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다려, 자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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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기다려, 자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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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기다려, 자지 말고
2022.07.09.
재인은 도혁의 집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여자의 흔적을 마주하자 몹시 당혹스러웠다.
원치 않게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도혁은 외아들인 데다 어머니는 외국에 계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순간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전에 팀장님 여자친구가 같이 살았었나요?”
“그럴 리가요. 계속, 쭈욱, 혼자 사셨습니다. 여자친구도 없으셨고요.”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하는 걸로 보아 성준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넘어간대도, 그 성격을 감당할 여자가 흔친 않을 거다.
‘그럼 이 방은 뭐지? 설마…… 팀장님이?’
순간 재인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이스 잠옷 차림으로 침대 위에 다소곳이 누워 있는 도혁을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심지어 정성껏 고데기로 만 긴 머리에 곱게 화장까지 한 얼굴이었다.
몹쓸 망상에 소름이 쫙 끼친 재인은 팔뚝에 돋은 닭살을 마구 문질렀다.
그런 취향은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성준은 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거를 오해하실 만도 하지요. 어제 갑자기 지시받고 반나절 만에 준비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럼 이걸 반나절 만에 다 준비하셨다고요?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여전히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성준의 입매가 살짝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45도 각도로 허공을 향한 그의 아련한 눈빛에서 더는 긴말이 필요 없음을 알았다.
우리 김 실장님, 많이 힘드셨구나.
나와라, 뚝딱! 하면 뭐든 나오는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것도 아니고, 꽤나 골치 아프셨겠다.
재인은 다시금 비서실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저 때문에 김 실장님만 고생하셨네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마음에는 드십니까?”
“그럼요! 황송할 정도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다행입니다. 도련님께서 서재인 씨가 최대한 편히 머무실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팀장님이요? 에이, 농담……”
손사래를 치던 재인은 진지 그 자체인 성준의 눈빛에 주춤하며 말꼬리를 돌렸다.
“……은 전혀 안 하신댔죠, 김 실장님은.”
“맞습니다.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팀장님이 진짜 그렇게 말했나 보다.
뒤늦게 부하 직원에게 배려 넘치는 상사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도혁의 뜻밖의 호의가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재인이었다.
그냥 돈이 남아돌아서 도배한 걸로 치자.
재인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고 냉큼 털어버렸다.
이미 충분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이것쯤이야.
“참고로 도련님의 방과 서재는 반대쪽 끝에 있는데, 그곳 외에는 자유롭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자, 그럼 집 안을 한번 둘러볼까요?”
성준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재인을 이끌었다.
헬스장을 옮겨 온 듯한 피트니스룸을 비롯해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휴게 공간, 조경이 멋진 발코니 등.
난생처음 눈이 돌아가게 좋은 집에 발을 들인 재인은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집 안 구석구석 설명을 마친 성준이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주방이었다.
최신식 가전제품들과 최고급 식기들이 구비된 주방은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수준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 요리와 베이킹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재인이 늘 꿈꿔왔던 공간, 그 자체였다.
황홀한 눈으로 주방을 둘러보던 재인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사람 손을 전혀 타지 않은 것처럼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것.
“팀장님은 요리를 잘 안 하시나 봐요?”
“네. 일이 바쁘셔서 밖에서 드시고 들어오십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멋진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요? 너무 아깝지 않아요?”
요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절약이 몸에 배어 주로 집밥을 만들어 먹는 재인으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성준은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이고는 소매를 들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시가 되어가는군요. 아침도 걸러서 시장하시죠.”
“네, 아주 많이요.”
재인의 솔직한 대답에 성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냉장고 문고리를 잡았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적당히 채워봤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성준의 팔이 천천히 움직였다.
덩달아 재인의 눈도 점점 커졌다.
냉장고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샐러드, 디저트와 빛깔 고운 과일들을 비롯해 웬만한 요리는 다 만들 수 있을 만한 다채로운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그뿐인가. 문에는 우유와 건강주스를 비롯한 각종 음료들이 칸별로 가지런히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분명 팀장님은 밖에서 드신다고……?”
“원래는 생수병만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도련님이 당부하셔서 신경 좀 썼습니다.”
“세상에, 저를 위해서요?”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네. 김 실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신속하게 사라져주는 센스까지.
