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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정말 그게 다야? (14/129)


14화. 정말 그게 다야?
2022.07.19.


캑. 캑.

갑작스러운 도혁의 등장에 재인은 제대로 사레가 걸려버렸다.


“티,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 주임은 여기 어쩐 일입니까? 나 팀장님과.”

“……밥 먹고 있죠. 보시다시피.”

“무척 즐거워 보이던데 재미있는 얘기 중이었나 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 내뱉는 도혁의 눈빛이 서늘했다.

재인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오금이 저렸다.


‘지금 나 팀장과 무슨 내통을 하고 있었냐고 의심하는 건가? 눈빛을 보아 하니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아, 별 얘기 아니었어요. 시답잖은 잡담이죠, 뭐. 그렇죠, 선배?”

순간 민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본 재인은 아차, 싶었다.

프러포즈 이야기를 시답잖은 잡담이라고 말해버렸으니, 사정을 모르는 민우는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참,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하면 어쩌지?’

재인은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주 중요한 얘기였죠. 하하.”

“아주 중요한 얘기?”

도혁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미치겠네!’

재인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시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중요하지는 않은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주 중요하지는 않은 얘기?”

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더 큰 오해를 산 것 같다.

수습불가인 상황.

재인은 더는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하릴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아직 민우가 회사에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으니 제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우 선배, 도와줘요!’

무인도 해변에 ‘SOS’ 글자를 새기는 심정으로 민우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무슨 의미인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듯 민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 팀장님, 제가 서 주임한테 같이 밥을 먹자고 불렀어요. 서 주임과는 대학 때부터 친한 사이거든요.”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셨군요.”

도혁이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재인이가 신입생 때 ‘오빠’ 하고 쫓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8년이나 지났네요. 그때 정말 귀여웠는데, 하하.”

“신입생 때부터, ‘오빠’ 하고 쫓아다녔다니, 정말 귀여울 만하군요.”

나직이 읊조리는 도혁의 미간에 세로줄이 생겼다.

도혁의 안색을 살피던 재인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재인이는 제가 가장 아끼는 후배예요. 그러니까 차 팀장님, 아무쪼록 우리 재인이 잘 부탁합니다.”

“물론이죠. 가장 아끼는 후배, 우리 재인이인데.”

 

 
도혁이 깔끔하게 요점 정리하며 맞장구를 치자, 민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본 재인은 크나큰 문제점을 깨달았다.

민우가 저를 위해 친분을 강조하며 잘해주라는 은근한 압박을 넣은 것은 알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최 전무의 신임을 받고 있는 민우와 친하다는 건 오히려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재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혁을 흘깃거리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언뜻 무심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 속에 휘몰아치는 광풍을.

아. 오늘도 순탄치 않은 하루가 되겠구나.

재인은 한숨을 푹 쉬며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먹었다.

힘들 때일수록 든든히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다.

재인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던 그때.

도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가죠.”

전화를 받은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인과 민우에게 굳은 얼굴로 인사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팀장님, 괜찮…….”

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혁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재인은 도혁의 착 가라앉은 마지막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 * *

한세병원 VIP 특실.

특급 호텔 스위트룸을 옮겨온 듯한 병실 한가운데에 백발의 노인이 힘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대산그룹 회장이자 도혁의 할아버지인 차대산이었다.

도혁이 병실에 들어서자 성준이 차 회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도련님 오셨습니다.”

“으음……. 도혁이가……?”

“네. 그럼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편히 얘기 나누십시오.”

“그래…….”

성준이 밖으로 나가자, 게슴츠레 눈을 뜬 차 회장이 도혁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도혁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좀 어떠세요?”

“일어나려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지 뭐냐. 이제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

“나는 너만 잘되면 된다. 그거면 지금 저세상에 가도 여한이 없어.”

차 회장이 마음 약한 소리를 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도혁이 네가 어서…….”

“할아버지, 이번엔 또 뭡니까?”

도혁은 차 회장의 말을 뚝 자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 회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뭐냐니……?”

“왜 또 이러시냐고요.”

“갑자기 쓰러졌다니까…….”

“이거 비타민에 영양제인 거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도혁이 검지로 수액을 가리키자 차 회장은 뜨끔한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독한 놈 같으니라고. 걱정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고…….”

“할아버지 이제 꾀병 좀 그만 부리세요. 어젯밤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안 놔주시고. 결국 밤새우다시피 일했습니다.”

“그거야…… 다 네놈 탓이야, 이놈아! 네 녀석이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코빼기도 안 비추니까 그렇지!”

