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질투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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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질투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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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질투의 화신
2022.06.28.
푸웁.
깜짝 놀란 재인은 뜨거운 커피를 뿜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데었는지 입천장이 얼얼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까 그건 박 차장님 말이 맞다는 거였지. 그만 노닥거리고 일이나 하라고.”
“아닌데…….”
“됐어, 됐어. 팀장님이 진짜 그랬대도…… 아우!”
정말이지 하나도 안 기쁘다.
재인이 몸서리를 치자 연지가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왜요? 팀장님이 좀 괴팍하긴 해도 엄청 잘생기고 멋지시잖아요.”
“연지 씨가 아직 어려서 남자 보는 눈이 없네. 남자는 자고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한 남자가 최고야.”
단호한 재인의 말에 연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아무리 잘생겨도 같이 있을 때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남자랑 어떻게 살겠어요, 그죠?”
흡.
재인은 도혁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올라 숨이 턱 막혔다.
그러게 말이야. 일단 살아보고 얘기해줄게.
괜한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인이었다.
신경 끄고 일이나 하자.
바쁘면 잡생각을 덜 하겠지.
“이제 올라갈까? 강 대리가 우리 둘만 자리 비웠다고 또 딴지 걸 거야.”
“근데요, 전 강 대리님이 왜 주임님한테 그러는지 알 것 같아요.”
연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질투가 나서 그래요.”
“질투?”
“네. 팀장님이 오전에 중요한 일이 있다더니 서 주임님 불러서 한참 계셨잖아요. 그동안 강 대리님이 팀장실을 노려보는데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질투할 것도 되게 없네. 맨날 당하는 게 뭐가 부럽다고.”
연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좀 이상해요.”
“뭐가?”
“가만 보면 팀장님이 서 주임님한테만 특별히 편하게 대하시는 것 같거든요. 강 대리님도 아마 그래서 더 샘을 내는 걸 거예요.”
그러니까, 강 대리의 밉살스러운 행동이 팀장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재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편하게 대하긴! 두 번 편했다간 사람 잡겠어.”
“암튼 제가 보기엔 그렇다고요.”
연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상큼하게 웃었다.
* * *
“잠깐만요!”
재인은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진하며 다급히 외쳤다.
퇴근 시간 5분 전이지만, 도혁이 회의에 들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마지막 자유시간을 누리고 싶어 몰래 도망치는 중이었다.
재인의 사무실은 25층 건물의 20층에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한 번 놓치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사이 운 나쁘게 도혁과 마주쳤다가는 꼼짝없이 붙잡혀 야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재인의 절박함이 통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다시 열렸다.
“감사합니다!”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간 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친절을 베푼 천사를 확인했다.
그러나.
“으아아악!”
재인은 귀신이라도 본 듯 괴성을 지르다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도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술술 풀린다 했다.
‘잠깐! 아직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일단 줄행랑을 치고 보자.
재인은 다급히 열림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어머? 깜박하고 휴대전화를 놓고 왔네요.”
좁아지던 문틈이 다시 벌어졌다.
하지만 재인이 미처 발을 떼기도 전,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닫힘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도혁의 손가락이 재인의 황망한 눈에 들어왔다.
“저기, 팀장님 제가 휴대전화를 가지러…….”
재인은 떨리는 손으로 다다다 열림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싸늘한 말 한마디가 재인의 뒤통수를 때렸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건 먹는 건가?”
도혁의 말에 제 손을 본 재인이 흠칫 놀라며 손에 쥔 것을 떨어뜨렸다.
무엇을?
가지러 간다고 둘러댄 휴대전화를.
도혁이 한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바보!
왜 하필 휴대전화 핑계를 댔을까.
서류나 지갑, 하다못해 볼펜이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재인이 창피함과 자괴감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굳게 닫혔다.
“하하. 내 정신 좀 봐.”
재인은 휴대전화를 주우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소매를 걷어 시계를 들여다본 도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5분 남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혹시 어디 아픈가?”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다가와 재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뭐야, 지금 꾀병인지 확인하는 거야?’
재인은 제풀에 찔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냥 좀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다행이군. 그래도…….”
그때.
띵 소리가 나더니 12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등 뒤로 환한 빛을 밝히며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재인에게 있어서는 진짜 천사 같은 존재, 나민우였다.
“민우 선배!”
“어? 두 사람 웬일로 오늘은 일찍 퇴근하네요.”
민우는 도혁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 재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재인아, 바로 집에 갈 거지? 데려다줄게.”
“정말요? 고마워요, 선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민우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요즘 그쪽 신제품 개발 때문에 많이 바쁘지?”
“그럭저럭, 이제 익숙해져서 할 만해요.”
