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저길 봐라(11)
양키스 숙명의 라이벌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 쉽다.
보스턴 레드삭스.
뭐, 어딜 가나 항상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고 따라서 보스턴 레드삭스 따위는 양키스의 상대가 안 된다느니. 그걸 라이벌로 볼 수 없다느니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당장 레드삭스가 원정 왔을 때 양키 스타디움의 푯값이나 양키스가 원정 왔을 때 펜웨이파크의 푯값만 보더라도 두 팀이 가장 강력한 라이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라이벌리는 야구라는 종목을 넘어서 미국 스포츠 사상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유명한 라이벌리답게 사람들의 관심도 역시 엄청나다. 실제로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ESPN의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도 양키스 보스턴 경기가 일요일에 있는 날이면 그 중요도고 뭐고 따지지 않고 일단 편성한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다.
특히 작년의 경우 무려 3번이나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를 편성했는데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자체가 총 25번이었다는 점.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일요일 경기가 총 3번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들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에이, 설마. 그건 좀 거짓말 아니야?”
“진짜라니까.”“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모임을 함께 하는 사촌이 네가 FA에서 양키스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대화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돼?”
“놀랍게도 보스턴 팬 놈들의 광기는 그걸 가능케 한다니까?”
보스턴에 가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트로이 존슨의 특이한 사촌으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볼 때도 그건 좀 무리수가 있는 말이었어. 그냥 트로이 너한테 뭔가 불만이 있는 거겠지.”
“아니, 진짜라니까 그러네?”
“근데 트로이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로 보스턴에 가면 좀 조심하긴 해야해. 우리가 경기 진 날은 괜찮지만 이긴 날은 특히 더. 난 호텔 근처에 샌드위치 사러 갔었거든. 뭐 유니폼 입고 나간 것도 아닌데 사장이 양키스 놈들한테는 안 판다고 쫓아내더라니까.”
“아, 그거 웨일버거 말하는 거지? 거기 사장이 완전 보스턴 골수 팬이잖아. 그 양반 그거 톰 브래디가 신문에 양키스 모자 쓴 거 실린 이후로 톰 브래디한테도 햄버거 안 팔았을걸?”
“톰 브래디면 패츠의 그 톰 브래디요? 미식축구 GOAT? 보스턴 최고의 슈퍼스타. 그 톰 브래디? 해설로 10년 375mil짜리 계약 따냈다는?”
“어. 너 묘하게 톰 브래디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다? 외국은 미식축구 인기 거의 없는 거 아니야?”
“아, 그냥 개인적으로 좀 관심이 있어서요.”
1980년대 이후로 야구는 미식축구에게 No.1 스포츠 자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톰 브래디는 그런 미식축구에서 야구의 루스나 농구의 조던 정도 취급 받는 양반이다. 이게 과장이 아니다. 2020년 41세 시즌에 마지막 우승을 해낸 직후에는 거의 모든 매체에서 톰 브래디의 업적이 조던을 넘어섰다고 떠들어댔었다. 물론 현역 버프 다 빠진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너 보스턴에서는 진짜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마라. 잘못하다가는 총 맞을 수도 있어.”
볼피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경고했다.
역시 천조국. 기껏해야 소주병이나 던지는 한국과 달리 수틀리면 자동소총을 들고나오는 나라다운 경고다······. 라고 하기에 이거 좀 너무 티가 났다.
나의 주변에 잔뜩 몰려온 동료들.
몇몇의 얼굴에 보이는 은근한 기대감.
무엇보다 보스턴이 위치한 매사추세츠주는 미국 내에서도 총기 규제가 가장 빡센 곳 중 하나로 공공장소 총기 휴대 금지 정도의 말랑한 룰을 넘어서 무려 자동화기의 민간 소지가 불법이라서 기껏해야 권총이나 엽총, 산탄총, 볼트액션 소총 정도만 구매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나를 놀리려는 거다. 솔직히 너무 뻔하기는 했는데 일단은 좀 어울려줄까?
