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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설마, 팀장님이 (7/129)


7화. 설마, 팀장님이
2022.06.25.


계약서에 사인하려던 도혁은 펜을 내려놓고 재인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게…… 절대, 절대 불가능한 일이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살다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대체 뭐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도혁이 재촉하자 재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단숨에 내뱉었다.


“팀장님이 절대 저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어주세요.”

순간, 도혁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재인은 괜히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닌지 간이 쪼그라들었다.


“내가 그걸 왜 받아들여야 하지?”

“아, 죄송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하니까,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남녀가 유별하잖아요.”

“내가 남자로 보인다니 다행이군.”

“네?”

얼떨떨해하는 재인에게 도혁이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나한테만 해당이 되는 거야? 서재인 씨가 날 이성으로 볼 가능성도 있는데.”

“제가 팀장님을요?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죠.”

재인은 도혁의 말에 실소를 터뜨리며 덧붙였다.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

도혁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재인은 그제야 아차, 싶어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그러니까, 그게…… 팀장님이 별로라는 뜻이 아니라요, 공과 사 구분을 확실히 하자는 의미로 선을 분명히 긋는 게 좋겠다는 거죠. 그래야 저도 마음 편히 팀장님 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재인의 변명에도 도혁의 구겨진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도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그 조항을 추가하는 걸로 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약은 계약이니까 공평해야지. 만약 내가 그 조항을 위반하면 어떻게 해주길 원해?”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지만, 답은 금세 나왔다.


“그 즉시 계약을 해지해주시고, 장학금은 받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지.”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재인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불의의 사태도 방지하고 보장이 든든한 보험도 추가한 셈이었다.

그 보험을 사용할 일은 결코 없겠지만.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된 계약서가 나란히 놓였다.

재인은 사인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협조해줘서 고마워.”

어쩐지 도혁의 목소리가 전보다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안도하며 방을 나가려던 그때, 재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팀장님, 그러고 보니 제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묻지 않으셨네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다.

도혁은 재인의 맑고 큰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되물었다.


“물었어야 했나?”

“설마, 팀장님이…….”

제 뒷조사를 한 건 아니겠죠?


“내가?”

“아, 아니에요. 괜한 질문을 했네요.”

그럴 리가 없지. 팀장님이 내 뒷조사를 왜 하겠어?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재인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뒤늦게 도혁이 무심히 답했다.


“마음이 바뀔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말 참 예쁘게 하신다.

재인은 더 캐묻지 않는 도혁이 오히려 고마웠다.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날 사직서를 내러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이다.

아무래도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갈 테니까.

재인은 언제나 그랬듯, 기막힌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팀장님, 약속은 꼭 지켜주시는 거죠? 프로젝트만 성공시키면 두 달 뒤에 사표 수리하고 장학금 받게 해주시는 거요.”

“물론. 약속하지.”

도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그래도 재인은 노파심에 한 번 더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전 알아요. 팀장님이 못 말릴 일중독에 말도 밉살맞게 하고 어이없게 생트집 잡을 때도 있지만, 알고 보면 따뜻하고 좋은 분이라는 걸요.”

“……!”

“그래서 저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계약서가 아니라 팀장님을요.”

재인은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한껏 입꼬리를 올려 방실방실 웃어 보였다.

그런데도 도혁은 정지 화면처럼 굳은 채 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아부가 너무 심했나?

‘따뜻하고’만 빼면 틀린 말도 아닌데.

알고 보면 좋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양심이 있으면 나중에 딴소리는 못 하겠지.

재인은 이미 철저한 ‘생존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나름대로는.

* * *



“서재이이이이인!”

혼자 남겨진 도혁은 잔뜩 찌푸린 채 의자 팔걸이를 부술 기세로 꽉 쥐었다.

정말이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여자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이제 한고비 넘겼구나 싶었는데, 막판에 한 방 제대로 맞았다.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못 말릴 일중독자.

밉살맞게 말하는 자.

어이없게 생트집 잡는 자.


 


“평소에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가장 못마땅한 것 한 가지.


“날 좋아하게 되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도혁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치명적인 잘생김’을 무기로 아쉬운 것 없이 살아온 31년.

귀찮을 정도로 달려드는 무수한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도혁이었다.

그런 그를 마다하며 선을 긋다니 도혁으로서는 처음 느끼는 굴욕감이었다.

그것도 유일하게 제 마음을 흔들어댄 재인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이 부분이었다.


‘어떻게 나를…….’

수려한 이목구비에 짙은 그늘이 졌다.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지? 서재인 씨 취향이 좀 독특한가?’

그나마 납득이 될 만한 이유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다.

재인이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쏟아냈던 어이없는 오해들.

도혁은 자신을 좋아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웃던 재인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승부욕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된 이상, 계약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재인을 붙잡을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 넘어오게 하는 것뿐이었다.


