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저길 봐라(9)
아니, 물론 구속이 102.3마일이 나왔으니 165km/h짜리 강속구가 아니긴 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64.7km/h짜리 몸쪽 강속구를 그대로 잡아 당겨서 외야 좌측 3층에다가 그냥 꽂아버린다고?
이게 대체 사람 새끼인가?
시티필드 외야 전공판 아래의 빌어먹을 빨간 사과는 또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경기장 전체가 나한테 메롱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언짢다.
[알렉산더 맥도웰의 커리어 아홉 번째 멀티 홈런!! 시즌 10호 홈런입니다!! 와, 4월. 고작 14경기 만에 10홈런이라니. 이거 신기록 아닌가요?]
[신기록은 아닙니다만 루이스 곤잘레스 선수의 2001년 기록과 알버트 푸홀스 선수의 2006년 기록이 14경기에 10홈런이니 이제 공동 1등이 되겠네요.]
[대단합니다. 알렉산더 맥도웰!! 데뷔 2년 차. 이제 고작 20살밖에 되지 않은 선수가 역사상 가장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적립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데뷔 직후 연속 경기 안타를 실시간으로 경신 중인 선수죠.]
알렉스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무뚝뚝한 표정의 덩치가 타석에 들어왔다.
[3회 말. 점수는 6:3.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앞선 첫 번째 타석에서 초구 2루수 정면 내야 땅볼로 물러났던 제레미아 와일드가 타석에 올라옵니다.]
살짝 치밀어 오른 짜증을 담아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빠른 공.
-뻐엉!!!
너무 많이 빠졌다.
그리고 두 번째.
-뻐엉!!!
[2구 연속 크게 빠지는 공!! 투수 살짝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네요. 이건 덕아웃에서 끊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양키스 벤치 움직입니다. 제프 클라크 감독이 직접 마운드에 올라가네요.]
특별히 흥분하거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2구 연속 빠지는 공이 나와서 그런지 제프 클라크 감독이 직접 마운드를 방문했다.
“헤이, 수원. 괜찮아? 일단 숨 좀 크게 들이쉬자고.”
“괜찮습니다. 그냥 힘이 좀 많이 들어갔네요.”
“그래, 내가 봐도 충분히 괜찮아 보여. 사실 맥도웰에게 던졌던 공도 상당히 괜찮은 공이었고. 하지만 너도 상당히 괜찮은 공을 두들겨서 저기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었잖아.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도찐 개찐이지. 안 그래?”
“그런가요?”
“그래, 어차피 점수도 6:3이야. 같은 홈런 두 방이지만 수원 너는 4타점이고 맥도웰은 3타점밖에 안 된다고. 게다가 모든 타자가 다 수원 너나 맥도웰 같지는 않아. 그러니까 침착하게 가자고. 오케이?”
“오케이.”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뭔가 내가 흥분을 하긴 했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뭔가 조금 몸이 릴렉스 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마지막으로 호세가 한 마디를 보탰다.
“여차하면 야수들 믿고 그냥 던져버려. 오늘 애들 컨디션도 괜찮아 보이는데.”
“알겠어.”
볼카운트는 2-0.
타석에 선 제레미아 와일드가 자세를 잡았다.
복판?
아, 물론 내가 복판에 던지겠다는 뜻이 아니다.
조금 전에 내가 3-0에서 덕아웃이 방문한 다음 투수가 복판에 공을 던지리라 예상했던 게 생각이 난 거다.
세 번째.
한가운데 적절한 커브.
제레미아 와일드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노리던 공이 정확하게 들어가서 노리던 대로 헛스윙을 끌어내는 짜릿함.
네 번째.
또 다시 커브.
하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아예 땅에 패대기 치겠다는 마음으로 공을 쥔 손에 최대한 힘을 더했다.
87.1마일.
제레미아 와일드의 방망이가 또 한 번 허공을 휘저었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최수원이 원바운드 되는 낙차 큰 커브로 제레미아 와일드의 방망이를 끌어냅니다. 2구 연속 커브!! 볼카운트는 이제 2:2.]
그리고 다섯 번째.
바깥쪽 높은 코스.
가장 빠른 속구.
몸쪽 높은 공도 타석에 가까이 다가서면 친구고 뭐고 다 맞춰버린다는 각오로 던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의 무의식이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깥 코스 높은 공이라면 몸에 맞을 우려도 없고 정말 걱정 없이 전력을 다하여 뿌릴 수 있는 공이다.
제레미아 와일드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부우웅!!!
과장 조금 보태서 배트에서 거의 공 반개 정도 차이 나게 높게 들어가는 102.1마일의 속구.
