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팀장님, 살려만 주세요
(1/129)
1화. 팀장님, 살려만 주세요
(1/129)
1화. 팀장님, 살려만 주세요
2022.06.04.
싸늘한 바람이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할퀴듯 스치는 어느 초겨울 아침, 하이힐을 신은 한 여자가 떼굴떼굴 뒹구는 낙엽을 지르밟으며 거침없이 대산F&G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이는 상품기획 1팀의 주임, 서재인이었다.
“오, 서 주임, 아주 힘을 단단히 주고 왔는데! 누구신가 했어. 하하.”
재인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박 과장이 칭찬 아닌 칭찬을 날렸다.
“맨날 초췌한 얼굴이더니 오늘 어디 좋은 데라도 가나?”
재인은 말없이 씨익 하며 웃음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눈치를 밥 말아 먹은 걸로 유명한 박 과장이 계속 질문을 해댔다.
“설마, 선이라도 보러 가는 거야?”
“…….”
“어? 정말인가 보네? 이거 이거 한발 늦었네. 내가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했더니만. 얘기했었지? 일류 로펌에서 잘나간다는 대학 후배. 그 녀석이 어찌나 날 잘 따르는지…….”
그만 낚아라. 또 인맥 자랑질 시작이네.
재인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과장님, 그 후배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내친김에 오늘 만나보게요.”
어떤 멍멍이 소리에도 늘 다소곳했던 재인의 싸늘한 반응에 팀원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이제는 당연한 BGM이 되어버린 박 과장의 인맥 자랑질에 딴지를 걸다니.
“응? 아, 아니 그게…… 그 녀석이 요즘 엄청 바빠서…….”
역시나.
멋쩍게 웃던 박 과장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썼다.
“아이고,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배가 아프네.”
박 과장이 멀쩡한 배를 붙잡고 사라지자 팀원들이 재인에게 칭찬의 눈짓을 보냈다.
“저 정도면 허언증이에요, 그죠? 아, 속 시원해. 주임님 최고!”
옆자리에 앉은 팀의 막내 연지가 엄지를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서 주임님, 근데 진짜 오늘 누구 만나세요? 풀 메이크업하고 오신 거 처음이잖아요. 어디 좋은 데라도 가시나 봐요.”
“맞아, 좋은 데 가는 거.”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어머, 부러워요! 그게 어디인데요?”
재인은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씩 웃었다.
팀장실.
사표 던지러.
* * *
이른 아침, 대산그룹 자회사, 대산F&G 상품기획 1팀이 모인 회의실에선 늘 그랬듯 피바람이 불었다.
“박 과장님, 이번 신제품 기획서에 들어간 간편식 매출 자료가 최신 자료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네? 그게 그러니까…… 제대로 했을 텐데요.”
박 과장은 도혁의 지적에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부하직원들 앞에서 한참 어린 도혁에게 면박을 당하는 게 창피한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텐데요? 지금 직접 작성한 게 아니라고 시인하는 겁니까?”
“어휴! 팀장님,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해외시장 자료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김지훈 씨한테 매출 자료조사만 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펄쩍 뛰는 박 과장을 향해 도혁은 싸늘하게 일침을 가했다.
“지금 인턴사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겁니까? 어쨌든 최종 책임은 작성자가 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기획서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건 그 매출 자료뿐입니다만.”
“…….”
정곡을 찔려 말문이 막힌 박 과장이 분풀이하듯 눈을 흘기자 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와, 말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 저건 분명 회칼이야.’
도혁과 제일 먼 자리에 앉은 재인은 살벌한 그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 잘생긴 인물에, 말만 조금 부드럽게 해도 인기폭발일 텐데.’
이미 외모로 다 잡아먹고 들어가니 그럴 필요가 없다, 이건가?
그도 그럴 것이, 반듯한 이마와 짙고 쭉 뻗은 눈썹에, 그냥 뜨고 있을 뿐인데도 우수 어린 눈빛, 성형외과 의사가 보면 극찬해 마지않을 오뚝한 콧날에, 야생마를 연상케 하는 탄탄한 근육질 몸매까지.
차도혁 팀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없이 관대해지도록 만드는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마치 잡지 화보 촬영 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어디 외모뿐인가. IQ 168에,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해외 지사에서 탁월한 성과를 발휘해, 서른한 살에 최연소 팀장 자리를 꿰찬 독보적인 인물로 명성까지 자자했다.
‘신도 참…… 차별이 심하시네.’
“서 주임?”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재인은 화들짝 놀라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맞은편에 앉은 연지가 눈짓으로 팀장을 가리켰다.
딴생각하다 딱 걸려버렸다.
“말해봐요.”
“뭐, 뭐를요?”
“사람 얼굴을 넋 놓고 쳐다봤으면 할 말이 있을 거 아닙니까.”
“죄, 죄송합니다!”
정신 안 차릴래? 라는 싸늘한 눈빛이 날아와 얼굴에 꽂혔다.
등줄기를 타고 오한이 느껴졌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닥쳐올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아주 여유롭게 문책하겠다는 신호이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경고였다.
“서 주임, 다이어트 라인 신제품 기획은 잘돼갑니까?”
역시.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아, 그 부분 관련해서는 고 과장님이 보고 드린다고 했는데 갑자기 휴가를 내셔서…….”
“지금 서 주임한테 물었습니다만?”
그러긴 했지.
재인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필이면 오늘 고 과장님이 쉬실 게 뭐람.’
프로젝트 리더인 고신애 과장은 어학원에서 만난 영국인 남자친구가 출국한다며 배웅을 나갔다.
