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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와 마주칠 확률 ‘제로’ (13/129)


13화. 그와 마주칠 확률 ‘제로’
2022.07.16.


잠든 재인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나오자, 도혁은 숨이 턱 막혔다.


‘설마 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뒤이어 몽롱한 음성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팀장님,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도혁은 재인의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섬세한 손길로 쓸어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글쎄.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네.”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이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왜?”

“엄청 피곤해 보여서요. 어제 잘 못 주무셨어요?”

“좀 늦게 자긴 했는데…… 그렇게 티가 나?”

“네.”

연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 데다 다크서클은 턱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휴가까지 내시고,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요?”

재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진짜 ‘일’이 많긴 했지.

어젯밤엔 결국 새벽 2시 반까지 일했다.

도혁이 먼저 들어가라고 했지만, 남은 일거리를 보니 밤을 새워야 끝날 것 같아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장에서 상처 입은 아군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는 전우애 같은 게 발동했다고나 할까?

30분 만에 졸음이 쏟아져서 괜한 짓을 했다며 후회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도 있었다.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낯선 집에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데 불편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퇴근 후 집 안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녀도 모자랄 판에,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더 나은 기가 막힌 상황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두 달이면 끝나니까 버틸 수 있다.

그래, 팀장님 집을 사무실이라고 생각하자.

퇴근하자마자 곧장 출근한다 생각하면 되지, 뭐.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출근이라…….

아,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하아암. 재인은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크게 하품을 했다.

재인의 눈꺼풀이 감기려고 하자 연지가 제가 마시려던 커피를 내밀었다.


“주임님,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고마워, 연지 씨.”

“모처럼 휴가 내셨던 건데 쉬지도 못하시고 어째요.”

그러게 말이야. 내 팔자야.

재인은 졸음을 쫓으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가만히 있으면 섭섭한 박 과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 주임, 솔직히 말해봐. 일 끝나고 투잡 뛰지?”

풉!

재인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

그래, 수당까지 나오니 투잡은 투잡이지.

실없는 가운데 가끔 소 뒷걸음치다 쥐 잡듯 정곡을 찌르는 박 과장이었다.


“아뇨! 투잡이라니 말도 안 되죠.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서요.”

재인이 펄쩍 뛰자 박 과장이 믹스커피를 홀짝거리며 핀잔을 줬다.


“나 참, 농담인데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찌, 찔리긴 누가요.”

“근데 오늘은 웬일로 팀장님이 늦으시네? 가장 먼저 출근하시는 분이.”

“아아, 갑자기 예산안 회의가 잡혀서 곧장 들어가셨어요.”

재인이 무심코 대답한 순간,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아차! 실수했다.


“그걸 서 주임이 어떻게 알아? 서 주임보다 일찍 출근한 나도 아직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

오늘따라 간발의 차이로 재인보다 먼저 온 박 과장이 실눈을 뜨며 물었다.

재인은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느라 진땀을 뺐다.


“그, 그게…… 출근하는데 전화로 일을 지시하시면서 박 과장님께 그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팀장님이? 왜 나한테 직접 얘기 안 하시고? 이상하네.”

그러게요.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만하네요.

그때, 말문이 막힌 재인 대신 대답이라도 하듯 박 과장의 직통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네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화를 끊은 박 과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재인을 쳐다보았다.


“팀장님이 긴급 예산안 회의에 참석하니 아침 미팅은 우리끼리 하라고 하시네. 미리 얘기 못 해서 미안하다면서.”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히네.

재인의 이마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해달라고 한 걸 깜박하셨나? 철두철미한 팀장님도 허술한 구석이 다 있네.”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잖아요. 과장님, 이제 그만 미팅하러 갈까요?”

“아, 그래야지. 다들 회의실로 가자고.”

박 과장의 말에 모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사히 넘어간 것 같지?’

재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웬걸.

이제 좀 넘어가나 싶었는데 나희가 눈을 치켜뜨며 발목을 잡았다.


“근데 서 주임, 혹시 팀장님이랑 사적으로 연락하는 거 아니에요?”

흡, 재인은 다시 숨을 들이켰다.

진정해라, 심장 심장.


“아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회사에서 마주치는 것도 무서운데요. 아까도 일 시키시면서 어찌나 뭐라고 하시던지 귀가 다 아팠다니까요.”

“아무래도 수상해. 팀장님이 나한테는 업무 시간 외에 따로 전화하신 적이 없는데, 왜 서 주임한테만 그러냐고요.”

설마 그게 포인트인 거야?

샘낼 걸 샘내라.

재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저번에도 팀장님이랑 둘만의 비밀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맞네! 서 주임, 그 비밀이란 게 뭐야?”

나희와 환상의 콤비인 박 과장까지 거들었다.

당황한 재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쳤다.


“에이, 그거 농담인데 믿었어요? 둘만의 비밀이 뭐가 있겠어요. 업무 얘기였죠.”

“그거 정말이에요?”

“그럼요. 오늘도 일 잔뜩 받아서 야근 확정이에요.”

재인이 앓는 소리를 하는데도 나희는 뱁새눈을 거두지 않았다.

