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저길 봐라(14)
[3루타에 이어서 단타까지. 이거 뭔가 힛 포 더 사이클 느낌이 좀 나는 건 저뿐인가요?]
[그럴리가요. 사실 히트 포 더 사이클. 그러니까 사이클링 히트의 경우 가장 어려운 게 3루타거든요. 근데 그걸 대뜸 첫 타석에서 해버리면 당연히 기대하게 되죠.]
[가끔 보시면 싸이클링 히트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차라리 홈런 2방에 장타 2방이 더 의미 있는 거 아니냐.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네,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승리에는 그게 더 영양가가 있죠. 하지만 어디 우리가 밥 먹을 때도 영양가를 따지지는 않잖습니까. 색도 보고, 모양도 보고, 향도 맞고. 다 그런 거죠.]
[맞습니다. 이게 프로 스포츠에는 결국 로망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전 힛 포 더 사이클에는 그 로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 최수원 선수 사실 이 히트 포 더 사이클도 상당히 드문 기록이니 오늘 이렇게 3루타와 단타를 하나씩 기록한 김에 기록 하나 더 챙겨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수원 선수하면 기록의 사나이 아니겠습니까? KBO에서 뛰던 시절에도 기회가 오면 꼭 잡는 선수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싸이클링 히트? 오늘 무조건 한다고 봅니다.]
“도밍고.”
“어?”
“근데 넌 콜 씨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냐?”
수비 이닝.
덕아웃에 나란히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도밍고 녀석에게 물었다.
“나? 글쎄다.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게릿 콜 저 양반한테 해야 할 것 같은데? 난 저 양반 딱히 싫어한 적 없어. 그냥 저 양반이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고 엿같게 구니까 나도 똑같이 엿 같게 굴어주는 것뿐이야.”
“아, 그러니까 누가 이유 없이 널 싫어하면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타입?”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근데 왜? 설마 막 우리 둘이 화해를 하고 알콩달콩 친하게 지내면 팀의 케미스트리가 폭발하면서 위 아더 월드로 월드 시리즈 우승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너 무슨 헐리웃 영화 스토리 머릿속에 구상하고 다니는 거야? 뭐 그렇게 디테일 해? 설마 도밍고 너 진짜 그런 생각으로 아직 티격태격 하는 거······.”
“아니거든!!”
사실 도밍고 녀석은 게릿 콜이 자기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만 내가 봤을 땐 싫어할 만한 이유가 참 많았다. 질투심도 있을 거고, 서열 정리도 있었을 거고. 무엇보다 대화를 나눠보니 왠지 도밍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게릿 콜의 오늘 경기 여섯 번째 삼진.
“내년에 FA라서 그런가? 확실히 공이 좋긴 좋아. 근데 오늘 9이닝 무실점하면 나랑 평자책 거의 똑같아지는 거 아닌가?”
도밍고 녀석이 스페인어로 중얼거렸다. 물론 다 알아들었지만, 굳이 그 혼잣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뭐, 26명이 복작복작 생활하는데 어떻게 모두가 다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데면데면한 녀석들은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거고, 친하게 지내는 녀석들은 친하게 지내는 거다. 그 가운데서 1, 2등은 서로 경쟁심도 불태워주는 거고. 그냥 그게 너무 과하게 발전하지만 않으면 된다. 오히려 내가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오히려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하면서 사이좋게 꼴찌를 향해가는 팀이 오히려 더 최악이다.
경기가 계속됐다.
***
5회 초.
투아웃에 주자 1루.
“아!! 아니, 왜 하필 계속 이런 타이밍에 최의 타석이 돌아오는 건데.”
“왜? 뭐가? 주자 1루면 괜찮은 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자꾸 투아웃 상황에서 타석이 돌아오잖아. 여기서 최가 안타 쳐도 후속에서 타일러 비트 쟤가 붕붕 돌려대는데 점수가 나겠냐고.”
“그러면 장타를 치면······.”
“아니, 방금 삼진당한 앤서니 볼피는 몰라도 지금 1루에 선 호세 트레비뇨는 2루타에 홈까지 들어갈 만한 발은 아니야.”
