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제가 왜 팀장님 집에서 살아요? (4/129)


4화. 제가 왜 팀장님 집에서 살아요?
2022.06.14.


응?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도혁의 말을 처리하느라 재인의 뇌 속 소프트웨어가 버벅거렸다.

기시감이 드는 게 언젠가 19금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사령관인 남자 주인공이 적국의 스파이인 여자 주인공을 의심하며 몸으로 증명해보라고 하룻밤을 제안하는 장면.

핑계도 좋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고문을 해야지 이 무슨 망측한 드립인가 했는데, 영화나 현실이나 개연성 없긴 마찬가지네.


“몸, 몸이라니요?”

재인이 몸을 움츠리며 한 발짝 물러서자 도혁은 실소를 터뜨렸다.


“직접 몸 바쳐 다이어트 라인 프로젝트를 성공시켜보라고. 그러면 결백을 믿어주지.”

아하, 불순한 뜻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나를 갈아 넣으라는 얘기였구나. ……가 아니지!


“팀장님, 저 좀 전에 사직서 냈거든요?”

“기한은 두 달 뒤,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주주총회에서 프로젝트 성과를 발표해야 해. 일이 아주 바빠질 테니 각오해야 할 거야. 출퇴근 시간도 아까우니 우리 집에서 사는 걸로 하지.”

“저 그만두겠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왜 팀장님 집에서 살아요?”

사퇴 의사는 깡그리 무시하고 제 말만 늘어놓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집에 들어오라고?

재인이 기가 막혀 발끈하는데도 도혁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그만두고 싶어서 안달이 난 서재인 씨를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스파이가 아니라고 해도 차 대표 일을 아는 이상, 비밀을 발설할 수도 있으니 철저하게 붙어서 감시해야겠어.”

도혁이 보기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한 건데, 이제는 24시간 같이 있어야 한다고?

아무래도 차도혁이 괴롭히는 전략을 바꾼 것 같다.

피를 말려 죽이는 것으로.


“그건 싫습니다. 사표 수리해주세요!”

“안 돼.”

“팀장님, 정말 이러시기예요?”

그러자 도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그만두고 싶은 이유가 뭐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재인은 기가 막혀서 도혁을 바라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 맞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도혁의 얼굴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말을 말자.


“저는 스파이도 아니고, 팀장님이 신경 쓰시는 재벌가 일에는 더욱 얽히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곧 유학을 갈 예정입니다. 벌써 학교도 합격했고요.”

“일본제과제빵학교 말이군.”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회사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4월 개강이니 아직 4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 관두는 이유가 뭐지?”

그러니까, 팀장 당신 때문이라고!

입은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이 심정을 홍길동은 이해하려나.


“그거 알고 있나? 우리 회사 계열사인 대산기술재단과 일본제과제빵학교는 제휴 관계야.”

“……!”

“거기 재단 이사장님이 할아버지 지인인데 어렸을 때부터 종종 뵈어서 친한 사이고.”

뭐야 지금, 인맥을 동원해서 날 협박하는 거야?


“그럼 이렇게 하지. 주주총회 때까지 내 뜻에 따르고, 프로젝트도 성공시키면, 그 대가로 장학금을 받게 해주겠어.”

재인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장학금이라니!

그렇다면 학비가 들지 않으니 그동안 모은 돈으로 빚을 갚고도 2년 치 생활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일본에서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자, 어때?”

도혁이 유혹하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모든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달콤해도 너무 달콤했다.

하지만, 재인은 지난 굴곡진 삶을 통해 크게 깨달은 교훈이 있었으니.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건 분명 악마의 유혹이다.

재인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제안 거절하겠습니다. 학비는 이미 마련해뒀고 생활비는 지금부터 벌면 되니까요.”

“이런, 내 말이 제안으로 들렸나?”

역시, 차도혁.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잠깐.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이라는 걸 해보자.