어? 잠깐만.
102.1마일?
1번 타자인 후안 로메로를 상대로 몸쪽에 102.7마일을 던졌는데 바깥쪽에 마음 놓고 최대치로 던진게 102.1마일이라고? 심지어 알렉스한테 몸에 맞아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던진 몸쪽 높은 공도 102.3마일이었는데?
“스트라잌!! 아웃!!!”
심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쪽 공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나의 무의식 이슈는 일단 제쳐두고 아무튼 삼진 아웃. 체감하기로 더럽게 길었던 3회 말 수비 이닝이 끝났다.
[최수원의 경기 네 번째 삼진!! 상당히 많이 빠지는 공이었는데 제레미아 선수의 방망이가 끌려 나왔습니다.]
[히트맵으로만 보면 이런 높은 공에 대체 왜 방망이가 나왔나 싶겠습니다만 사실 타자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입니다.]
[지터 해설위원께서 보시기에는 그런가요?]
[네, 워낙에 구위가 좋았어요. 보통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를 때는 경험적으로 떨어지는 높이를 예측해서 방망이를 휘두르거든요. 평균적으로 공이 그릴 궤적을 예상하는 거죠. 그런데 회전수가 좋은 공은 훨씬 높은 곳으로 들어온단 말이죠. 심지어 직전에 최수원 선수의 커브만 두 개를 연속으로 본 상황이기도 했고. 볼카운트도 2-2였으니 이건 휘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뭐 그렇게 봐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
-부웅!!!!
“스트라잌!! 아웃!!!”
[최수원. 헛스윙 삼진!! 라울 히메네즈가 최수원에게 삼진을 뽑아냅니다.]
[아, 이전 타석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던 우리 최수원 선수. 아쉬운 삼진이네요.]
[앞선 두 번째 공이 파울이 됐던 게 좀 아쉽습니다.]
[그나저나 라울 히메네즈 선수면 사실 NPB에서 상당히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빅리그에서 이만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늘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죠. 2회 2아웃에 등판해서 지금 2.1이닝 동안 무실점. 삼진을 무려 여섯 개를 잡았거든요. 아무래도 양키스의 타자들이 생소한 포크볼에 좀 당황을 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일본 출신의 투수들 가운데 포크볼을 주무기로 하는 투수들이 좀 많죠?]
[네, KBO가 슬라이더라면 NPB는 포크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다만 요새는 NPB에서도 부상 때문에 점점 스플리터로 갈아타는 추세인데. 라울 히메네즈 선수. 아무래도 포크볼이 손에 상당히 잘 맞았던 모양입니다.]
젠장.
라울 히메네즈라고 했던가? 일단 결정구는 스플리터가 아니라 포크볼이 맞다. 근데 문제는 얘 스플리터도 던진다.
떨어지는 공이 높이 차이에 속도 차이를 두고 들어오는데 미리 받아 둔 자료도 별것 없어서 상당히 까다롭다. 선발로 시즌을 시작하지 못한 걸 보면 분명 뭔가 약점이 있긴 할 텐데······.
4회 말.
두 번째 타순이라서 그런가? 메츠의 타자들이 내 공에 슬슬 방망이를 갖다 대긴 갖다 댔다. 하지만 제대로 된 타구는 고작 하나. 이번에도 추가점 없이 삼진 하나에 피안타 하나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6:3의 점수가 쉽게 깨지지 않았다.
5회 초 무득점.
5회 말 깔끔한 삼자범퇴.
그리고 6회 초.
-따악!!!
원아웃 상황.
8번 타자인 우리 2루수 트로이 존슨이 라울 히메네즈의 공을 두들겼다.
[쭉쭉 뻗어나가는 타구!! 우측 담장을 직격합니다!!]
[우익수 제임스 스톤!! 빠르게 공을 쫓아 봅니다만!! 아, 시티 필드의 우측 담장맞고 굴절된 타구!! 지금 경기를 보고 계신 시청자분들께서도 보이시겠지만, 시티필드의 우측 담장. 이게 형태가 상당히 기괴하거든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이 트로이 존슨 1루 지나 2루로!! 빠릅니다!! 매우 빨라요!!]
트로이 존슨이 멈추지 않았다.
2루 지나서 3루까지.
“세이프!!!”
뜬금없는 3루타.
트로이 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저거 공이 엄청 가볍나 본데?”
“그러게.”
물론 트로이가 발이 빠른 주자고 시티 필드의 우측 담장이 좀 기괴한 형태이긴 했지만, 애초에 트로이 녀석 장타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타자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타구가 담장까지 날아간 것 자체가 어쩌면 라울 히메네즈의 약점이 아닐까?
