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납치의 결말 (9/129)


9화. 납치의 결말
2022.07.02.


재인은 도혁의 태도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오랜만엔 민우와 식사하려고 했는데 제멋대로 구는 도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도혁이 민우를 견제하는 이유는 보안 유지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치자.

하지만 이 시간에.

호텔 레스토랑에.

단둘이.

그것도 재인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왔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나?’

점심 식사 한 번 같이 한 적이 없는 팀장님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왜?’

생각할수록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당혹스럽고 골치만 아팠다.

혼자 남겨진 민우도 당황했는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연거푸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재인은 도혁과 차 안에 같이 있는 껄끄러운 상황이라 메시지에만 답을 했다.


[선배, 미안해요. 팀장님과 같이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요. 식사는 다음에 같이해요.]

[재인아, 정말 괜찮은 거야? 다른 일은 없는 거지?]

[그럼요. 팀장님이 시키신 일인데 깜박하고 잊었어요. 급한 일이라 오늘 꼭 해야 해요. 정말 미안해요. 다음에 밥 살게요.]

[그래, 알았어. 빨리 끝내고 조심해서 들어가.]

재인은 민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게 둘러대면서 짜증이 솟구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재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혁은 오는 내내 숨이 막히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 제멋대로인 인간!’

다시 생각해도 분통이 터졌다.

이런 식으로 두 달을 버티다가는 피가 말라 죽든, 심장마비로 죽든.

진짜 제 명대로 못 살 것 같았다.

재인은 더 늦기 전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팀장님, 이거 엄밀히 말해서 납치예요.”

“납치?”

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제가 팀장님과 계약을 한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에서 한 거래예요. 저를 함부로 대할 권리를 드린 게 아니라고요.”

‘동등’에서 많이 찔리긴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재인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이런 막무가내식 행동은 불쾌해요. 앞으로는 제 의사를 존중해주세요.”

“흠.”

“내일 팀장님 댁으로 옮기려면 정리해야 할 것도 많으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인은 자리에서 당차게 일어났다.


“먹고 가지, 그래? 배가 많이 고플 텐데.”

흥!

만류하는 도혁의 말에 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됐네요. 당신이랑 밥을 먹느니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말지.

누구랑 같이 먹느냐가 이토록 중요한 문제인지 그전엔 미처 몰랐었네.


“입맛이 없어졌어요. 그럼 이만.”

재인이 기세 좋게 돌아선 그때.

도혁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오늘 메인은 로브스터와 한우 안심스테이크군.”

잠깐만.

로브스터? 한우 안심스테이크?

꼬르륵.

꼬르륵.

이름만 들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요리들에 재인의 배 속이 그만 주책없이 반응해버렸다.

위는 참, 정직했다.


“시칠리아 스타일의 가지 카포나타까지 곁들인.”

뭔지 모르겠지만 무지무지하게 맛있을 것 같다.

재인은 입안에 침이 고이고 위산이 마구 분출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 먹고 갈까? 이왕 온 거.’

이미 라면으로 충족시키기에는 재인의 욕망이 너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일어선 마당에 다시 앉으려니, 민망해도 너무 민망했다.


‘팀장님이 한 번 더 잡을 때 못 이기는 척 앉아야지.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보는 거야.’

그런데 웬걸.

도혁은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볼 뿐 붙잡으려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너무하시네.


‘팀장님, 이러시기예요? 동방예의지국에 태어났으면 기본 세 번은 권해야죠!’

그 순간 재인과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도혁이 고개를 돌렸다.

재인과 눈을 마주친 도혁이 옅은 웃음을 짓나 싶더니, 애타는 눈빛을 외면하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식은…… 몽블랑과 망고 셔벗이라, 나쁘지 않네.”

‘아, 아는 거 나왔다! 그거 엄청 맛있는데…….’

이미 식욕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재인이었다.


 
도혁은 그제야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재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안 가고 뭐 해?”

“저기, 그게…….”

드르륵.

재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머뭇거리던 그때, 프라이빗 룸의 문이 열리더니 구세주처럼 웨이터가 음식이 실린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널따란 하얀 접시에 다소곳이 담긴 안심스테이크, 치즈와 코코넛을 잔뜩 올린 로브스터, 가지와 올리브와 샐러리 등을 볶은 카포나타까지. 무엇 하나 군침 돌지 않는 것이 없었다.


“팀장님,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 중에 최고가 뭔지 아세요?”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재인이 냅킨을 무릎 위에 펼치며 말했다.


“뭔데?”

“바로 음식을 남기는 거예요. 세상에 굶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이 안심구이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목초며 사료며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갔겠어요. 로브스터는 말할 필요도 없죠. 그거 아세요? 전 세계적으로 음식물의 3분의 1이 그냥 버려진대요. 요즘 그 쓰레기가 아주 큰 골칫거리…….”

“요점만 얘기해.”

도혁이 식상한 일장연설을 뚝 잘라버리자, 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는 음식들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고이 접어둔 지 오래였다.

재인은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썰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맛있는 음식은 누구랑 먹어도 맛있다.

상대가 설령 차도혁일지라도.

로브스터를 오물거리며 행복해하는 재인을 보던 도혁이 말했다.


“굉장히 맛있나 보군.”