강나희, 그냥 좀 넘어가자.


“흐음, 그래도 뭔가 찜찜한데…….”

박 과장이 심각한 표정의 나희를 다독이며 말했다.


“강 대리, 뭘 그리 신경 써? 팀장님이 유독 서 주임한테 일 많이 주는 거 알면서 그래. 자, 자, 늦었으니까 어서 아침 미팅 시작합시다.”

그 말에 나희가 마지못해 회의실로 향했다.

재인은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험했어. 앞으로 말조심해야지.

입에 지퍼라도 채워두고 싶은 재인이었다.

재인이 회의실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그때,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민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재인아,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

 

* * *

점심시간, 북적이는 구내식당 구석 자리에 재인과 민우가 앉아 있었다.

고기를 찾아보기 힘든 육개장을 뒤적이며 민우가 말했다.


“더 맛있는 거 사 준다니까 마다하고…….”

“여기가 딱 좋아요. 아, 맛있겠다!”

그 말을 하면서도 재인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구 찾는 사람 있어?”

민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났을 때부터 자꾸 주변을 살피는 재인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었다.


“아, 아니에요.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많긴 하네. 배고플 텐데 어서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재인은 밥을 한 숟갈 입에 넣으면서도 한 번 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여 도혁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였다.


「나민우 팀장이 최 전무 사람인 거 몰라? 최 전무는 작은아버지의 충복이야.」

민우를 따로 만나지 말라 했던 도혁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괜한 오해를 살 게 불 보듯 뻔하니까.

그걸 알면서도, 재인은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로 미안했던 터라 민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다행히 아침에 회의에 참석한 도혁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도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구내식당이고 주변에 회사 사람들이 많으니 괜찮겠지.’

더군다나 재인이 아는 한, 도혁은 한 번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광합성을 하거나 공기만 먹고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점심시간에는 밖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구내식당에서 도혁과 마주칠 확률은 ‘제로’였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재인은 가슴이 조마조마해 육개장이 무슨 맛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민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재인아, 너 괜찮아?”

“뭐가요?”

“차 팀장이 많이 힘들게 하는 것 같던데. 그때 보니까 퇴근하는데 갑자기 일을 시키고 좀 심하더라.”

“괜찮아요. 일인데요, 뭐.”

재인은 민우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우 선배에게 다 털어놔 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내가 차 팀장한테 잘 얘기해볼게. 팀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연차가 더 높으니까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어.”

“아니에요! 절대 안 돼요!”

 

 
밥숟가락 쥔 손을 내저으며 재인이 외쳤다.

선배, 눈물 나게 고마운데요.

회사 오래 다니고 싶으면 제발 그러지 마요.

재인은 가뜩이나 최 전무랑 엮여서 도혁에게 딱 찍혀버린 민우가 행여 잘못될까 걱정스러웠다.


“괜찮아, 괜찮아. 차 팀장이 그렇게 무서워?”

“무섭긴요. 알고 보면 팀장님 엄청 좋은 분이에요. 겉보기에 무뚝뚝해서 그렇지 뒤에서는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진짜야?”

새빨간 거짓말인데요.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요, 선배.

도혁이 회장님 손자라는 얘기가 입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재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참, 프러포즈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요?”

“안 그래도 그것도 좀 상의하려고.”

민우가 쑥스러운지 코끝을 찡긋했다.


“서연 언니, 진짜 좋겠어요. 선배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거 알면.”

“그러려나? 하하.”

서연은 재인이 친언니처럼 따르는 대학 선배로 민우와는 7년째 사귀는 중이다.

부모님께 떠밀리듯 내년 3월에 결혼식 날을 잡은 두 사람이었지만, 아직 정식 프러포즈는 못 했다.

민우는 둘의 역사를 지켜봐 온 재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얻고 있었다.

지난주 카페에서도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얘기를 나눴던 건데 도혁이 괜한 오해를 한 거였다.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반지보다는 목걸이가 좋을 것 같아.”

“잘 생각했어요. 서연 언니한테 슬쩍 떠봤는데 언니가 좋아하는 브랜드 목걸이 디자인이 새로 나왔대요. 예쁜 게 많은데 비싸서 참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따 링크 보내줄게요.”

“그래? 나한테는 통 얘길 안 해서 몰랐네.”

민우는 고민을 덜어서인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언제든 도울 일 있음 말만 하세요.”

“역시 재인이 너밖에 없다. 고마워.”

“뭘요.”

“그럼 재인아,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돼? 내가 뭘 알아야지.”

“아, 내일 저녁이요……?”

목걸이를 같이 골라달라는 얘기였다.

서연 언니를 생각하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데 도혁에게 어떤 핑계를 둘러대야 할지 난감했다.

재인이 고심하는 사이, 민우가 그녀의 뒤를 보며 말했다.


“어? 차 팀장님.”

잠시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재인은 도혁이 언급되자 흠칫 놀랐다.


“갑자기 우리 팀장님은 왜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민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인의 옆자리에 탁, 하고 식판이 놓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옆자리에 털썩 앉은 이는,

구내식당에 있을 확률 ‘제로’였던 도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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