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순도 100퍼센트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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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순도 100퍼센트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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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순도 100퍼센트 협박
2022.06.21.
드디어 말해버렸다.
주말 내내 잠 못 들며 할까 말까 수천 번 고민했던 그 말을.
도혁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그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1초가 1분 같은 피 말리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도혁이 받아들일 거라 내심 기대했던 재인은 뜻밖의 반응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왜요?”
“이미 인사팀에서 헤드헌터 업체에 구인요청을 했을 겁니다.”
“금요일에 얘기했는데 벌써요?”
“원래는 공고를 내야 하지만, 서 주임이 한시라도 빨리 관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서둘렀습니다. 특별히.”
어머, 우리 팀장님 성질도 급하셔라.
재인은 탈출하려는 정신을 붙잡고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이젠 꼭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
저 성격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하다.
‘지난번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나서 이러는 거겠지?’
물어보나 마나다.
양심이 있으면 그때 지른 걸 생각해봐.
「전 곧 회사를 그만둘 거니까, 팀장님은 걱정하면서 계속 불안에 떠세요.」
「뭐, 그 정도로 치졸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
「팀장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요.」
「팀장님 멱살잡이하고 때려치웠대요.」
「월권행위예요. 조심해주세요, 차도혁 씨.」
좀 살살 할걸.
적어도 이름은 부르지 말걸.
그만둘 거라고 참 알차게도 질렀다.
서재인, 넌 ‘유종의 미’도 모르니?
때늦은 후회로 몸부림쳐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재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 이제라도 사태 수습이라는 걸 해보자.
재인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몸을 도혁 쪽으로 기울였다. 둘의 얼굴이 한 뼘 거리로 가까워졌다.
“팀장님, 제가 비밀을 알고 있는데 불안하지 않으세요?”
“내가 불안해야 합니까?”
도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황한 재인은 멍하니 눈만 깜박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안 불안하세요?”
“전혀.”
“왜요?”
안타까움이 잔뜩 실린 재인의 물음에 도혁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서 주임이 본인 입으로 스파이가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비밀도 지킨다고 했고.”
“아니, 아니라고 한다고 그걸 순순히 믿으세요?”
“네. 서 주임 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와, 너무 순진하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어쩌시려고?”
순간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재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그렇다고 제가 스파이라는 건 아니지만요.”
도혁은 재인을 지그시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만약 서 주임이 스파이고 저쪽에 내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가서 일이 틀어진다면…….”
“……틀어진다면?”
“그냥 치졸해지기로 했습니다. 지구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도혁의 얼굴에 난생처음 보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도혁의 미소를 지켜보던 재인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이것은 명백한 협박이자 발설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는 경고다.
차도혁이라면 그냥 겁주는 게 아니라 백만 번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터였다.
재인의 귓가에 적색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해!’
일단 설득이라는 걸 해보자.
“팀장님, 다이어트 라인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후계자로 인정받으신다면서요. 그럼 저의 힘이 필요하시잖아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생각해보니 서 주임 하나 없다고 뭐, 큰 문제 있겠나 싶더군요.”
“아니, 그래도 고 과장님도 안 계시는데 저까지 없으면 곤란하실걸요?”
“인사팀에서 고 과장 자리에 적임자가 있다고 추천을 해서 오늘 면접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그동안 신중함을 내세우며 늑장을 부리던 인사팀이 왜 하필 지금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건지.
“고 과장도 양심은 있는지 업무를 원격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서 주임도 일에 차질이 없도록 인수인계 잘 해줘요.”
“저기, 팀장님……?”
“그럼, 내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 나가봐도 됩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도혁의 태도에 재인은 오기가 발동했다.
“잠깐만요! 팀장님은 지금 섣부른 판단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시려는 거예요.”
“잘못된 선택?”
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프로젝트라는 게 인원만 채운다고 돌아가는 게 아니죠. 새로운 사람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주주총회까지는 두 달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래서요?”
“저라면 확실하게 성공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절 잡으셔야 해요!”
내가 방금 뭐라고 말한 거니?
재인은 속으로 뜨끔했다. 급해서 큰소리치긴 했지만 이거야말로 뻥카 중의 뻥카니까.
하나 이미 내뱉은 말. 이렇게 된 이상 뒷일은 잠시 접어두고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팀장님, 잘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드시면 안 됩니다.”
“흐음.”
도혁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됐어. 일단 설득이 먹힌 것 같다.
재인은 재빨리 연타를 날렸다.
“그리고 팀장님이 몰래 하시려는 일, 절대 차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잘못되면 안 되는 거고요?”
“그렇죠.”
“근데 왜 저를 함부로 믿어서 일이 틀어질 위험을 감수하세요? 제가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건 그렇군요.”
“처음 제안하신 대로 딱 붙어서 감시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죠.”
