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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몸으로 증명해 (3/129)


3화. 몸으로 증명해
2022.06.11.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도혁은 누구와 통화 중인지 목소리가 심각했다.


“보안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합니다. 주주총회 전에 밖으로 새면 끝장이니까요.”

‘주주총회? 끝장?’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재인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차 대표를 막아야 해요. 회장님은 절대 아시면 안 됩니다. 할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대쪽같아서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뭐라고? 회장님이 팀장님 할아버지라는 거야?’

깜짝 놀란 재인은 행여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제 입을 틀어막았다.


‘차 대표라면 회장님 아들인데. 그럼 팀장님은 대표님 조카?’

그러고 보니 차정환 대표와 도혁은 같은 ‘차’ 씨에 훤칠한 체격과 이목구비가 많이 닮았다.


‘세상에! 팀장님이 대산그룹 일가였어?’

그래서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나 보다.

지난번 회의 때 대충 넘어가려는 김 부장에게 거침없이 직언을 날리던 도혁이 떠올랐다.

겁도 없다 했는데 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였다. 그때 아들 뻘인 도혁에게 꼼짝 못 하고 식은땀만 흘리던 부장님이 어찌나 안쓰러웠던지.


“차 대표가 대산F&G를 헐값에 넘기려고 사모펀드와 인수합병을 몰래 진행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무슨 좋은 방법 없습니까? 그래요. 알아봐 주세요. 그럼.”

흠. 짧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말소리가 뚝 끊겼다.

책상 밑에서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던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산F&G가 인수합병 될지도 모른다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인수합병이 되면 대부분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진행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맙소사! 그 말이 진짜라면 큰일이네.’

뜻하지 않게 굉장한 사실을 알아버렸다.

퇴사하려는 마당에 불필요한 TMI일 뿐인데.

똑똑.

팀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팀장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어제 다시 작성해 오라고 하셔서…….”

박 과장의 목소리였다.


“오후에 하죠. 지금부터는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조금 전의 통화 때문인지 원래도 차가웠던 목소리가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저벅저벅.

큰 걸음 몇 번 만에 책상 앞까지 걸어온 도혁은 선 채로 서류를 넘겼다. 재인은 그의 쭉 뻗은 두 다리를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라면 의자에 앉으려는 도혁에게 딱 걸려 괜한 오해를 살 게 뻔했다.

졸지에 훔쳐 들은 꼴이 됐으니까.

도혁이 들어왔을 때 곧장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쳐 일이 커져버렸다.


‘신이시여, 저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동안도 착하게 살았는데요, 앞으로는 더 착하게 살게요. 제발 절 좀 구해주세요!’

똑똑.

때마침 간절한 재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누군가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또 뭡니까?”

도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팀장님, 부장님이 신제품 출시 건으로 상의할 게 있다고 지금 좀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이번에는 연지였다.

이제 됐어! 재인은 기적 같은 타이밍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천하의 차도혁이라도 부장님 호출이니 바로 달려 나가겠지?’

“알았어요. 지금 가죠.”

살았다!

우리 부장님께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노래방에서 올드팝 부르실 때 탬버린 좀 열심히 흔들어드릴 걸 그랬다.

잠시 후, 딸깍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제야 재인은 간신히 움츠렸던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너무 오래 웅크리고 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려 그만 중심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쾅!


“아얏!”

재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정수리가 찡한 게 아파도 너무 아팠다.


‘오늘 정말 일진이 사납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나가야 해!’

재인이 아픔을 꾹 참으며 일어서려던 그때, 갑자기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혁이 돌아온 게 분명했다.

재인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책상 밑으로 숨었다.

저벅저벅 책상 쪽으로 다가온 도혁은 무언가 찾는 듯 서류를 뒤적거렸다.


‘설마, 만년필을 찾는 거야?’

이 조그만 게 끝까지 말썽이네.

만년필을 쥔 재인의 손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간이 콩알만 해지다 못해 아예 사라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도혁이 금세 포기했는지, 다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더니 문이 닫혔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명이 1년은 줄어든 것 같았다. 잠시 그대로 앉은 채 호흡을 골랐다.

이윽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책상 너머를 빼꼼 내다보던 재인은,


“꺄악!”

귀신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질렀다.


 
나간 줄 알았던 도혁이 문 앞에 서서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재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럼 그렇지. 어쩐지 신이 너무 협조적이시다 했다.

난 죽었다.

.
.
.

적막감이 감도는 팀장실.

재인은 의자에 앉은 도혁의 옆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이윽고 도혁이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꺼냈다.


“자, 설명해봐요.”

“뭐, 뭘요?”

“지금, 아무도 없는 내 방에서, 그것도 책상 밑에서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게…… 팀장님 만년필이 바닥에 떨어져서 주웠을 뿐이에요. 근데 팀장님이 갑자기 들어오시는 바람에 놀라서 나갈 타이밍을 놓친 거고요.”

“그게 이유라는 겁니까?”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못 믿겠습니다.”

그래, 나라도 순순히 못 믿겠다.

재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애초에 내 방엔 왜 들어왔습니까?”

