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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밤에 방문 꼭 잠가 (10/129)


10화. 밤에 방문 꼭 잠가
2022.07.05.



 
재인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


“무슨! 절대 아니지. 그냥 회사 동료야, 동료.”

―누군데? 너희 부서 사람들 하도 얘기 들어서 다 알잖아.

“……!”

―역시 네 얘기지?

하여튼 최유라, 눈치는 빠르다니까.

학교 다닐 이렇게 잘 찍었으면 수능 만점 받았겠네.

이러다간 위험해지겠어. 안 되겠다.


“아니라니까! 강 대리 얘기야.”

강나희, 나 살아보겠다고 널 팔아서 미안하다.


―맨날 얄밉게 군다는 강나희?

이런, 내가 이름까지 얘기했었나?

뭐, 강 대리랑 유라랑 마주칠 일이 없으니 괜찮겠지?


“으응, 맞아. 근데 강 대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남자 집에서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래. 한집에서 산다고 해도 별일은 없겠지?”

계속 찜찜했는데 이렇게라도 말해버리니 속이 시원했다.

어디 물어볼 데가 있어야지.

그러나.

유라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받아쳤다.


―뭐? 남녀가 한집에 산다고?

“응.”

―둘 다 신체, 정신 건강하지?

“응.”

―남자는 잘생겼어?

“음…… 아주 많이 잘생기긴 했지.”

―여자는?

“그럭저럭 예쁠걸?”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재인은 탁상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큰 눈을 깜박였다.

그때 유라가 시원스레 결론을 내렸다.


―맙소사! 뭔 일 나겠네, 나겠어!

“일? 무슨 일?”

재인의 물음에 유라가 목소리를 쫙 깔고 설명을 시작했다.


―뭐긴, 러브러브지! 신체 건강한 남녀가 한집에 사는데, 둘 다 외모도 괜찮다며. 그럼 당연히 뭔 일이 벌어지고도 남지. 아무 일도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꽝.

재인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졌다.


“그, 그런 거야?”

―얘가, 드라마도 안 보니? 그러다 꼭 뭔 일 터지잖아.

“서로 너무너무 싫어하는데도?”

―네가 모솔이라 잘 모르나 본데, 남자랑 여자는 신기한 게 자꾸 보면 정이 들어. 출근할 때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다 사귀는 사람 얘기 들어봤지?

아무리 그래도 차도혁과?

에이, 설마.

재인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도혁의 눈빛이 떠올라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서로 싫어하는 사이면 더 극적이지. 티격태격하다 불붙으면 마른 장작처럼 무섭게 탄다. 강나희한테 꼭 전해. 잠잘 때 방문 꼭 걸어 잠그라고.

“문은 왜?”

―몰라서 물어? 밤에 덮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

까르르 웃는 유라의 목소리가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의 웃음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머, 벌써 11시가 넘었네? 내일 소개팅 나가야 하는데 어서 팩이라도 붙여야겠다. 재인아, 그럼 다음 주 토요일 1시에 광화문역에서 봐.

“……으응.”

휴대전화에서 뚜- 뚜- 소리가 으스스하게 흘러나왔다.

전화가 끊겼는데도 재인은 돌처럼 굳은 채 눈 한 번 깜박하지 못했다.

방문 꼭 걸어 잠그라고?

밤에 덮쳐?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재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차도혁과 단둘이 한집에서 산다.’

이 단순한 문장 속에 그동안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산다’에 ‘잔다’가 포함된다는 사실.

불편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위험할 거란 생각은 왜 하지 못했단 말인가.

재인은 자신의 무지함에 자괴감을 느꼈다.

유라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오싹.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았다.


“미쳤어! 미쳤어!”

제삼자에게 괜찮다는 확인을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었던 건데.

이제는 아예 초토화돼버렸다.

한참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때.

재인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맞아! 보험이 있었지!”

재인은 팀장이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겠다고 약속한 주옥같은 조항을 기억해냈다.

도혁은 후계자 계승이 관련된 중요한 프로젝트를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망가뜨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잘했다, 서재인!

27년 동안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야.

재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진정하고 상황을 정리해보자.

재인은 현재 상황을 종이에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첫째, 제 발로 찾아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둘째, 유라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정확히 검증되지 않는 일반론에 의거한 추론일 뿐이다.

셋째, 나는 팀장님이 불편하고 싫을 뿐 남자로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남자로 볼 확률은 제로다.

넷째, 무엇보다 팀장님이 나에게 관심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성으로 보지 않겠다는 조항에 합의했으니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두 달 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 소문난 톱스타 여배우가 광고모델 계약차 회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온 회사가 들썩거렸는데도, 계약 담당이라 여배우와 한참을 붙어 있었던 팀장은 정작 별 반응이 없었다.


“아우, 눈이 부셔서 혼났습니다. 팀장님, 좋으셨겠습니다. 엄청 예쁘지 않습니까?”

호들갑을 떠는 박 과장에게 팀장은 무심히 답했다.


“별로.”

도혁의 시크한 반응에 모두 입이 딱 벌어졌었다.

다섯째, 팀장은 눈이 아주아주 높다. 고로 내가 눈에 찰 리가 없다.

다행이다!


