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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으니까 (12/129)


12화.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으니까
2022.07.12.


꿀꺽.

재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 왜요?”

“왜일까?”

도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인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저기요, 그걸 알면 내가 왜 물어보겠어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진땀을 흘리는 재인과 달리 도혁의 태도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뭐, 뭐, 더 시키실 일 있으세요?”

도무지 감이 안 와서 업무 보고 때 예의상 하는 말을 던져봤다.

쿡쿡. 도혁의 낮은 웃음소리가 거실 전체에 퍼졌다.

재인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도혁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제 볼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팀장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도혁의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잠자코 바라만 보던 도혁이 갑자기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목덜미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는 순간.

재인은 방문 잘 잠그라고 했던 유라의 말을 떠올렸다.


‘최유라, 너의 선견지명을 무시한 내가 한스럽구나! 이제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음은 도혁을 밀치고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티, 팀장님?”

재인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도혁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지나 목덜미를 스쳤다.

재인의 자그마한 얼굴을 가릴 만큼 커다란 손이 입맞춤하듯 가녀린 턱선을 감싸 쥐었다.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어깨를 스리슬쩍 감싸 안아왔다.

이 모든 것이 불시에 일어나 재인은 미처 저항할 틈이 없었다.


‘꺄아아아아악!’

재인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혁의 팔을 붙잡았다.

그것도 잠시.

주춤했던 그의 손이 기세 좋게 다시 다가왔다.

기겁한 재인은 온 힘을 다해 밀쳐냈다.


“그, 그만요!”

“왜, 서재인 씨도 원하는 거 아니었어?”

포획한 사냥감을 쳐다보는 듯한 도혁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다 알고 있었잖아. 내 집에 들어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게 무슨……?”

그럼 원래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거야?

재인은 순진하게 도혁의 약속을 믿고 호랑이 굴로 들어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재인에게 그윽한 시선을 던지며 도혁이 말했다.


“이런 뜻이었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은 재인의 여린 입술을 집어삼킬 듯 덮쳤다.


“꺄아아악! 꺅! 꺅!”

재인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재인 씨, 괜찮아?”

응?

재인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탁 옆에 선 도혁이 정신 차려, 라는 눈빛으로 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막 집에 들어왔는지 코트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왜 그래? 꿈에 귀신이라도 본 건가?”

정답!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걸 보긴 했지.

팀장님, 너요.


“아, 아니에요.”

재인은 민망함을 어색한 웃음으로 덮으며 살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우, 다행히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자꾸만 꿈속 장면이 생생히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뜻이었잖아?’라며 입술을 부딪혀오던 도혁의 뇌쇄적인 눈빛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재인의 망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도혁이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재인의 심장박동에 가속도가 붙었다.

금세 코앞까지 걸어온 도혁은 코트를 벗어 소파 팔걸이에 던지듯 걸쳐놓았다.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재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꿈속에서 본 것처럼 11시가 한참 지나 있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팀장님, 많이 늦으신다더니 정말이었네요.”

“그렇게 됐어.”

재인의 옆에 앉은 도혁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답답한지 셔츠 단추까지 잇따라 풀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적막이 흘렀다.

가만.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방금 전 꿈속에서 겪은 상황임을 깨달은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이런 게 데자뷔?

그런 게 실제로 있을 리가 없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니 확인해보자.

재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혁에게 꿈속과 똑같은 말을 건넸다.


“마, 많이 힘드셨나 봐요.”

“응.”

도혁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짧게 대답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주 피곤한 일.”

순간, 재인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응’이야 흔한 대답이라 칠 수 있지만, ‘아주 피곤한 일’은 무시할 수 없는 증거였다.

설마 꿈속 상황이 그대로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팔딱팔딱.

맥박이 다급히 위험 신호를 날렸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해!’

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팀장님, 저 먼저 자러 갈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행여 도혁에게 붙잡힐세라 재인은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난데없는 괴력에 붙들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혁이 재인의 팔목을 붙든 채 나직이 속삭였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 말을.


“가지 마.”

“꺄아아아아악!”

재인은 비명을 지르며 도혁의 가슴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그 바람에 도혁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 털썩 소파에 눕혀졌다.

문제는, 팔목이 붙들려 있던 재인도 그대로 중심을 잃고 도혁의 몸 위에 같이 엎어졌다는 데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맡았던 청량한 바다 향기가 그녀의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음 순간.
재인은 도혁의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맨살에 볼을 맞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온 집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악! 죄송해요! 팀장님,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싫어요! 안 돼요!”

“서재인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날카로운 질책이 날아들었다.

아!

재인은 그제야 맨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슴을 감싸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납득이 가게 자세히 설명해봐. 대체 뭐가 싫다는 거야?”

몸을 일으켜 앉은 도혁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또 나왔다.

아주 느긋하게 문책하겠다는 사인.

재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모범답안을 찾아보려 했으나, 이 상황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겨우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말뿐이었다.