“팀장님께 뭘 좀 드리려고…….”

“그게 뭡니까?”

“사……직서요.”

재인은 재빨리 서류 밑에 깔린 사직서를 꺼내 맨 위로 올려놓았다. 사직서를 펼쳐 본 도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갑자기 왜?”

“저기…… 제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서재인, 이러기야?

그렇게 살지 말라고 차도혁 얼굴에 사표 집어 던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재인은 여느 때처럼 도혁의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제 처지가 서글퍼졌다.


“그건 곤란한데……. 안 됩니다.”

“네?”

아니, 평소에 그렇게 못마땅해하더니 막상 관두겠다는데 왜 발목을 잡으시는지?

재인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도혁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서 주임이 맡은 프로젝트 성패가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관두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회사의 운명이 걸린 프로젝트라고? 금시초문이다.

팀장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회사는 부품 하나쯤 없어도 잘만 돌아간다는 걸 익히 봐왔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프로젝트 리더인 고 과장님이 계시니 진행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인수인계도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고 회사를 박차고 나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온 재인이었다.


“고신애 과장, 오늘 그만뒀습니다.”

“뭐라고요?”

재인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고 과장이 갑자기 관뒀다고?


“아침에 전화가 와서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지금 영국인데 눌러살 생각인 것 같더군요.”

“영국에요? 프로젝트는 어쩌고요?”

“서 주임이 모든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괜찮을 거라며 잘 부탁한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맙소사! 믿었던 고 과장님이 선수를 치다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남자친구 없이 어떻게 사냐며 며칠을 시체처럼 지내더니, 결국 못 참고 같이 가버린 모양이다. 고 과장님처럼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에 눈이 멀면 보이는 게 없나 보다.

충격적인 일이지만 이마저도 재인의 퇴사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저 말고도 강 대리님이 있잖아요.”

“그 힘든 일을 강 대리 혼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

아니요. 자살골이나 안 넣으면 다행이죠.

그나저나 지금 강 대리 힘들까 봐 날 잡는 건가?

내 알 바 아니지. 편애하는 강 대리와 알콩달콩 자알 살아보세요, 차도혁 씨!


“팀장님이 뭐라고 하시든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퇴사하겠습니다.”

“내가 끝까지 사표 수리를 안 하겠다면요?”

“부장님께 드려야죠.”

이미 퇴사를 선언한 마당이니 거칠 게 없는 재인이었다.

도혁은 머릿속이 복잡한지 양 팔꿈치를 책상에 괴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와중에도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이 마치 잡지 화보를 보는 듯해 재인은 자꾸만 눈길이 갔다.


‘서재인, 네가 점점 미쳐가는구나. 쓸데없는 관찰력을 발휘할 여유도 있고. 암튼 과하게 잘생기긴 했다.’

“팀장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럼.”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재인을 도혁이 붙잡았다.


“서 주임, 내 방에 들어온 진짜 목적이 뭡니까?”

“네? 사직서 내러 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갑자기 말이 짧아졌다. 무섭게.

도혁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재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 정말 그게 다예요.”

“가만, 질문이 잘못됐어. 다시 묻지. 누가 시킨 거지?”

“……시키긴, 누가요!”

“날 염탐하라고 보낸 사람이 있을 텐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스파이가 순순히 시인할 리 없지.”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첩자로 오해받고 있는 거야? 왜 얘기가 그렇게 빠지는데?


“아니, 제가 뭐 하러 팀장님을 염탐하겠어요?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회장님이 팀장님 할아버지라는 것도 좀 전에 알았단 말이에요.”

“그거 일급비밀인데. 역시 다 들었군.”

딱 걸렸어.

도혁의 눈빛이 번쩍였다.

아차. 끝까지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그게…… 듣긴 했는데 제가 가는 귀가 먹어서 도대체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하하.”

허. 도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뒤늦게 수습해보려 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 것 같다.


“이미 눈치챘지?”

“뭐, 뭘요?”

“내가 차 대표 조카라는 것도.”

역시 그런 거였다. 하나도 안 궁금했는데.


“아니지, 겁도 없이 내 방에 숨어들어 왔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차 대표가 뒤로 꿍꿍이를 벌이는 것도 말이야.”

이 사람이 진짜!


“팀장님, 자꾸 절 스파이로 몰아가시는데요, 전 정말 아니에요!”

“됐고. 누가 보낸 거야? 최 전무? 차 대표? 아니면, 또 다른 인물?”

“보내긴 누가 보내요!”

“그 프로젝트를 성공해야 내가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아는 누군가가. 그래서 프로젝트를 망치려고 미리 손을 쓴 건가?”

“……말도 안 돼.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회사의 운명이 걸렸다고…….”

“다 들켰으니 모르는 척 연기 그만하지?”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게 낫겠다. 재인은 이 철벽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지 막막했다.


“날 언제부터 지켜본 거지?”

“아니라니까요! 전 진짜 팀장님께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고요!”

속이 터진 재인은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러버렸다.

순간, 도혁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도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재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그만…….”

훗.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쩜 웃는 것도 저리 무서운지.


“좋아. 그럼 스파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봐.”

도혁의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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