재인은 도혁에게 대응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과부하로 터지기 직전,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팀장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데요. 지금 아쉬운 건 팀장님이에요.”

“착각?”

예상치 못한 반응에 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 과장님이 관둔 상황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제가 꼭 필요하시잖아요.”

“그래서?”

“그리고, 차 대표님의 음모를 주주총회 때 터트리려고 준비 중이신 것 같은데, 그 사실이 차 대표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고요. 맞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저는 퇴사하면 그만이에요. 프로젝트가 망하고 비밀이 샐까 불안한 건 팀장님이고요.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넘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그 순간 재인은 보았다.

도혁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제대로 먹힌 것 같다.

하마터면 말릴 뻔했네. 누굴 바보로 아나.

여세를 몰아 한 방 더 날렸다.


“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얽어맬 방법이 없죠. 전 곧 회사를 그만둘 거니까, 팀장님은 걱정하면서 계속 불안에 떠세요.”

“……!”

“아, 혹시라도 일본제과제빵학교에 압력을 넣을 생각이라면 그만두시고요. 이미 입학금을 내서 떨어뜨릴 명분이 없거든요. 뭐, 그 정도로 치졸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요.”

“치졸?”

매서운 눈빛이 재인에게 꽂혔다.

하나도 안 무섭다. 그래 봤자 제 눈만 아프지.


“사표 수리 신속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재인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묵직한 말이 날아왔다.


“비밀은 꼭 지켜.”

“혹시 부탁인가요?”

도혁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저 자존심에 이 정도면 많이 굽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남의 일에 관심 없습니다. 제 일만으로도 복잡하거든요.”

이대로 끝내기는 뭔가 아쉽다. 이왕 지르는 거 할 말 다 해버리자.


“그리고, 제가 그만두려는 이유는 팀장님 때문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왜 그래?

그렇게 의외라는 표정 지으면 내가 섭섭하잖아.


“네. 팀장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요. 다들 저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자기 같았으면 벌써 팀장님 멱살잡이하고 때려치웠대요.”

순간 도혁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재인은 그동안 쌓였던 한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근을 밥 먹듯 시키는 것도 서러운데 주말까지 나오라고 하시는 건 너무하잖아요! 주말에 전화로 업무 물어보는 걸로는 성에 안 차셨어요?”

“……!”

“저번에 버스 사고로 지각했을 때, 저한테만 뭐라고 하고 강 대리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셨죠? 그거 명백한 차별이에요.”

“그건…….”

“그리고, 어제 회의 때도 강 대리님이 잘못한 건데, 제 얘긴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 일도 모른다고 몰아붙이셨잖아요!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세요?”

자기가 생각해도 찔리는지 도혁의 눈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한 가지만 더. 제가 카페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제 사생활입니다. 그것까지 지적하는 건 월권행위예요. 조심해주세요, 차도혁 씨.”

“서재인…….”

도혁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잘생긴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려다 말았다. 잘생긴 얼굴은 구겨져도 잘생겨서.

아무튼, 그러든가 말든가. 그동안 당한 거 생각하면 100분의 1도 안 한 거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재인은 팀장실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사표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
.
.



“서 주임님, 아까 팀장실에서 뭐 충격받은 일 있으셨어요?”

점심시간, 연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옆에 앉은 지훈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왜?”

“계속 히죽히죽 웃고 계셔서요. 팀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해서…….”

“괜찮고말고! 오늘따라 밥맛이 아주 좋아!”

재인은 보란 듯이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어, 오늘 구내식당 메뉴 진짜 별로인데…….”

“서 주임, 아침부터 이상해. 무슨 일인데?”

박 과장이 의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팀장님한테 칭찬이라도 들은 거야?”

“어휴, 과장님. 팀장님이 칭찬 같은 거 하시는 분이에요? 깨는 거면 몰라도. 그죠, 서 주임?”

나희가 해맑음을 가장해 속을 박박 긁었다.