“끝내줘요! 팀장님도 드셔보세요.”

“그런 것 같네. 납치범과 먹느라 입맛도 없을 텐데 잘 먹는 걸 보니.”

음식을 집던 재인의 손이 멈칫하다 이내 다시 움직였다.

이 정도 공격쯤이야 가뿐하지.


“네. 드셔보시면 알 거예요.”

재인은 도혁에게 해맑은 미소를 날렸다.

거참, 배고픈데 그냥 좀 넘어갑시다.

* * *

늦은 밤. 재인은 이삿짐을 챙기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책이 든 상자 몇 개와 유학 갈 때 쓰려고 사뒀던 이민가방과 캐리어가 전부였다.

가방에 옷가지와 생필품들을 챙겨 넣고 나니 집 안이 휑했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 땀을 비 오듯 쏟고, 겨울에는 외풍이 심해 벽에 구멍이 난 줄 알았던 낡은 옥탑방.

이곳에서 재인은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지금까지 4년을 살았다.

이제는 정든 집을 영영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울컥했다.

내일부터는 도혁의 집에서 갇혀 지낼 터라 더욱 그랬다.


「내일 아침 10시에 내 비서가 데리러 올 거야.」

역시나, 집까지 데려다주는 내내 말이 없던 도혁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떠났다.

아, 한마디 더 하긴 했다.


「손목은 괜찮나?」

차아아암 빨리도 물어본다.

그나저나 남자와 한집에서 지내는 건 처음인데…….

재인은 여중 여고를 나와 대학 시절에는 학자금을,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유학 자금을 모으는 데만 열중했다.

덕분에 연애는커녕 데이트도 제대로 해본 적 없으니, 그게 어떤 일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괜찮아. 불편한 것 좀 참으면 되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 별거 있겠어? 익숙해지면 살 만할 거야.”

재인은 자신을 다독이듯 혼잣말을 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울려 퍼졌다.

친구 유라였다.


“유라야, 보고 싶었어!”

저편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래, 갑자기? 며칠 전에 통화했으면서.

“반가워서 그러지.”

―됐구나, 됐어. 드디어 때가 됐어.

“무슨 때?”

―저세상 갈 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지.”

“야!”

유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유라는 재인과 고등학교 때부터 꼭 붙어 다닌 가장 친한 친구다.

처음 짝이 됐을 때는 데면데면했지만 음악 취향이 통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두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BOC’의 골수팬이었다.


―엊그제 오빠들 콘서트에 못 간 한이 맺혀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했다.

“아니야. 1분도 안 돼 매진인데 그걸 무슨 수로 가. 다들 대단하다, 정말.”

―다음에는 꼭 가자. 이 언니가 지인들 다 동원해서 컴퓨터 앞에 대기시킬게.

“그래, 너만 믿는다!”

―그건 그렇고. 서재인, 솔직히 말해 봐. 너 뭔 일 있지?

“아, 그게…… 일은 무슨 일! 맨날 똑같지, 뭐.”

무심코 대답하려던 재인은 황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위험했다.

비밀이 새어나가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거 잊었어?

그나저나 역시 최유라.

정말 귀신같은 촉이다.

다행히 유라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싱겁긴. 참, 너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토요일? 왜?”

―엊그제 어머니 올라오셔서 못 만났잖아.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려고 그러지.

재인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내일부터 팀장님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쩌지? 날 못 믿어서 집에 머물게 하는 거니 약속이 있다고 하면 못마땅해할 텐데……. 그렇다고 거절할 명분도 없고…….’

어설프게 거절하면 괜히 유라의 촉을 자극해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재인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응. 알았어. 어디에서 만날까?”

―광화문 어때? 거기 스페인 요리하는 데 있는데 맛있더라. 1시쯤 볼까?

“좋아. 광화문, 1시.”

그래, 유라를 만나면 숨통이 좀 트이겠지.


―참, 재인아. 너 요즘 만나는 남자 없지?

“내 사정 다 알면서. 곧 일본에 갈 건데 만나긴 누굴 만나.”

―그렇긴 하지. 그래도 스물일곱이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모솔로 보내기 아쉽지 않아?

“됐네요. 연애할 시간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겠다.”

―네가 그렇게 철벽을 치니까 여태 모솔인 거야. 너 혹시…… 아직도 한규민 못 잊는 거 아니야?

한규민.

재인은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을 다시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재인과 같은 동아리였던 규민은 온화한 성격에 외모까지 빛이 나서 동기 여자애들은 물론 여자 선배들까지도 눈독을 들였었다.

유라까지 셋이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친해졌는데, 규민이 갑자기 1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걔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잊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래도 네 인생에서 썸이라도 탄 남자는 규민이밖에 없었잖아.

“또 그런다. 썸은 무슨 썸. 그냥 친구였지.”

―에휴, 됐다. 네가 어지간히 둔해야 말이지.

연애 경험이 풍부한 유라는 남자들에게 높은 철벽을 쌓는 재인이 늘 답답했다.


“저기, 유라야.”

남자 얘기가 나온 김에 재인은 줄곧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 회사 직원 중에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너무 무섭고 불편한 남자랑 어쩌다 잘못 얽힌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거 네 얘기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