보스턴에서 2시간 떨어진 거리.
뉴욕의 펍에 모여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양키스의 팬들이 도무지 추가되지 않는 점수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냥 여기서는 저 0번이 시원하게 담장을 넘겨버려주는 게 베스트야.”
“저 녀석 홈런이 지금 5개였나?”
“아니, 7개. 얼마 전에 메츠랑 경기에서 멀티 홈런 때렸어.”
“아!! 맞다. 알렉스가 3홈런 친 날에 쟤도 멀티 홈런 쳤었지? 기억 난다.”
“뭐야? 너 메츠로 전향이라도 한 거야? 우리 선수가 멀티 홈런 친 건 까먹었으면서 알렉산더가 3홈런 친 건 기억을 한다고?”
“아니, 그건 워낙에 뉴스에서 때려대니까 모를 수가 없는 거잖아. 그래도 저 스완이라는 녀석이 오늘로 11경기 연속 안타 때리고 있는 건 알고 있다고. 뭐라더라? 신인이 데뷔전에서부터 친 걸 기준으로 하면 역대 3번째 기록이랬나? 하여간 야구는 진짜 별 걸 다 카운트 한다니까. 그래 봐야 조 디마지오의 기록에 20%도 채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따아아아악!!!
[최수원 4구째 잡아당긴 타구!!! 좌측 담장으로!! 좌측 담장으로!!!]
“어!!!”
“넘어가!! 넘겨버려!! 야!!!!!”
“그래!! 빌어먹을 슈렉 새끼 뚝배기를 아주 박살을 내버리라고!!”
[넘어 갔습니다!! 투런 홈런!! 시즌 여덟 번째 홈런입니다!! 최수원이 11경기 만에 무려 여덟 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점수는 이제 3:0. 양키스가 두 점을 더 달아납니다.]
“됐어!!!”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저 0번. 뭔가 해줄 거라고 그랬지? 담장 넘길 것 같다고 그랬잖아!!”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해버린 펍.
양키스의 경기를 보던 팬들이 연달아 맥주를 들이켰다.
[와, 최수원 선수. 오늘 정말 타격감이 미쳤는데요? 잠깐 5할 타율 아래로 내려가 있더니 그대로 다시 연타석 맹타를 휘두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지금 슬래시 라인이······. 미ㅊ······. 아니, 정말 터무니가 없네요. 0.543/0.600/1.400. OPS가 다시 2.0으로 올라갔습니다.]
[4월도 이제 슬슬 60%가 넘게 지나간 시점에서 OPS 2.0이라니. 이건 정말 미쳤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가 않는 성적이네요.]
“그래, 요즘 촌스럽게 누가 어? 홈런 개수로 따지냐? OSP. 어? 이거 얼마나 과학적이야. 알렉산더 맥도웰. 얘는 2.0은커녕 어? 1.5도 안 될걸? 그러면 우리 저기 저 스완이 몇 배를 더 잘하는 거지?”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홈런을 쳤는데. 그냥 맥주나 시원하게 한 잔 더 하자고.”
“어이!! 여기 이거 봐봐.”
“뭔데?”
─1941년 이후 깨지지 않았던 불멸의 기록들. 어쩌면 우리는 87년 만의 기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조나단 웰스? 그 데일리 뉴스에 야구 전문 기자? 볼피가 데릭 지터의 진정한 후계자네 어쩌네 하면서 글 쓰던 걔? 이번엔 또 무슨 거창한 헛소리를 늘어 놓은 건데?”
“헛소리라니. 조나단 웰스 칼럼이 얼마나 질이 좋은데. 게다가 문장도 좋잖아. 이번 칼럼에는 여기 이 문장이 특히 괜찮네.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이 이뤄지는데도 고작 86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워진지 87년이나 된 불멸의 기록도 이제 슬슬 깨질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본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때?”
사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칼럼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아주 멋들어지게 조롱하고 있다는 부분이었으니까.
