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304화 (304/305)

304화. 저길 봐라(13)

9년 3억2천4백만 달러.

게릿 콜이 지난 2020년에 양키스에게 받았던 성적표였다.

201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번.

2013년 데뷔.

그리고 7년간 두 개의 팀에서 1195이닝 ERA 3.22.

3개의 올스타와 사이영 2, 4, 5위를 기록했던 28세의 투수에게 주어진 성적표는 그처럼 대단했다.

그리고 2028년 현재.

지난 8년 동안 1437.1이닝에 ERA 3.30.

5개의 올스타와 사이영 2위 2개. 4위, 5위, 7위, 9위를 기록했던 37세의 투수에게 주어질 성적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물론 게릿 콜은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올해 하기에 따라서.’

모든 FA들에게 통용되는 말이지만 현재의 폼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는 노장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이야기다.

아마도 2년 혹은 3년.

이왕이면 이미 터를 잡은 뉴욕 양키스에서 커리어를 끝내고 싶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지금 자신의 등에 새겨진 45라는 숫자를 영원히 자신의 차례에서 끝내고 싶다는 욕심 정도다.

쉽게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양키스의 120년 역사에서도 선수와 지도자를 통틀어 영구결번은 고작 25명뿐이다.

게릿 콜의 공이 보스턴의 타자들을 압박했다.

레드삭스의 1번 타자는 알렉스 버두고. 그리고 2번 타자는 트레버 스토리였다. 두 선수 모두 기량 하락으로 인하여 현재 이름값과 돈값을 못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름값’과 ‘돈값’에 비해서 못하다는 평가다. 분명 알렉스 버두고에서 트레버 스토리로 이어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리드오프 콤비는 리그에 손꼽히는 조합이었다.

-따악!!!

내야 땅볼 아웃.

그리고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그리고 3번 타자인 라파엘 데버스. 무려 MVP 2위를 2번이나 기록한 MVP‘급’ 타자.

앞선 두 타자를 속구 위주로 윽박지르던 게릿 콜의 공이 조금 더 신중해졌다. 자칫하면 그대로 우측 담장 너머로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악!!!!

라파엘 데버스가 바깥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서클체인지업에 억지로 방망이를 가져다 댔다. 결과는 중견수 뜬공 아웃.

[1회 말. 게릿 콜이 삼자범퇴로 보스터의 공격을 틀어막았습니다.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 보이네요.]

***

경기가 빠르게 흘러갔다.

확실히 보스턴이나 양키스 정도 되는 팀의 2선발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우리 팀의 타선이 지금 타격감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추가점이 통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경기의 템포는 상당히 빨랐는데 사실 빠른 템포는 내가 선발로 나갈 때는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좀 쉬어가고 싶은 타이밍에도 어김없이 나가야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처럼 지명타자로 출장한 날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다.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내가 회귀하기 전 일루수로 뛰다가 지명 타자로 뛰게 됐을 때······(중략)······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처럼 템포가 빨라지면 내 감각을 유지하는 데도 제법 도움이 된다.

[3회 초.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 첫 3루타를 기록했던 최수원 선수!! 과연 이번 타석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태너 하우크의 피칭이 상당히 정교했다.

예전에는 커맨드, 아니 컨트롤 자체가 약점인 투수였다는데 놀라게도 그걸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종종 구속은 재능, 제구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제구를 위한 감각 역시 결국은 재능의 영역이다. 물론 노력 역시 중요는 하다.

하지만 그건 원래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재능을 타고 난 녀석도 100마일을 던지기 위해 노력해야지만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제구 역시 원래 그런 재능을 타고 나야지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데뷔했을 때 90마일 던지던 녀석이 꾸준한 교정과 벌크업으로 100마일을 던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컨트롤 자체가 날리던 녀석이 컨트롤을 넘어서 커맨드를 잡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지금 저 태너 하우크가 보여주는 피칭은 드래프트 때 원래 90마일 던지던 녀석이 마이너에서 몇 년 구르면서 어느새 100마일을 던지게 된 거랑 비슷한 일이다.

-따악!!!

[볼카운트 2-2. 최수원이 보더 라인에 걸쳐 들어오는 공을 걷어 냅니다. 파울!!]

[와, 쉽지 않습니다. 태너 하우크 선수 공이 너무 좋네요. 보더 라인에 정말 절묘하게 걸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자, 일곱 번째!!]

날아오는 공.

강하게 왼발을 내디뎠다. 근데 뭔가 느낌이 싸했다. 볼카운트는 2-2. 여기서는 원래 비스무레하면 그냥 휘두르고 보는 게 정답이다. 한국 야구 팬들은 종종 헛스윙 삼진을 가장 큰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진짜 굴욕은 루킹 삼진이니까.

하지만 세상이 어디 정답만으로 돌아간다던가.

-뻐어엉!!!

멈춰선 방망이.

그리고 바깥으로 크게 휘어나간 89마일의 슬라이더.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포수, 심판에게 스윙 여부를 묻습니다만. 체크스윙 판정입니다. 이제 볼카운트 3-2. 풀카운트.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 놓고 태너 하우크가 여덟 번째 공을 준비합니다.]

[방금 이걸 참아낸 건 정말 대단한 인내력이었습니다. 오늘 태너 하우크 선수의 슬라이더가 정말 좋거든요.]

행운?

아니, 천만에. 난 이 감각을 ‘실력’이라고 부른다.

여덟 번째.

녀석이 와인드업했다.

사실 슬슬 이제 이럴 시기가 찾아오긴 찾아왔다. 이렇게 미친 듯이 빠따를 휘두르는데 설사 볼넷을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공을 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당연하다.

앞서와 거의 비슷한 코스.

완벽하게 같은 폼에서 뽑혀 나온 공이었다.