“그런가요?”
“당연하죠. 의심 가는 상대가 눈앞에 안 보이면 불안하잖아요.”
“흐음. 서 주임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넘어왔어!
재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죠? 불안하죠?”
“역시 스파이일지도 모르니 철저하게 붙어서 감시해야겠어.”
“당연히 그러셔야죠. 안전하게!”
“뭐, 서재인 씨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할 수 없군. 처음 제안했던 대로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것으로 하지. 그때까지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서 스파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장학금을 받게 해주겠어.”
“좋아요!”
재인은 장학금이라는 말에 들떠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혁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잠깐만.
뭔가 좀 찜찜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팀장님, 갑자기 왜 말을 놓으세요? 저한테 이름으로 부르시고…….”
저번에 몰아붙일 때도 그러더니.
재인은 뭔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의자에 파묻히듯 기대어 앉은 도혁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왜 스파이에게 말을 높여야 하나?”
“저 스파이 아니라니까요!”
“조금 전에 함부로 믿지 말라고, 안전하게 딱 붙어서 감시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 입으로.”
도혁이 조소 띤 눈으로 재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재인은 깨달았다. 도혁에게 제대로 말려버렸다는 것을.
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정리하자면,
재인은 장학금을 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을 믿어주겠다는 도혁에게 순진하다고 질책하며, 자신을 의심하고 구속하라고 열심히 설득한 것이다.
이런 바보.
스파이가 아니라고 현수막을 내걸어도 모자랄 판에.
도혁이 괜찮다는데도 굳이 삽을 뺏어서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이럴 거면 어제 한다고 할걸.’
선택해서 들어가 주는 것과 사정해서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당연히, 앞으로 도혁에게 받을 대우도 달라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재인은 지난번 의기양양하게 도혁에게 쏟아부었던 일을 되새기다 그만 울고 싶어졌다.
너무 창피해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요 며칠 속담을 몸소 체험하는 일이 잦네.
쓸데없이.
“서재인 씨, 안색이 창백한데 괜찮나?”
“…….”
“서 있기 힘들면 소파에 앉지, 그래?”
어이구, 고양이가 쥐 생각…… 에잇, 짜증 나!
그 순간, 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재인을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재인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간이 철렁했다.
“계약사항을 확인해야 하니 이리 와서 앉아.”
“……네.”
재인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파에 앉자 도혁은 글자가 빼곡히 적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팀장님, 이걸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어제. 왠지 서재인 씨가 제 발로 다시 찾아올 것 같아서 말이야.”
“네? 인사팀에 구인을 지시하셨다면서요. 특별히 서둘렀다고…….”
“그걸 순순히 믿었나? 너무 순진하군.”
도혁은 피식 웃으며 재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제대로 당했다.
재인은 조금 전 제가 한 말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가 다시 안 오면 어쩔 생각이셨어요?”
“그럼 서재인 씨를 지구 끝까지 치졸하게 쫓아다닐 각오를 했겠지.”
재인은 갑자기 오한이 들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들어도 오싹한 협박이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인 걸 알아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인은 계약서에 행여 이상한 조항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먼저 주요사항은,
1. 서재인은 본 계약과 관련된 일체의 사항에 대하여 함구한다.
2. 서재인은 주주총회가 끝나는 날까지 차도혁의 집에 거주하며 프로젝트를 돕는다. 이때, 업무의 일환이므로 시간외근무 수당이 지급된다.
3. 주주총회 전까지 서재인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일본제과제빵학교 전 과정의 장학금을 보장한다. 집행기한은 주주총회가 끝나는 날로부터 일주일 이내로 한다.
그밖에 특이한 사항이 한 가지 있었으니,
“계약 기간 중에는 절대 이성을 사귀지 않는다? 이건 뭐예요?”
“보안을 위해 당연한 거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어서요. 24시간 팀장님이 붙어 계실 텐데 사귀긴 누굴 사귀나요.”
일에 치여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수당은 챙겨 준다니 감사하네.
도혁은 어이없어하는 재인을 보며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계약사항을 하나라도 위반하면 계약은 즉시 무효가 되니까 조심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사는 내일 하는 걸로 하지. 내일은 쉬어도 좋아.”
“내일이요?”
‘내일’이라는 말에 재인의 눈이 커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에요.”
“옷 몇 벌만 챙겨 오면 돼. 다른 가구들은 놓을 곳도 없으니까.”
“네…….”
껄끄러워서 회사에서도 피해 다녔던 도혁이었는데, 내일부터는 아예 집에서까지 붙어 있어야 한다니.
재인은 원하던 대로 장학금 받을 기회를 잡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말도 안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신애의 말까지 마음에 걸렸다.
「난 팀장님이 서 주임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자고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했다.
‘그래,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
재인이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팀장님, 계약사항 하나만 더 추가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