“헤이,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루키 겁먹잖아. 아시아 쪽 나라들은 개인의 총기 소지가 불법이라서 안전한 편이야. 그래서 그런 말을 좀 무서워한단 말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총이 없으면 더 위험한 거 아니야?”
“바보야. 살상용 무기가 민간에 막 나도는 게 훨씬 위험하지. 어떻게 총이 없는 게 더 위험하냐?”
“칼 든 범죄자가 달려들면? 우리 같이 크고 힘 쎈 사람들이야 괜찮다지만 여자나 젊은 애들은 총 없이 그걸 어떻게 방어해?”
게릿 콜과 도밍고 로드리게스였다.
내일 선발 등판할 녀석과 오늘 선발 등판했던 녀석. 우리 팀의 두 에이스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이건 총기 규제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는 그냥 서로가 서로를 싫어해서 생기는 일이다.
안 그래도 내일 등판이라 한껏 예민한 녀석과 온르 경기 패배해서 기분 왕창 안 좋은 놈의 말싸움이 조금 격해지려는 찰나.
총 맞는다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던 볼피가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물론 지금 저 둘을 직접 말리는 건 지금은 IL에 올라있는 저지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관계로 볼피가 선택한 것은 지금 이게 나를 놀리기 위한 ‘쇼’였음을 상기시킴으로써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짜잔!! 서프라이즈!! 수원. 놀랬지? 하지만 너무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어머!! 깜짝아!! 뭐야? 이게 다 장난이었던 거야?”
“뭐야. 수원 너 설마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야?”
“당연하지. 아무리 미국이라고 그래도. 메이저리거가 경기 좀 이겼다고 총 맞는 게 말이 되겠어?”
사람들의 주의가 다시 우리 쪽으로 몰리자 게릿 콜과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다툼도 좀 잦아들었다. 볼피 이 녀석. 네가 고생이 참 많다. 하지만 원래 참 리더라는 건 이런 환경에서 탄생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파이팅!!
***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보스턴은 그래도 뉴욕에서 상당히 가까웠던 관계로 시간은 이제 겨우 오전 12시 20분이다.
-똑똑
응? 누구지?
문을 열어보니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서 있었다.
“잠깐 괜찮아?”
“어. 바로 내려갈까?”
“바는 무슨. 어차피 술도 못 마시면서. 게다가 나도 오늘 등판했었잖아.”
“맥주는 괜찮지 않아?”
“이긴 날은. 진 날에는 안 마셔. 출출하면 룸 서비스로 뭐 좀 시키던지.”
“아니, 자기 2시간 전부터는 뭐 안 먹는 타입이라서.”
“좋은 습관이네.”
야심한 새벽.
호텔 방에 시커먼 남자 둘이 생수 한 병씩을 쥐고 마주했다.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그냥. 좀 답답하기도 하고. 할 말도 있고.”
“오늘 경기 진 것 때문에?”
“빌어먹을 새끼들. 대체 경기를 할 생각이 있긴 한 건지. 8이닝 1실점 패배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조지 로드리게스 그 녀석이 워낙에 잘 던졌잖아.”
“그래, 훌륭했지. 근데 솔직히 말해봐. 수원 네가 오늘 경기에 출장했어도 결과가 똑같았을까?”
“그야 모르는 일이지.”
도밍고가 제법 긴 불만을 늘어놓았다.
사실 ‘마린스’를 경험해본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녀석이 양키스의 타선에 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너무 배부른 소리였다. 하지만 듣다보니 이게 단순히 양키스의 타선에 대한 불만만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좀 들었다.
“그러니까 게릿 콜 경기에는 내가 꼬박꼬박 출장하는데 네 경기에는 출장하지 않는 게 불만이다. 뭐 그런 소리잖아.”
얼굴이 벌개진 도밍고가 항변했다.
“아니!! 꼭 그런 말이 아니라!!”
근데 정확하게 그런 말이 맞았다.