하지만 이거 느낌이 속구······.

-따악!!!!

[최수원 쳤습니다!!]

[밀린 타구!! 1, 2루간!! 트레버 스토리!!]

[아, 빠져 나갑니다!! 그 사이 최수원은 1루에!!]

“세이프!!”

[최수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를 억지로 밀어쳐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사실 존에서 좀 빠져나가는 공이었거든요. 아마 히팅 포인트를 조금만 더 뒤로 뒀더라면 이건 절대 못 치는 공이었을 거에요. 근데 이거 보시면 방망이 멈추는 게 늦은 걸 깨닫는 순간 그대로 방망이를 더 강하게 돌려서 히팅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가져가 버렸어요. 근데 이런 거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진짜 최수원 선수. 타고난 감각이 엄청나다고밖에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와, 식겁했다.

아니, 진짜 속구인 줄 알고 휘둘렀는데 슬라이더라니. 만약 공이 조금만 더 밖으로 빠졌더라면 이건 절대 못 칠 공이었다.

이건 운이 좀 좋았다.

[아, 저는 이 지점에서 트레버 스토리 선수의 수비가 좀 많이 아쉽습니다. 이 선수가 한때 정말 리그를 호령하던 유격수였던 걸 생각해보면 참······.]

[트레버 스토리 선수도 이제 나이가 서른다섯이죠?]

[네, 작년에는 부진했던 수비 지표도 많이 개선됐었거든요. 덕분에 보스턴도 28년의 티옵션을 행사했고요. 그런데 참······. 올해는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운이 좋네?”

“실력이지.”

1루를 지키고 있던 트리스턴 카사스가 말을 걸어왔다.

“백강호랑은 연락해봤어?”

“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연락을 했는데 그 형도 요즘 팀 성적이 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연락이 잘 안되더라고.”

“아, 그래?”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사이 3번 타자인 타일러 비트가 태너 하우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저 녀석 제법 좋은 타자다. 원래 타격감이라는 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건데 저렇게 타격감이 별로일 때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서 하나라도 툭툭 건져내는 것이 시즌 성적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물론 그렇다고 그게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헛스윙 삼진!! 3회 초 잔루 1루. 양키스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점수는 여전히 1:0. 양키스가 1점을 앞서고 있습니다.]

***

“아!!! 진짜!!! 빡치네!!”

“뭐가? 수원이는 안타 쳤고 보스턴은 점수 안줬으니까 딱 네가 원하는 베스트 상황 아니야?”

“아니, 그건 그런데!! 어차피 안타 내주고, 삼진 잡을 꺼 뭣하러 이렇게 투구수를 낭비하냐고. 지금 수원이랑 타일러 비트 저 둘한테만 공을 거의 20개를 던졌잖아.”

작년부터 친구를 따라서 야구에 입문한 유학생 이지은씨는 친구인 박주희의 분노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주희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넌 경기에 크게 지면 크게 졌다고 화를 내고, 아깝게 지면 아깝게 졌다고 화를 내고, 아슬아슬하게 이기면 쉽게 이길 거 어렵게 이겼다고 화를 내고, 심지어 쉽게 이기면 쓸데 없이 크게 낸 그 점수 어제랑 좀 나눠서 내지!! 하면서 화를 내잖아.”

“어. 그렇지? 전부 다 빡치는 상황이잖아.”

“아니······. 그러면 야구 보면서 대체 행복한 건 언제야?”

“행복? 지은아. 야구라는 건 원래 행복하려고 보는 게 아니야. 타자는 10번 중에서 7번을 지잖아? 그러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10번 중에서 7번을 빡치는 거거든. 거기에 투수가 볼질하면 빡치고, 안타 맞으면 빡치고, 홈런 맞으면 더 크게 빡치고. 그냥 원래 야구라는 게 빡치려고 보는 거야.”

“······.”

-부웅!!!

“스트라잌!! 아웃!!!”

“저, 저 요시다 저 쪽발이 새끼 진짜. 더럽게 못 하네. 방망이 그따위로 휘두를 거면 니네 나라로 얼른 꺼져 버려!!”

“주희야!!”

3회 말

보스턴의 공격이 끝났다.

***

“그러니까 조 디마지오랑 테드 윌리엄스를 동시에 활용하자고?”

“네.”

제니퍼 강이 매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타니가 비교되던 루스만큼 임팩트가 있으려면 그 정도 이름은 나와야죠.”

베이브 루스는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남자다.

1920년 그보다 홈런을 많이 친 팀은 그 자신이 소속된 뉴욕 양키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오직 두 팀뿐이었다. 그의 54홈런은 야구라는 종목을 데드 볼 시대와 라이브 볼 시대로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됐다.

그렇다면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는 어떠한가.

그 시대.

국기(National Sports)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렸던 야구에서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이름들이다.

모두가 사랑했던 뉴욕 양키스의 슈퍼스타 조 디마지오.

모두가 싫어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재수탱이 테드 윌리엄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루스에 비견되는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들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었다.

56경기 연속 안타.

마지막 4할 타자.

공교롭게도 두 기록 모두 1941년에 기록되었으며 이 기록들은 87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빨간 양말 놈들이 광분할 거야.”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최수원 선수가 지금 기록이 어떻게 되지?”

“방금 안타 하나 추가해서 39타석 34타수 18안타 0.529/0.590/1.324 기록 중이네요.”

“고작 11경기 연속 안타 가지고 조 디마지오 소환하는 거 비웃지 않을까?”

“시즌 16경기 만에 테드 윌리엄스 소환하는 것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죠. 근데 아시잖아요. 그런 노이즈도 결국 실력만 있으면 다 인기로 전환되는 거.”

“······.”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진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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