“서재인, 그새 많이 컸네?”
“저도 벌써 사회생활 4년 차거든요. 짬밥이 많이 늘었죠.”
하하. 민우가 낮게 웃었다.
“재인아, 배고픈데 밥 먹고 갈까? 요 앞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 있던데.”
“좋아요! 실은 배가 너무 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요.”
이건 사실이다.
고작 하루 동안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들이 몰아쳐서 에너지 소모가 컸다.
가장 큰 에너지 소비의 장본인은 당연히 등 뒤에 있는 차도혁이다.
등 뒤에.
차도혁.
아!
재인은 그제야 제 등에 꽂히는 강렬한 시선을 의식했다.
마음을 졸이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두 눈동자가 잡아먹을 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어서.
“차 팀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공포에 떠는 재인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민우가 해맑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도혁이 나직이 답했다.
휴, 다행이다.
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 같이하시죠.”
“…….”
“아, 1층이다. 재인아, 내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민우가 먼저 내렸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무서워도 인사는 해야지.
재인은 도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뗐다.
하지만 1층 로비에 한 발을 딛는 순간.
재인의 몸이 휙 돌아가더니, 강한 힘에 이끌려 다시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중심을 잃으며 단단한 무언가에 털썩 부딪혔다.
‘이게 무슨……?’
재인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민우를 찾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당황한 기색의 민우와 눈이 마주쳤다.
“나 팀장님, 죄송합니다. 서 주임과 급히 처리할 일이 남아서.”
깍듯한 도혁의 사과를 끝으로 어찌해볼 새도 없이 문이 굳게 닫혔다.
다음 순간, 넋이 나간 재인의 머리 위로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서재인 씨가 모르나 본데, 계약은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해.”
“티, 팀장님?”
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차분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혁의 눈빛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짙고 푸른 심해 같았다.
청량한 바다 내음이 재인의 코끝을 간질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왜 바다 향기?
그제야 재인은 제 몸이 도혁의 탄탄한 가슴팍에 바짝 밀착돼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
화들짝 놀란 재인은 도혁의 가슴을 밀치며 품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도혁에게 꽉 붙잡혀 있는 손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얏! 팀장님, 손목 좀 놔주세요.”
그제야 도혁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시뻘건 손목만큼 재인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띵.
그사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리자 도혁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말뚝처럼 멍하니 서 있는 재인을 향해 말했다.
“안 내리나?”
“아, 내립니다!”
재인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도혁의 말에 따르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재인이었다.
“팀장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서재인 씨, 분명 계약 기간 중엔 이성을 사귈 수 없다고 했을 텐데?”
“네? 민우 선배는 그냥…….”
“나민우 팀장이 최 전무 사람인 거 몰라? 최 전무는 작은아버지의 충복이야. 행여 말실수라도 하면 끝장이라고.”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어요.”
최영도 전무가 상품기획 2팀 팀장인 민우를 아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화를 냈던 거구나.’
재인은 비로소 도혁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아주 조금.
차도혁의 전부를 이해하려 들었다간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포기할 건 깨끗이 포기하자.
애써 잔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재인에게 도혁이 돌을 던졌다.
“계약 끝날 때까지는 나 팀장과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
순간 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 위로 ‘장학금’이라는 글자가 네온사인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
재인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장학금만 생각하자. 장학금.
부모님을 위해 힘들게 모은 유학 자금을 드린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도혁과 계약하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꿈을 이룰 기회가 남아 있다.
그게 도혁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머뭇거리며 서 있는 재인을 향해 도혁이 말했다.
“가지.”
“어딜요?”
도혁은 아무런 말 없이 가까이에 주차된 검은 세단 앞으로 걸어갔다.
「서재인 씨가 모르나 본데, 계약은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해.」
‘벌써 철저한 감시가 시작된 거구나.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 되겠지?’
어림도 없지, 라는 듯 도혁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재인은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길고 험난한 계약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도심 5성급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국내 최고로 손꼽히는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의 문이 활짝 열렸다.
유리창 너머로 화려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지고, 유럽 스타일의 고급스러운 실내장식과 은은한 조명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우고 있었다.
문제는.
막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가져오겠습니다. 편안히 쉬고 계십시오.”
매니저가 공손히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그제야 재인은 꾹꾹 눌러뒀던 질문을 던졌다.
“팀장님, 대체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배고파서.”
도혁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무심히 답했다.
하.
재인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퇴근길에 납치하듯 이곳에 끌고 온 이유가 단순히 배가 고파서라니.
“그러니까, 왜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데려온 거냐고요.”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우에게 했던 말이었다.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 날 위해서 왔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