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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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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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
2022.06.18.
점심시간이 끝날 즈음, 재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선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에서 납작 엎드려 비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주임, 미안해!
고신애 과장이었다. 재인은 황급히 손으로 수화기를 감싸며 속삭였다.
“과장님,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관두신 거예요?”
―응. 무책임하게 굴어서 정말 면목이 없어. 공항에서 제이슨이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비행기 티켓을 내밀면서 청혼을 하더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행기 안이지, 뭐야.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니.
소녀처럼 들뜬 신애의 목소리에 재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영국에서 결혼해 사시겠네요? 축하해요, 과장님!”
―고마워. 다들 미쳤다고 하지?
“아직 팀장님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랬구나. 암튼, 미안하지만 서 주임이 우리 프로젝트 잘 좀 마무리해줘.
“그게, 저도 오늘 그만둔다고 했어요.”
―뭐? 서 주임은 갑자기 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재인은 도혁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려다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관뒀다.
―어머, 팀장님 아쉽겠네. 서 주임을 아끼셨는데.
“아끼긴요. 구박이나 안 하면 다행이죠.”
―아니야. 나한테 은근슬쩍 서 주임에 관해 물어보던걸.
“뭐 꼬투리 잡을 거 없나 캐내려던 거겠죠. 어제도 강 대리만 편애하시던데요.”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네.
―그런가? 난 팀장님이 서 주임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네?”
―어, 나 지금 가봐야 해. 또 연락할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재인은 신애의 말을 곱씹었다.
‘팀장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허.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오해를 할 수가 있지?
재인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 * *
“아, 이게 얼마만이야!”
재인은 차가운 저녁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백만 년 만의 칼퇴였다. 게다가 금요일.
시원하게 사표까지 던졌겠다,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후에 경쟁사 제품 보고서를 제출하러 팀장실에 들어가자, 도혁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놓고 가라고만 했다. 그러고는 퇴근할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른 팀원들도 오늘 팀장님이 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퇴근할 때 도혁이 신애의 퇴사 소식을 알리자, 입이 딱 벌어진 팀원들은 그제야 도혁도 신애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라 여겼다.
재인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던 도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충격이 컸나?’
지금까지 아무도 도혁에게 말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지? 하나도 안 미안하다.
‘아, 고소해라!’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 내릴 생각이 전혀 없는 재인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역사적인 날, 그냥 들어가기는 왠지 섭섭했다.
‘유라랑 만나서 신나게 한잔……은 무슨! 정신 차려, 서재인! 이제 곧 실업자 되는데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도혁에게 한 방 날렸다고 우쭐해서 잠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의 횡포에 대항해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긴 했지만, 몇 달간 쪼들리며 살 생각을 하니 슬쩍 후회가 올라왔다.
덩달아 올라온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팀장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부르르.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미쳤구나, 너.
장학금을 받는 대신 팀장이랑 두 달간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일본 땅을 밟기도 전에 피가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게다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조건이니, 만약 실패한다면 고생만 죽도록 하고 말짱 도루묵이 되는 셈이다.
돈에 영혼을 팔려 하다니.
재인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두 볼을 툭툭 쳤다.
진짜 위험했다.
그래, 당장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구직등록부터 하는 거야.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자.
두 탕 뛰자. 아니, 아예 몹쓸 생각 품을 새도 없게 세 탕 뛰자.
재인은 폭풍 속 갈대처럼 흔들리는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집으로 향했다.
* * *
옥탑방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재인의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환하게 불을 밝힌 방 안에서 경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서, 누구를 기다리나 낭랑 18세. 버들잎 지는 앞개울에서…….”
다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간 재인은 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우리 재인이 왔어?”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안 입던 원피스에 색조 화장까지 한 걸 보니 동창회라도 다녀오신 것 같았다.
“엄마, 올 거면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지! 서울에서 무슨 모임 있었어요?”
엄마는 와락 품에 안긴 재인의 등을 토닥였다.
“모임은 무슨. 그냥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왔지.”
“아빠는 어쩌고요?”
“혼자 가게 좀 보라고 했어.”
화순에 사는 재인의 부모님은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작은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솜씨도 좋고 인정이 많아 단골손님이 제법 있다.
고생하는 데 비해서는 적은 돈이지만, 두 분이 소소하게 생활하실 정도는 되어 감사할 따름이었다.
“요즘 바쁘지 않아요?”
“아르바이트생 있는데, 뭐. 그리고 가끔 없어져 봐야 네 아빠도 내가 소중한 걸 깨닫지 않겠어?”
“무뚝뚝해서 그렇지, 아빠 같은 애처가가 또 어디 있다고?”
“그건 그래. 내가 참 복이 많아. 다정한 남편에 이렇게 예쁜 딸도 있고.”
“엄마…….”
엄마가 재인의 두 볼을 쓰다듬었다.
곧이어 정성이 듬뿍 담긴 소박한 밥상이 차려졌다. 재인은 오랜만에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니 그간 고됐던 시간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밥상을 정리하고 재인과 엄마는 캔맥주와 마른안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동안 쌓아둔 회포를 풀 시간이었다.
팔짱을 낀 재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 이제 얘기해봐요.”
“뭘?”
“아빠랑 뭐 때문에 싸웠어요?”