그래, 너 보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재인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입술을 뗐다.


“강나희.”

“……!”

갑작스레 제 이름이 불리자 나희가 움찔했다.


“……대리님, 저 팀장님과 아주 즐거운 대화를 나눴어요.”

“무슨 얘기요?”

나희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난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우리 강 대리가 팀장에게 관심이 아주아주 많다는 걸.

그동안은 나 살기 바빠서 알 게 뭐냐,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재인은 씩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뭐냐니까요?”

“뭘까요.”

“그건 서 주임이 알죠! 팀장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어쩌죠. 팀장님이 둘만의 비밀이라며 꼭 지키라고 하셔서.”

열 받으라고 뻥카 한번 날려봤다.

뭐, 없는 말 지어낸 건 아니니까.

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둘만의 비밀?”

팀원들 모두 밥을 먹다 말고 입이 헤 벌어졌다.


“그런 게 있어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그만두는 것도 비밀이라면 비밀이지.

이 몸은 곧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더 이상 날 찾지 마세요.

특히 박 과장님, 너!

재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식판을 깨끗이 비웠다.

그 와중에 또 한 가지 깨달은 사실.

사표를 던지면 소화도 잘된다.

* * *



“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고? 멱살잡이?”

도혁은 사표를 구기며 재인의 말을 곱씹었다.

상사라 불편해서 어려워하는 줄로만 알았지, 그 정도로 원한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너무 황당해서 말 한 마디 못 하고 재인을 내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군.’

차별? 확실히 차별하긴 했다.

다른 의미로.

일을 지시해보니 재인에 비해 나희의 실력이 형편없었다. 어떻게 먼저 승진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래서 나희에 대해서는 진작 관심을 껐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하드트레이닝을 거뜬히 이겨내는 재인을 해외 지사에 추천할 생각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걸 알고 생각을 접었지만.


‘회의 때 분명히 강 대리를 보며 말했는데, 왜 자기라고 생각한 거지?’

지각했던 날도 버스 사고라기에 걱정스러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와버린 거였다. 사고가 났는데도 제 몸을 챙기지도 않는 재인이 안쓰러워서.

휴우. 도혁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관두려고 하는 건 어제 일 때문인 게 분명했다.


“내가 심하게 말하긴 했지. 그 일만 아니었어도…….”

이틀 전, 야근을 끝내고 나오는데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도혁은 이때다 싶어 재인에게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했었다.


“아, 아니에요! 집도 너무 멀고, 버스 타고 가면 돼요.”

“그럼 정류장까지 태워줄게요.”

“저 비 맞는 거 되게 좋아해요! 괜찮습니다!”

손을 내저으며 마다하던 재인은 옆 팀 나민우 팀장이 태워준다고 하자 냉큼 타고 가버렸다.

그래 놓고 민우와 카페에 앉아 웃고 있는 걸 보니 이성이 잠시 마비돼서 회의 때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만둔다고 할 줄이야.

그 일만 아니었으면 도혁이 이성을 잃지도 않았을 테고, 재인이 사직서를 내러 방에 들어와 도혁의 비밀을 엿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버스는 떠났고, 남겨진 것은 위기 상황에 놓인 프로젝트와 들통날까 불안한 비밀뿐이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도혁의 운명이 판가름 날 주주총회까지 남은 시간은 딱 두 달뿐.

고 과장이 갑자기 그만둔 것도 당황스러운데 재인마저 없으면 다이어트 신제품 프로젝트가 어그러질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재인이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재인을 옆에 붙잡아 두어야만 한다.


‘어떻게 마음을 돌리지?’

스파이를 들먹여 우선 판단을 유보시킨 후 회유해보려는 발상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젠장. 도무지 모르겠네.’

도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옅은 분홍색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 든 것을 꺼내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주 토요일에 하는 유명 록밴드 ‘BOC’의 공연 티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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