“아, 그게…….”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전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답답했는지 도혁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니까…….”

팀장님이 그 큰 손으로 제 얼굴이랑 어깨를 막 이러고저러고, 그러다가 키스했잖아요!

……제 꿈속에서요.

입은 있되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는 재인은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괜히 얘기했다간 과대망상증이냐고 비웃겠지? 서재인, 너 왜 그랬니! 내가 팀장님이라고 해도 황당하고 억울하겠다.’

그러다 불현듯 재인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갑자기 손을 잡고 가지 말라고 한 사람이 이상한 거 아냐? 엄연히 남녀가 유별한데 기습적인 스킨십이라니! 게다가 공사 구분 확실히 하기로 계약까지 한 사이에 말이야.’

다행히 재인에게도 할 말이 생겼다.

기가 살아난 재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당당하게 따졌다.


“팀장님이 갑자기 가지 말라고 붙잡으시니까 놀래서 그랬죠. 팀장님이야말로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역공을 받고도 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으니까.”

아직 못다 한 일?

재인을 응시하는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겨우 잠잠해진 그녀의 맥박이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뜻……?”

대답 대신 도혁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턱 끝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 * *



“아직 멀었나?”

“잠시만요. 곧 끝나갑니다.”

새벽 1시 즈음, 재인은 식탁에 앉아 열심히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자리 잡은 도혁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꼼꼼히 확인하느라 고개도 들지 않았다.

도혁이 말한 아직 못다 한 일이란,


“내일 긴급 추가 예산안 회의가 잡혔어. 지난 5년간 신제품 개발에 들어간 비용을 비교 분석한 자료가 필요해. 서재인 씨는 자료가 정확한지 검토하고 타이핑해줘.”

‘아직 못다 한 일’이란 게,

진짜로 그 ‘일’이었을 줄이야.


‘아우, 창피해! 괜히 나 혼자 난리부르스를 췄네.’

재인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문득 어젯밤 도혁에게 끌려가 저녁을 먹었던 일이 생각났다.

워커홀릭이 어쩐 일로 야근을 안 하나 생각했는데, 이런 꿍꿍이가 있었던 거다.

어제 잘 먹여놓고 오늘 실컷 부려먹겠다는 심산이었겠지.

앞으로도 틈만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일을 시킬 게 불 보듯 뻔하다.

아이고, 내 팔자야.

역시 차도혁.

손해 보는 계약은 하지 않는 남자.

그래도 수당이 나온다는 게 어디냐.


“서재인 씨?”

“네?”

저를 찾는 소리에 재인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뚝 끊겼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무슨 생각을 그리해?”

“아, 죄송합니다!”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보는구나.

타다다닥. 타닥.

재인은 보란 듯이 큰 소리를 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서재인 씨?”

“네?”

또 뭔데요?

일하라고 눈치 주셨으면서 왜 자꾸 부르세요!

재인은 하고픈 말을 꿀꺽 삼키고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뭐 더 시키실 일 있으세요?”

“그렇게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나?”

“……!”

과연, 재인은 사우나에 들어앉은 것처럼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티셔츠 위에 트레이닝 티셔츠를 껴입고, 마무리로 후드 집업을 덧입고 끝까지 잠가 올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심지어 하의도 내복까지 세 겹이었다.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제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서요. 하하.”

그럴 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실내에서 이렇게 입고 있진 않지.

기다리라는 도혁의 전화를 받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껴입었다.

혹시 모르니까.

하. 도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회사에서는 블라우스 하나로 잘만 버티면서?”

“팀장님, 자료 정리 다 끝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재인은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얼굴로 큰 눈을 깜박거렸다.

할 말이 없을 땐 말 돌리는 게 최고지.

딴청 부리는 재인을 잠자코 쳐다보던 도혁은 다시 서류철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메일로 보내.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 자고. 수고했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네?”

도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더 중얼거렸다.


“안 잡아먹으니까.”

“……!”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란 재인이 쳐다보자, 도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서류를 넘겼다.

재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에이,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단둘이 한집에 있어도 일에 몰두하느라 제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도혁이다.

긴장이 풀린 재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이 날 여자로 볼 리가 없지. 방문 잘 잠그라고? 유라야, 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그저 마음 편히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고마운 재인이었다.

진실이야 어찌 됐든.

* * *



“첫날부터 내가 너무했나?”

도혁은 식탁에 엎드려 자는 재인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재인과 함께 사는 첫날, 그녀를 그냥 들여보내기는 아쉬웠다.

실제로 일손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같이 있고 싶어도 일 외에는 다른 핑계를 찾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예상보다 늦어져서 먼저 들어가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남아서 일을 도와주었다.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는 게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도혁은 재인이 깨지 않게 살며시 담요를 덮어주었다.

손을 거두면서 손가락 끝이 재인의 볼에 살짝 스쳤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여운이 금세 사라져버려 안타까웠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재인을 바라보던 그때, 그녀의 입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음.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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