“아니, 근데 그래도 이제 고작 11경기 연속 안타 친 녀석이 위대한 디마지오의 기록을 언급한다는 게······. 이제 고작 4월이잖아. 아무리 떡밥이 필요하다고 해도 이건 6월. 못해도 5월 정도는 돼서 언급해도 안 늦는 거라고. 그래도 뭐, 4할 타율 정도는 지금 페이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긴 하네······.”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가 그 위대한 기록을 세우고 무려 8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아무리 나이가 많은 팬이라고 해도 그 당시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위대했던 시즌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다시 그 아들로 구전되어 전해져왔다.
물론 같은 역사였지만 구전되는 내용은 미묘하게 달랐다.
뉴욕 양키스의 팬들에게는 마지막 4할 타자를 이겼던 위대한 디마지오의 이야기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에게는 MVP를 도둑맞았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타자의 이야기로.
펜웨이파크.
아직 한참 이른 시기에 그 위대한 이름 두 개를 동시에 소환한 남자가 경기 네 번째 타석에 올라왔다.
[7회 초. 양키스의 공격.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입니다.]
[오늘 경기. 정말이지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최수원 선수. 현재까지 3루타와 단타. 그리고 홈런을 했습니다. 히트 포 더 사이클까지 2루타 하나를 남겨 둔 상황이예요.]
[보스턴의 마운드에는 노아 케네디.]
오늘 경기 태너 하우크의 피칭은 매우 훌륭했었다. 사실 최수원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공략한 타자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하지만 최수원한테 두들겨 맞고 흔들리는 과정에서 투구수가 너무 늘어났었다. 6회를 끝냈던 시점에서 투구 수는 이미 107개. 보스턴의 덕아웃은 불펜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네 번째 타석.
많은 이들이 묻는다.
만약 힛 포 더 사이클에 단타만을 남겨 둔 상황에서 타자가 2루타를 친다면 1루에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2루까지 최선을 다해서 달려야 하는가.
다행이라면 최수원은 지금 그 질문에 해당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경기는 3:0으로 이기고 있었으며 그가 쳐야하는 것은 단타가 아닌 2루타였으니까. 게다가 2루타를 친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따아아아악!!!
[쳤습니다!!! 쭉쭉 뻗은 타구!! 좌측!! 좌측 담장으로!!]
‘아, 씨. 이거 넘어가는 거 아니야?’
1회 초.
그의 홈런을 훔쳐 갔던 높이 11미터짜리 빌어먹을 그린 몬스터. 그 빌어먹을 담장을 내심 응원하면서 최수원이 최선에서 한 스푼 정도 뺀 것 같은 속도로 1루를 향해 달렸다. 아무튼 기록은 세울 수 있을 때 세우면 좋은 거니까.
-퍼억
11미터짜리 거인의 머리통이 오늘 두 번째 꿀밤을 맞았다.
그리고 보스턴의 좌익수인 요시다 마사타카가 그린 몬스터 상단을 두들기고 튀어나오는 공을 정말 멋지게 캐치했다.
최수원의 발이 2루를 밟았다.
3루 코치의 신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없었다. 아마도 이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도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록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록의 당사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멋들어진 2루타!! 힛 포더 사이클!! 최수원 선수가 펜웨이파크에서 힛 포더 사이클을 기록합니다!!]
***
1941년은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해였다. 당시 실력은 출중했으나 연봉 협상 때마다 잡음을 일으켰던 조 디마지오는 ‘56걸음의 위대한 여정’을 통하여 마침내 ‘위대한 조 디마지오’라는 산티아고의 극찬에 어울리는 길을 걷는다.
또한, 그의 라이벌인 테드 윌리엄스 역시 메이저리그 역사 최후의 4할을 기록하는 것으로 1941년을 더욱 뜨겁게 달구는 데 일조했다.
(중략)
본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이 이뤄지는데도 고작 86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워진지 87년이나 된 불멸의 기록도 이제 슬슬 깨질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위대한 루스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 마찬가지로 태평양을 건너 온 청년이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태평양을 건너 온 저 젊은 청년, 아니 소년이야말로 그 위대한 1941년의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가능성을 지닌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만약 본 필자에게 그 소년이 두 가지 기록 중 무엇을 경신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