 타면 입을 딱 다물어버리는 도혁이 불편한 것도 한몫했지만.

그런데 지금, 우려했던 상황이 닥친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이제 여자들은 아예 대놓고 재인 쪽을 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재인의 뒤쪽을 보며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뭐야, 날 보는 게 아니었어? 뒤에 누가 있길래?’

재인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입이 헤 벌어졌다.


 
훤칠하고 보기 드물게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재인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서재인.”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재인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한규민?”

“맞아. 기억력이 영 나쁘진 않구나?”

서글서글한 얼굴 위로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던 새내기 시절 규민의 얼굴이 겹쳐졌다.


“야! 너 유학 갔었잖아.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부터 이 회사 상품기획팀에 합류하기로 했어.”

“뭐? 그럼 우리 팀에 새로 온다는 과장님이 너였어?”

“맞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얼빠진 재인의 표정이 우스운지 규민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재인이 너 여기 다닌다는 거 유라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동안 유라랑 연락하고 있었어?”

“아니. 얼마 전에 SNS로.”

“최유라, 그랬으면서 어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할 수가.”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너 놀라게 하고 싶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어.”

“성공했네. 놀라서 기절할 뻔했으니까.”

“미안, 미안. 앞으로 잘 부탁해, 재인아.”

싱긋 웃는 규민을 보자 재인은 풋풋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 * *



“한규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규민이 인사를 하자 나희와 연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여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미모라 절로 눈이 가는 게 당연했다.

규민은 옆에 서 있는 도혁과 대비되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도혁이 ‘겨울’이라면, 규민은 ‘봄’이랄까.

순수하게 외모만 따지자면 도혁이 한 수 위다.

그러나 규민은 보기만 해도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눈웃음에 배려 넘치는 매너가 몸에 배어 있어서,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때마침 재인의 눈에 문밖에서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여직원들이 포착되었다.


‘그래, 흔치 않은 광경이긴 하지. 신도 참, 너무 심하게 몰아주셨어.’

“서 주임? 지금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네?”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그만 도혁에게 딱 걸려버렸다.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서 주임, 한 과장이 빨리 업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인수인계 잘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업무 시작합시다.”

언제나처럼 칼 같은 도혁의 정리 멘트를 끝으로 규민의 신고식이 막을 내리려던 때.

박 과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팀장님, 새 식구가 생겼는데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죠. 회식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 과장의 단골 레퍼토리인 회식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공짜 술을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틈만 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회식을 외치는 박 과장이었다.


“좋을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도혁의 허가가 떨어지자 박 과장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때, 팀장실에 들어가려던 도혁이 돌아서서 한마디 덧붙였다.


“내친김에 오늘 합시다.”

“네?”

“장소는 회사 뒤편에 있는 고깃집으로 하죠.”

도혁의 말에 박 과장을 비롯한 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도혁은 자신의 환영회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고 법인카드만 넘겨줬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었던 그가 회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니 놀랄 수밖에.


“팀장님도…… 오시려고요?”

“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처음으로 같이하신다니 너무 좋아서 그러죠. 회사 뒤편 고깃집 맛이 끝내줍니다. 아주 바람직하면서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하하.”

박 과장은 행여 도혁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싶어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 재인은 갑자기 잡힌 회식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민우가 프러포즈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왜 하필 오늘이람? 민우 선배한테 또 미안해지네.’

재인은 민우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 * *

회사 뒤편에 자리 잡은 고깃집.

박 과장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연신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 시간 전, 도혁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출발하라고 했는데, 30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팀장님은 언제 오시는 거야? 지훈 씨, 전화 한 번 더 해봐.”

“아까 전화했을 때 7시 전에는 오신다고 했어요. 곧 오실 테니 먼저 시작하시죠.”

“그럼 그럴까?”

박 과장의 말이 떨어지자 불판 위에 신속하게 고기가 쫙 깔렸다.

모두가 지글지글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고기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잿밥에만 관심을 가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강나희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도혁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 옆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얼굴에 한가득 웃음꽃이 핀 것이, 도혁과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규민의 앞자리를 놓치지 않는 다소 무리한 전술을 펴고 있었다.

나희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규민에게 물었다.


“한 과장님,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네.”

“정말요? 여직원들이 너무 실망하겠어요. 어떤 분인데요?”

규민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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