“기다려, 서재인! 반드시 날 좋아하게 만들어주겠어.”

도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도혁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차도혁입니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덕분에요. 수고했습니다.”

―별말씀을요. 언제든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러죠.”

―서재인 씨 집은 어떻게 할까요?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그려졌다.

서재인, 나에 대해 한 가지 더 추가해.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

* * *

팀장실을 나온 재인은 곧장 복도로 나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첫차를 타고 화순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엄마,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저 일본제과제빵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됐어요!”

―세상에, 그게 정말이니? 축하해! 우리 딸 너무 멋지다!

뛸 듯이 기뻐하는 목소리에 재인은 엄마를 속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 이제 학비로 모은 돈 필요 없어졌으니까 가게 옮길 때 보탤게요.”

―얘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엄마 올라온 날 돈 문제로 다투신 거 아빠한테 다 들었어요. 상가 재개발 때문에 연말까지 가게 비워줘야 한다면서요.”

―미쳤어! 아빠가 그걸 너한테 얘기했어?

“실은 할머니가 전화하신 거였어요. 엄마 빨리 돌려보내라고 성화인 걸 아빠가 겨우 뜯어말리고는 무슨 일인지 얘기해줬어요.”

쯧.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에휴, 그 노인네 성질은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사나워지는지. 암튼 네 돈은 필요 없어!

“엄마, 가게 이전하려면 1억 넘게 든다면서요. 대출 받아도 한참 모자란다고 하던데,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안 돼! 네가 그 돈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아는데 그걸 어떻게 받니? 잘 놔뒀다가 생활비로 써.

“엄마 딸 능력자라 생활비도 벌써 다 준비해뒀어요. 그리고, 이제 나도 성인이에요. 잘 키워주셨으니 이제는 제가 보답하게 해주세요.”

수화기 너머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흑. 이러려고…… 널 데려온 게 아닌데…… 흑.

재인은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엄마를 다독이며 전화를 끊었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데 문득 옛일이 떠올라 울컥 목이 메었다.

이십 년 전, 엄마는 종갓집 종손에게 시집와 오 년째 대를 잇지 못한 죄로 숨죽여 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봉사하러 들른 보육원에서 재인을 보고 운명처럼 끌렸다고 한다.

눈치 빠르고 잘 보이려고 애쓰는 재인의 모습이 마치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

입양 얘기가 나오자 핏줄을 중시하는 집안이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할머니는 집안 망신이라며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래도 엄마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아빠의 지지를 받아 재인을 입양해 정성껏 키워주었다.

재인은 그런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면 포기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소중한 꿈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일지라도.

그래서 망설임 없이 학비로 모은 돈을 드리기로 했다.

옥탑방 보증금도 빼서 보태려고 토요일 아침 집 앞 부동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빨리 방을 빼달라고 부탁했었다.

운이 좋았는지, 한 달은 걸릴 거라던 예상과 달리 몇 시간 만에 집이 나갔다.

단, 다음 주 화요일까지 집을 비워주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그 집에 들어갈 때도 짐이라고는 가방 몇 개가 전부였기에 급한 대로 고시원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혁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화요일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설마. 우연의 일치겠지.’

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지금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 * *



“서 주임, 이거 먹어요.”

사무실로 돌아온 재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나희가 책장 너머로 무언가를 건넸다.

작게 스틱 포장된 콜라겐과 비타민이었다.


“이게 뭔데요?”

“피부에 좋은 거. 아까 팀장실에서 나오는데 서 주임 안색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인상 잔뜩 찌푸리고 낯빛도 어두운 게,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봐요?”

걱정하는 척할 거면 웃지나 말든가. 이 꼴을 두 달이나 더 봐야 하다니.

재인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됐어요.”

“왜요? 기껏 생각해서 줬더니.”

나희가 입술을 쌜룩거렸다.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너한테.


“그럼 제가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옆에 앉은 연지가 재빨리 영양제 스틱을 낚아채자, 나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연지 씨도 피부 보니깐 먹긴 먹어야겠더라.”

그 순간, 재인은 보았다.

스틱을 잡은 연지의 팔목에 굵은 힘줄이 솟는 것을.

재인은 슬쩍 연지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연지 씨, 무시해. 맨정신으로 강 대리 상대하다간 정신이 피폐해져.”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건네며 재인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아침에 도와줘서 고마웠어. 연지 씨 아니었음 회사 다니는 재미가 없었을 거야.”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귀밑 단발머리가 상큼한 연지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재인은 자신을 잘 따르는 연지가 여동생 같아서 늘 챙겨 주고 싶었다.


“뭘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서 주임님은 꾸미지 않아도 매력이 넘쳐요.”

“빈말이라도 기분 좋은데.”

“정말이에요! 같은 여자가 봐도 되게 예쁜걸요. 팀장님도 맞다고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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