-따악!!!
호세 트레비뇨의 1타점 외야 희생 플라이.
트로이 존슨이 홈으로 들어왔다.
점수는 이제 7:3.
“방금 거의 안 떨어졌지?”
“어.”
공이 가벼운 게 아니었다.
그냥 이닝 소화력 자체가 떨어지는 거다.
“근데 일본에서 선발로 뛰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그럴걸? 한 170이닝? 180이닝? 뭐 그쯤 던졌다는 거로 본 것 같은데.”
“근데 왜 벌써 지친 거지?”
앤서니 볼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냥 저 스플리터나 포크볼이 악력을 좀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일본에서는 결정구로만 써서 좀 오래 던진 거고. 여기서는 거의 저거 위주로 피칭을 가져가니까 오래 던지기 힘든 거고.”
“아······.”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드문 일도 아니다.
원래 하위리그에서 상위리그로 와서 성적을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뭔가를 포기하고,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불가능에 가깝다. 이 경우는 경쟁력 없는 포심의 비중을 줄이는 만큼 이닝 소화력이 확 떨어진 것이겠지.
[메츠의 덕아웃이 움직이네요. 투수 교체입니다.]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이번 이닝까지 맡겨봄직도 한데. 메츠가 상당히 발 빠르게 움직이네요.]
[6회에 4점 차이. 상당히 점수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메츠의 타선도 워낙에 강타선이니까요. 게다가 오늘 최수원 선수도 상당히 잘 막아주고 있긴 합니다만 다음 이닝 선두 타자가 앞서 홈런만 두 개를 기록한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거든요. 오늘 경기 어떻게든 가져가겠다. 뭐 그런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 하필 딱 내 차례에 또 이러네.”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나가봐.”
공 다섯 개.
볼카운트는 2-2.
바뀐 투수의 공을 나름대로 지켜볼 만큼 지켜본 볼피가 여섯 번째 공에 크게 스윙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공수교대.
6회 말.
“후······.”
마운드 위에서 모자를 괜히 한 번 고쳐 썼다.
세 번째 만남.
투수와 타자의 승부에서 안타나 범타는 본래 판정승, 판정패 정도다. 진짜 K.O라고 볼 수 있는 건 홈런 혹은 삼진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저 녀석에게 오늘 벌써 두 번이나 녹아웃을 당한 셈이다.
하지만 원래 야구는 삼세번이라고 그랬다.
물론 이게 원래는 타자가 세 번 중에 한 번만 안타를 쳐도 그건 좋은 타자라는 다분히 타자에게 희망적인 메시지지만 오늘 저 미친 타자를 상대로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6회 말. 타석에는 선두 타자 알렉산더 맥도웰.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모두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 최수원 선수의 피칭도 상당히 훌륭한 편인데. 하······. 쉽지 않네요.]
[작년 내셔널리그의 신인왕이자 지금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빠른 홈런 페이스를 기록하고 있는 타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수원 선수의 라이벌로 유명한데, 이 선수 고등학교도 안 가고 바로 검정고시로 전문대학에 진학해서 남들보다 2년이나 빨리 드래프트 된 선수거든요. 아마추어 시절에 망해도 MVP 컨텐더급이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지금 그 평가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렉스가 타석에 가까이 섰다.
꽉 다문 입술.
단단한 의지.
그래, 고작 홈런 두 방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 그 말이지?
[투수 와인드업.]
힘은 충분했다.
정말 할머니라도 바짝 붙어서면 맞춰버리겠다는 패륜적인 마인드로.
나의 강속구가 몸쪽 높은 코스를 깊숙하게 찔러 들어갔다.
-뻐어어어엉!!!!
그래, 이걸로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난 몸쪽 공을 던지는데 본능적으로 생기는 심리적 브레이크 이런 거 없나 보다.
103.1마일.
그러니까 165.9km/h
살짝 과장 보태면 166km/h.
내가 던진 모든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 조금 전까지 알렉스의 어깨가 있던 위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연히 판정은 볼.
[맙소사!! 최수원!! 6회에 103마일!! 그러니까 구속이 166km/h가 찍혔습니다!! 본인의 신기록!! 아니, 이 선수 대체 지치지도 않는 건가요?]
[와, 근데 이건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가 잘 피하긴 했습니다만 정말 살짝 위험할 수도 있었어요. 166km/h짜리 공이라면 정말 어디 하나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거든요.]
알렉스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타석에 다시 섰다.
조금 전에 섰던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바로 그 위치였다.
‘이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