푸훕! 엄마가 마시던 맥주를 뿜었다. 다짜고짜 치고 들어가니 꽤나 놀란 것 같았다.
“캑! 캑!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싸워서 집 나온 거잖아요.”
“누가 집을 나와, 그냥 너 보러 온 거라니까.”
엄마는 시뻘게진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우길 거면 당황하지나 말든가.
“엄마, 내가 서 씨 문중에서 눈칫밥 먹은 것만 20년에요. 척 보면 다 안다고요.”
“아 글쎄, 아니라니까!”
“이상하잖아요. 화장 안 해도 예쁘다고 맨얼굴에 선크림만 바르고 다녔으면서. 이 원피스는 불편하다고 경조사 때나 입던 거 아니에요?”
“가, 가끔 변신하고 싶을 때도 있지!”
“그리고, 엄마 우울할 때면 <낭랑 18세> 부르잖아요. 안 어울리게 고상한 말투 쓰고.”
“얘가 자꾸 생사람 잡네. 그리고, 나 알고 보면 고상한 여자야!”
엄마는 답답한지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좋아요, 그럼. 내 눈 똑바로 봐봐요.”
억지로 눈을 맞추자, 엄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눈시울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이것 봐. 어서 속 시원히 털어놔 봐요.”
“얘가, 아니라는데 왜 엄마 말 못 믿어?”
“엄마야말로 왜 딸 말을 안 들어요?”
“몰라, 몰라. 나 졸려서 잘 거니까 말 걸지 마!”
어린아이처럼 팽하고 토라진 엄마는 벽을 보고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먼 길 올라오느라 피곤했는지 금세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이 와중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제야 우리 엄마 같네.
재인은 엄마 옆에 누워 등에 살며시 얼굴을 묻었다.
대장부 같은 줄로만 알았는데 딸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고.
“우리 엄마도 많이 늙었네.”
나직이 내뱉은 말에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Rrrrrrr. Rrrrrrr.
요란한 벨 소리가 정적을 깨며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재인은 행여 엄마가 깰까 봐 황급히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사랑하는 아빠’가 떠 있었다.
* * *
“어라, 서 주임?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새 다시 돌아왔네? 소개팅이 잘 안 됐나 봐?”
오지랖 넘치는 박 과장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재인은 여느 때처럼 깔끔한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받쳐 입은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하여튼 잘했어. 갑자기 화려하게 하고 와서 깜짝 놀랐네. 그런 것도 강 대리처럼 어울리는 사람이나 하는 거야.”
“아휴, 과장님! 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서 주임, 속상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맘대로 지껄여라.
어젯밤 한숨도 못 잔 재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그러고 보니, 나희는 오늘 아주 작정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다.
하늘로 솟은 속눈썹, 큰 귀걸이에 휘황찬란한 목걸이, 날씬한 몸매에 딱 달라붙은 연분홍 원피스까지.
무엇 하나 부담스럽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딜 가더라도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 되시겠다.
애 많이 썼다. 누가 보면 미스코리아 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네.
“내 말은 서 주임은 수수한 차림이 어울린다는 얘기지. 그렇지, 연지 씨?”
큰 눈을 깜박이던 연지가 문 쪽에 시선을 두며 답했다.
“서 주임님은 안 꾸며도 예쁜데요. 사람이 명품이라. 그렇죠, 팀장님?”
응?
일제히 연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도혁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팀장실에 계신 줄 알고. 자, 자, 잡담은 그만하고 일들 하자고, 일!”
잡담을 주도한 박 과장이 먼저 내뺐다.
“팀장님, 오셨어요?”
나희가 다소곳하게 일어났다. 그러더니 풍만한 가슴을 한껏 모으며 도혁을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날렸다.
도혁은 그런 나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맞습니다.”
“네? 뭐가요?”
일하는 게 맞다고? 자기가 온 게 맞다고?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도혁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연지만 빼고.
“역시, 팀장님.”
연지가 도혁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작정하고 한 인사에 엉뚱한 답을 들은 나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팀장님, 지금 시간 되세요? 기획서 수정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전에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건 오후에 듣기로 하죠.”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늘 꾸민 목적이 팀장이었군. 티가 나도 너무 나. 그나저나 팀장님의 어디가 좋다는 거지?’
역시 얼굴인가? 그건 인정.
그러든가 말든가.
재인은 복잡하게 뒤엉킨 생각들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옆을 지나치며 도혁이 나직이 말했다.
“서 주임, 잠깐 내 방에서 봅시다.”
안 그래도 찾아갈 참이었다.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도혁의 뒤를 따랐다.
* * *
“인사팀에 사직 의사 전달했으니까 사표는 오늘 중으로 수리될 겁니다. 후임 구하는 대로 프로젝트에 차질 없게 인수인계 잘해주세요.”
도혁이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힘들었다니 미안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도혁이 생전 안 하던 사과까지 했는데도 재인의 입술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가봐도 좋습니다.”
우뚝 서 있는 발도 떨어질 생각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서 주임? 나한테 뭐 할 말 있습니까?”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재촉했다.
재인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의식하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팀장님, 혹시…….”
“뭡니까?”
쭈뼛쭈뼛하던 그녀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혹시 지난번 그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