재인은 고 과장의 부재와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도혁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직까지는 순조롭습니다.”
“순조롭다는 추상적인 표현 말고 구체적인 진행 상황을 얘기해봐요.”
“그게, 그러니까…… 현재 자기 관리에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이삼십 대 직장여성을 주 고객층으로 잡고 설문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결과 보고는 언제 받을 수 있나요?”
“다음 주 내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경쟁사 제품 파악은?”
“그것도 다음 주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시작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끝났습니까? 내일까지 보고하세요.”
“네? 하루 만에요? 박 과장님 서포트도 해야 해서 그건 무리…….”
순간 도혁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덩달아 재인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내일까지.”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야근 확정.
밤새도 못 끝낼 것 같다.
“해외시장 조사는 다 돼갑니까?”
“아, 경쟁사 제품 파악 끝나면 바로 하겠습니다.”
“다이어트 식재료들 리스트와 성분 조사는?”
“그건 강 대리님이…….”
화려하게 관리한 네일을 만지작거리던 나희는 제 이름이 나오자 두 손을 재빨리 책상 밑으로 감췄다. 그러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그거 서 주임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난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들 자비로 체험해보면서 아이디어 구상 중인데.”
재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그건 너 살 빼겠다고 시켜 먹는 거잖아!’
나희에게만 가면 일이 하수구 막힌 듯 정체돼서 고 과장과 재인이 대부분의 일을 떠맡곤 했다.
그중에서 제일 쉬운 일 하나 시킨 건데, 거기에 모르쇠를 잡아떼다니.
“아니, 분명히…….”
“제대로 하는 게 없군요.”
재인이 해명하려는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도혁이 말을 끊었다.
“자기 일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체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건지.”
“……!”
와, 이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하다.
재인은 자기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책망만 하는 도혁이 원망스러웠다.
그새 나희는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아, 진짜 회사 때려치우고 싶네!’
이놈의 꼬일 대로 꼬인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올해 입사 4년 차에 접어든 재인은 꽤 일을 잘한다고 자부해왔고 평판도 좋았다.
그런 재인에게 악몽이 시작된 건 찌는 듯한 더위가 한풀 꺾인 늦은 여름날이었다.
그날 상품기획 1팀에는 새 식구가 둘이나 들어올 예정이었다.
다과를 준비하려고 홀로 일찍 출근한 재인은 여느 때보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제 퇴근 전, 고 과장이 새 팀장에 대해 살짝 귀띔한 것 때문이었다.
「해외 지사에 근무하는 동기가 그러는데, 이번에 새로 오는 팀장 지독한 워커홀릭에 한 번 찍히면 끝장이래. 재인 씨도 조심해.」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아무런 정보도 없었는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던 대로 열심히 일만 하면 되지, 뭐. 설마 찍히기야 하겠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던 그때, 드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접시에 간식거리를 나눠 담던 재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한 남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며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후광이 비친다는 게 어떤 건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누구……세요?”
남자는 반쯤 넋이 나간 재인을 보며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가 상품기획 1팀입니까?”
분명 팀장과 인턴사원이 온다고 들었는데, 남자는 어딜 봐도 스물일곱인 제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인턴사원 김지훈 씨군요. 전 서재인 주임이고 지훈 씨 사수예요. 반가워요.”
착하게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재인은 악수를 청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제,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박 과장이 다과 준비를 떠넘기면서 인턴 교육까지 맡으라고 해서 원망스러웠는데 그게 신의 한 수였다니.
남자는 재인의 손이 무색하게 잠자코 보기만 하더니 무심히 물었다.
“팀장실은 어디입니까?”
“아, 오른쪽 끝 방이에요.”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팀장실로 향하는 그를 재인이 황급히 붙잡았다.
“팀장님께 인사드리려고요? 오늘 팀장님도 새로 오시는데 아직 출근 전이에요. 제 옆이 지훈 씨 자리니까 앉아서 기다려요.”
재인은 민망해진 빈손으로 의자까지 손수 빼줬다.
그는 재인을 잠시 바라보다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서재인 주임님이라고 했나요?”
“네, 맞아요. 서재인.”
재인은 홀린 듯 의자에 따라 앉았다.
두근두근.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앞으로 잘 지내보죠.”
어머, 나랑 잘 지내재.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는 말이 재인의 귀에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들렸다.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지훈 씨는 걱정하지 말고 저만 믿고 따라와요. 사수가 왜 있겠어요. 이래 봬도 4년 차라 회사 돌아가는 거엔 빠삭해요. 제가 특별히 지훈 씨한테만 눈에 띄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회사생활 하는 법 전수해 줄게요. 고마우면 나중에 커피나 한잔? 하하.”
순간 도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내가 지금 뭐라는 거니.
재인은 잘생긴 남자 앞이라고 긴장해서 쓸데없는 말까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제 모습이 낯 뜨거워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그때, 재인의 등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응?
뒤를 돌아보니 앳된 얼굴의 훤칠한 남자가 입구에 서 있었다. 재인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누구……?”
“오늘부로 상품기획팀에 배치받은 인턴 김지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뭐야, 저 사람이 김지훈이라고?
그렇다면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독한 워커홀릭에 한 번 찍히면 끝장이라는 그 팀장?
사색이 된 재인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팀장 차도혁입니다. 서 주임이 알려준다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회사생활 하는 법’이 뭔지 기대되는군요.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신의 한 수는 무슨.
저승길이 활짝 열렸네.
그렇게 재인은 황홀경에 빠진 지 몇 분 만에 도혁에게 딱 찍혀버렸다.
팀장님, 살려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