재인은 만난 지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은 성준이 마치 친오빠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재인의 배웅을 받으며 성준이 현관을 나서던 그때, 그의 휴대전화에서 이미지만큼이나 차분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를 건 이는 도혁이었다.
“네, 도련님. 서재인 씨 무사히 모시고 왔습니다. 아, 잠시만요.”
깍듯이 전화를 받던 성준이 갑자기 재인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도련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저한테요?”
재인은 엉거주춤 두 손으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서재인 전화 바꿨습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본능적으로 회사에서 전화 받는 멘트가 나와버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쿡 웃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도혁의 트레이드마크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도착했나?
“네.”
―나 오늘 많이 늦을 거야.
“네.”
―기다려, 자지 말고.
“네?”
뚝.
도혁은 제 말만 하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인은 얼떨떨해하며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도리어 제 귀를 의심했다.
이런 경우엔 많이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하지 않나, 보통?
아.
상대는 ‘보통’이랑은 거리가 먼 ‘차도혁’이지.
뭘 바라니.
“도련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재인의 표정이 굳어 있자 성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늦을 건데 자지 말고 기다리래요.”
“도련님이요? 저한테는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군요.”
“회사에서도 저한테만 유독 그러세요. 정말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요.”
“흐음, 그럴 분이 아닌데…….”
성준은 분통을 터뜨리는 재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불시에 지시하고 밀어붙여서 얼핏 제멋대로인 성격처럼 보이지만, 도혁은 심성이 올곧고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지시를 받고 난색을 표하는 성준에게 ‘무리한 부탁인 줄 안다’며 사과와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도혁이 재인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쯤은 바보가 아닌 이상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재인은 괴롭힘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풀리지 않는 의문에 성준의 지적인 눈매가 살짝 구겨졌다.
그것을 본 재인은 아차, 싶었다.
성준이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 그가 도혁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저기, 제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팀장님껜 비밀로 해주세요.”
“안심하세요. 제 앞에서는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준은 의혹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엔 본가에 가셔야 해서 밤 11시가 넘어야 돌아오실 텐데, 도련님은 그 시간에 대체 뭘 하려고 그러시는 걸까요?”
진짜 궁금하다, 라고 얼굴에 쓰인 성준과 낯빛이 하얗게 질린 재인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그게 뭘까요?
* * *
“이봐, 그만 일어나.”
늦은 밤, 누군가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재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살포시 열렸다. 반쯤 열린 시야에 도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팀장님…….”
대체 어떻게 만들었길래 흐릿하게 봐도 잘생긴 거냐, 이 얼굴은.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재인은 도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 채로 재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도혁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서늘한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든 재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거실 벽의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9시 반이었는데.
명색이 이사 첫날인 데다, 낯선 환경에 잔뜩 긴장한 탓인지 저녁을 먹고 나니 식곤증이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다이빙하고 싶었지만, 기다리라는 도혁의 말 때문에 눈꺼풀이 내려앉으려는 것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테이블에 놓인 싸늘한 커피만이 홀로 재인의 사투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돌아오는 건 핀잔뿐이라니, 조금 억울했다.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늦으신다더니 정말이었네요.”
“그렇게 됐어.”
툭 내뱉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힘이 없었다.
도혁은 재인의 옆에 털썩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답답한 듯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친 도혁은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셔츠 단추도 연거푸 풀었다.
멍하니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재인은 와이셔츠 틈으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
태평양도 얼려버릴 것 같은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재인은 참기 힘든 긴장감에 턱, 숨이 막혔다.
도혁과 단둘이 지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숨쉬기마저 불편한 거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도혁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인은 커피를 입에 가져가 바짝 마른 입안을 축였다.
안 되겠다.
아무 말이라도 던져보자.
“마, 많이 힘드셨나 봐요.”
“응.”
도혁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짧게 대답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주 피곤한 일.”
그 말을 끝으로 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가운데 도혁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순간 머리가 쭈뼛 곤두선 재인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 그,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재인은 누가 들으면 퇴근 인사라도 하는 줄 알 법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살그머니 걸음을 옮기려는 그녀의 팔목을 도혁이 확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재인은 엉겁결에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심코 도혁에게 고개를 돌린 재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도혁의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그 순간.
묵직한 음성이 재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지 마.”
쿵쾅쿵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