상체를 일으켜 앉은 차 회장이 뱃심 좋게 호통을 쳤다.

도혁은 기가 막혔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서릿발 같은 기세로 불호령을 내리며 회사를 좌지우지했던 할아버지였다.

늘 높다란 산같이 커 보이기만 했던 분이 요즘 들어 왜 이리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구시는지.


“할아버지, 애도 아니고 대체 왜 그러세요?”

“너 말 잘했다. 왜 그런지 몰라서 물어? 너 왜 지난 토요일에 서진물산 딸 안 만난 거냐? 기껏 신경 써서 약속 잡아놨더니 바람이나 맞히고.”

“또 그 얘기세요?”

“내가 그거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제 그만 포기하실 때도 됐잖아요.”

“이유를 알아야 포기를 하든 말든 하지, 이놈아!”

“전 분명히 선은 안 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토요일.

도혁은 차 회장이 멋대로 잡고 통보한 선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차 회장이 막무가내여서 아예 입을 닫았더니, 도리어 긍정의 의미로 해석해버린 게 문제였다.


“이 녀석이! 대체 뭐가 문제냐? 왜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지 이참에 얘기나 들어보자.”

“할아버지야말로 몰라서 물으세요?”

“내가 모르긴 뭘 몰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도혁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차 회장의 말문이 막혔다.


“전 행복하지 않은 결혼 따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야? 네놈이 뭔데 감히 네 아비 인생을 멋대로 판단해?”

차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할아버지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한 결혼이라, 애정도 없이 그렇게 평생 일만 하다 가셨잖아요. 전 그렇게 살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이런 꾀병 같은 거 부리지 마시고요.”

“너…… 네놈이 정말!”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도혁은 자리를 박차듯 일어났다.

돌아선 그의 등에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와 꽂혔다.


“너 혹시 다른 여자라도 마음에 둔 게냐?”

“……!”

“노파심에 말해둔다만, 행여 시답잖은 상대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라. 대산그룹 후계자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면 절대 허락 못 한다.”

도혁은 의심으로 가득 찬 차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정말이냐? 믿어도 되는 거지?”

도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성준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백옥 같은 피부에 차분한 눈빛을 가진 귀티가 흐르는 미인이었다.

밋밋한 무채색 투피스에 긴 머리를 아래로 내려 묶은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우아한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회장님, 기다리시던 서진물산 윤세정 님이 오셨습니다.”

“오오, 세정 양, 와줘서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회장님. 편찮으시다기에 놀라서 달려왔어요.”

탁자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은 세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 회장에게 다가갔다.


“이제 많이 좋아졌어요. 참, 이쪽은 차도혁이라고 내 손자 녀석이에요.”

“어렸을 때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알아요. 안녕하세요, 윤세정이에요.”

세정이 생긋 웃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하는데도 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 녀석아, 왜 멍하니 보고만 있어!”

차 회장의 채근에 도혁이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차도혁입니다.”

“지난번에 바람맞힌 것도 사과해야지.”

“…….”

“이 녀석이! 미안해요, 세정 양. 원체 숫기 없는 녀석이라…….”

차 회장이 도혁을 나무라며 대신 사과하자, 세정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바쁜 일이 있으셨겠죠.”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세정 양. 이렇게 마주친 것도 인연인데 둘이 같이 차라도 한잔하고 가요.”

“저는 괜찮은데 도혁 씨가 어떠실지…….”

세정은 다소곳이 웃으며 도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고 차 회장이 꾸민 계략이 분명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는지.

차라리 잘됐다.

도혁은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전에는 마음 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 자체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일하던 중이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를 마친 도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세정을 지나치며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는 도혁의 등 뒤로 차 회장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혁아, 좀 전에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라.”

도혁은 말없이 그대로 문을 닫았다.

* * *

그날 밤.

재인과 도혁은 식탁에 마주 앉아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저기……, 팀장님?”

“왜?”

“괜찮으세요?”

“뭐가?”

도혁이 고개를 들자 재인이 제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여기를 엄청 찡그리고 계세요. 뭐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낮에도 급히 나가시더니…….”

“없어, 그런 거.”

도혁은 그제야 미간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낮에 할아버지를 만났던 일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낮에 나 팀장님 만났던 일 때문에 오해하고 계신 건 아니죠? 정말 일 관련해서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다 사적인 얘기들뿐이었어요.”

“사적인 얘기?”

도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재인을 보며 물었다.


“서재인 씨, 나 팀장과는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 했지?”

“네. 같은 동아리라 1학년 때부터 친했어요.”

“그게 다인가?”

“뭐가요?”

영문 모를 질문에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자코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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