물론 녀석이 대화 내내 게릿 콜에 대한 불만만을 늘어놓은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내가 진작에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쫓았을 테니까.
“너 지난 등판에서 커브 요령 좀 익힌 것 같던데.”
“어, 팔꿈치를 좀 이렇게 하니까.”
“대단한데? 보통 그런 짓 하면 폭투가 되거나 행잉이 되는데. 확실히 너 커브에 감각이 있네.”
“아, 그래?”
“근데 그거 투구 폼이랑 해서 좀 정밀하게 점검받아봐. 팔꿈치나 손목에 안 좋은 자세일 수도 있어. 네가 다니는 피칭랩 있잖아. 아니면 내가 하나 소개 해줄까?”
“아냐. 괜찮아.”
내 커브에 대한 이야기부터 녀석이 공을 던지는 요령에 관한 이야기들.
“체인지업? 아무래도 이건 요령도 요령인데 연습이 좀 많이 필요하지. 이게 마음이 좀 급하면 힘을 덜 주려고 스윙이 늦어질 수 있거든. 그러면 진짜 망하는 거야. 중지랑 약지로 공을 이렇게 채는 느낌으로. 엄지랑 검지 소지는 공을 받쳐준다는 느낌만 주고.”
이게 진짜 도움이 됐느냐 하면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 툴툴거리는 이 녀석이 그래도 피칭에 있어서는 정말 진심이구나 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 자야겠다. 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
“벌써? 이제 고작 2시잖아.”
“이봐, 도밍고. 넌 내일 쉬지만 난 스타팅이라고.”
“그게 문제라니까!!!”
“그래그래, 그 문제는 감독한테 가서 따지고. 나 지금 열 경기 연속 안타 기록 중인 거 알지? 혹시라도 내일 안타 기록 깨지면 언론 인터뷰에서 밤에 제 방으로 찾아와 고성방가를 질러댄 도밍고 로드리게스 때문입니다. 라고 할 거야.”
새벽 2시 20분.
도밍고 녀석이 마침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1차전.
펜웨이파크에 가득찬 보스턴 팬들의 시선에 적대감이 그득했다. 보통 어느 구장을 가건 우리 양키스의 핀 스트라이프는 일정 숫자가 있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과장 하나 없이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핀 스트라이프를 찾을 수가 없었다.
[뉴욕 양키스 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즌 두 번째 시리즈!! 1차전 경기가 지금 시작됐습니다.]
[오늘 보스턴의 선발 투수는 태너 하우크. 지난 시리즈에서 5이닝 4실점으로 부진했었지만 그 이후 성적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두 경기 14이닝 동안 고작 1실점을 기록했어요.]
[타석에는 1번 타자인 앤서니 볼피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난 시리즈에서 태너 하우크 선수를 상대로 2타수 1안타 1볼넷을 기록 했었습니다.]
태너 하우크.
우완 사이드암에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공 네 개만에 헛스윙 삼진.
앤서니 볼피가 미간을 찌푸리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태너 하우크의 공도 공이지만 요즘 앤서니 녀석의 빠따가 슬슬 개점휴업에 들어갈 기세인 게 눈에 보인다.
근데 뭐 그도 그럴만한 것이 본인 플레이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판국에 프랜차이즈인 애런 저지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하고 있으니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27살. 아직 베테랑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나이다.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2번 타자 최수원이 올라옵니다.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이번 시즌 최고의 유망주. 10경기 연속 안타기록은 과연 11경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초구.
살짝 안일한 바깥쪽 공.
-따악!!!
한껏 잡아당긴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손맛은 나쁘지 않았다. 어지간한 구장이라면 아마 담장을 넘길 수도 있을 감각.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달렸다.
이곳은 팬웨이파크.
네 번째 외야수가 좌측 담장을 지키는 구장이기 때문이었다.
-퍼억
11미터의 녹색장벽.
그린몬스터가 나의 타구를 가로막았다.
[최수원 2루 지나 3루까지!! 3루에서!!]
“세이프!!!”
시즌 첫 번째 3루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