“그래, 맞아. 눈이 천장에 달린 팀장이 나한테 흑심을 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엄청 부자잖아. 사는 세계 자체가 다른데 팀장이 나를? 나 참,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

재인은 크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안도의 물결이 지나가자 뒤이어 묘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내가 어때서?


“칫! 잘생기면 다야? 부자면 다야? 성격이 지랄 맞잖아. 그런 남자 줘도 싫다, 이거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북치고 장구 좀 쳐봤다.

그래도 혹시 0.000001퍼센트의 확률로 유라 말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는 해두자.

재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최선의 방법은,


‘집에 같이 있는 동안 절대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게 망가지기.’

그래, 절대 여자로 보이지 않게 철저히 망가져보자.

옷도 막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만 입고,

출근 안 하는 날은 머리도 감지 말고,

세수도 당연히 안 하고,

이도 닦지 말자.

아, 방귀도 뿡뿡 뀌고…….

잠깐만.

평소에 집에서 뒹굴 때 하던 거랑 똑같잖아?

재인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뭐지, 이 자괴감은?

아니야.

주말에 집에서 때 빼고 광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나답게 자연인으로 지내면 돼! 아주 쉽잖아? 신경 쓸 것 하나도 없어. 그래 봤자 차도혁이야!”

재인은 다짐하듯 크게 외쳤다.

그렇게라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잠재워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무려 차도혁이니까.

* * *



“뭐? 인간이 저지르는 최고의 악행?”

도혁은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려가며 쿡쿡 웃었다.

테이블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둘러대던 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재인은 역시, 재밌다.

재인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간다.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몹시 씁쓸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쳤을 때도 재인은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민우를 만났을 때는 화색이 돌더니.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 건 확실한데…… 호감 단계인가?’

도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와이셔츠를 확 벗어젖혔다.


 
은은한 조명 아래 탄탄한 잔근육이 빈틈없이 포진한 관능적인 상체가 드러났다.


‘대체 나민우의 어디가 좋다는 거지?’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닌 민우가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훨씬 더 잘생기고, 내가 키도 더 크고, 내가 돈도 더 많고, 내가 일도 더 잘하는데, 왜 내가 아니고 나민우야?”

낯 뜨거운 말을 잘도 내뱉는 도혁이었다.

객관적 사실인 건 맞지만.

앞으로 두 달간 재인과 같은 공간에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내뿜는 숨결도 절로 뜨거워졌다.

도혁은 타는 속을 식히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집어넣었다.

오늘부터 금주.

선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

* * *



“계십니까?”

똑똑.


“서재인 씨, 계십니까?”

재인은 문을 두드리며 저를 찾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누구……세요?”

재인이 묻자 문밖에 있는 상대가 깍듯이 대답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저는 차도혁 도련님의 비서실장입니다. 도련님 대신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비서실장? 도련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십시오.”

“아, 맞다! 오늘 10시였지!”

화들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1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녘이 돼서야 알람을 맞춰놓고 잠깐 눈을 붙였는데 그만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빨리 준비할게요.”

재인은 황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11시가 다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재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상대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훤칠하고 다부진 체격에, 차분하고 지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아니, 비서실장도 외모로 뽑나?’

예상 밖인 훈남의 등장에 재인은 혹시 눈곱이라도 낀 건 아닌지 슬쩍 눈가를 점검했다.

온화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남자는 두 손으로 공손히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김성준입니다. 편하게 김 실장이라고 부르십시오.”

“아, 네……. 서재인입니다.”

“도련님이 제게 서재인 씨를 특별히 잘 모셔 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하, 퍽이나!

엄밀히 말해 스파이를 연행하는 임무를 맡긴 건데 그렇게 자상히 말했을 리가 없다.


‘특별히 잘 감시하며 끌고 오라는 거였겠지.’

재인의 표정에 드러난 생각을 읽었는지, 성준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도련님이 직접 못 와서 아쉬우신 것 같았습니다.”

“팀장님이요? 에이, 농담도 참.”

“전 일을 할 때도, 일을 안 할 때도, 농담은 하지 않습니다. 전혀요.”

성준의 미소 띤 얼굴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웃고 있는데도 왠지 도혁과 데칼코마니 같았다.


“아, 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재인이 고개를 숙이자 역시나 성준이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아, 부담스러워라.

비서실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재인은 웬만하면 성준에게 인사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 * *

도혁의 집은 회사 근처에 있는 주상복합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현관에 들어가 중문을 열자, 탁 트인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가득 머금은 널찍한 거실과 주방이 펼쳐졌다.

하아.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압도된 재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팀장님이 대산그룹 후계자가 맞긴 맞구나.’

재인은 비로소 도혁의 위치가 실감이 났다.

성준은 주방을 지나 왼쪽 복도 끝에 있는 방에 재인의 짐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서재인 씨가 지내실 방입니다.”

“여기가 제 방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옥탑방의 몇 배나 되는 크기는 둘째치고, 세 명이 자도 충분할 것 같은 널찍한 침대 위에 옅은 보랏빛 침구, 색감이 고운 고풍스러운 가구들, 풍성한 레이스 커튼…….

누가 봐도 여자의 방이었다.


“팀장님 혼자 사셨던 게 아니었나 봐요? 전에 누가 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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