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저길 봐라(8)
월요일 이른 아침.
미리 맞춰둔 여러 개의 알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눈을 뜬 시간은 8시 30분이었다. 물론 이것만 하더라도 평소보다 3시간 가깝게 이른 시간이다. 애초에 야구 선수의 하루 일과 자체가 저녁에 이뤄지는 경기를 기준으로 짜이는 만큼, 일과시간 자체가 뒤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을 뜨자마자 안경을 챙겨 쓰고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포털에서 중계해주는 경기에 접속하자마자 그 화면에 비친 것은 실로 거대한 홈런이었다. 그냥 한눈에 봐도담장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이 시티필드의 전광판을 때렸다.
[2회 초!! 최수원 선수의 쓰리런!!! 시즌 일곱 번째 홈런포입니다!!]
[최수원 선수의 경기 두 번째 홈런에 힘입어 점수는 이제 5:1.]
[메이저리그 첫 번째 멀티 홈런을 연타석 홈런으로 기록을 하네요. 월요일 아침. 그야말로 월요병을 한 방에 날려주는 최수원 선수의 시원한 활약입니다.]
포털의 동시 접속자 수는 이미 200만을 돌파한 지 오래다. 평일 아침 경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숫자였다.
─마린스왕조: 아니, 우리 선수가 대체 왜 미국에서 뛰고 있는 거죠?
─고촌치킨: 프로야구 팬 90%는 마린스의 대승적 결단을 지지합니다.
─집팔아도못사는검: 마린스 요즘 최수원 없어도 어차피 잘 나가잖아.
─올해는다르다: 응, 그래밨자 DTD.
─마린스는어떻게: 와, 근데 MLB에서 KBO에서 찍던 타격 성적 그대로 찍는 거 실화임? 솔직히 이 정도면 대승적이고 뭐고. 야구라는 종목을 위해서 그냥 최수원은 미국에서 뛰는 게 맞다.
너무 엄청나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내가 이런 녀석을 상대로 ‘경쟁’을 했었다니. 지금 자신이 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때의 그 치기 어렸던 경쟁심 덕분이리라.
고작 3년.
이제는 그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저 멀리 떨어져 버린 후배가 시티필드의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점심에는 오래간만에 진우 만나서 밥이나 한 끼 해야겠다.”
프로야구 2군.
안병영은 여전히 야구를 하고 있었다.
***
그라운드를 가볍게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
“복판에 올 거 어떻게 알았냐고.”
마일즈 터너라고 했던가?
메츠의 포수 녀석이 나에게 물었다.
“그냥. 스트레이트로 볼 세 개 던졌고. 덕아웃에서는 이런 형태의 볼넷은 원하는 거 같지 않고. 투수 공 자체는 꽤 위력적이고. 그러니까 될 대로 대라 하고 그냥 집어 던질 것 같더라고.”
“젠장······. 알렉스 그 녀석이 신경 쓸만하네. 내가 이래서 빠지더라도 체인지업이나 하나 넣자고 했는데.”
이제 점수는 5:1
오늘 선발인 내 입장에서는 뭔가 포인트를 상당히 적립한 느낌이다.
-따악!!!
아······.
[타일러 비트의 백투백홈런!! 2회 초, 양키스가 한 점을 더 추가합니다.]
[아, 메츠. 결국 투수를 교체하네요. 오늘 레니엘 디아즈 선수의 공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상대가 영 좋지 못했어요.]
[1.2 이닝에 6실점. 3피홈런. 레니엘 디아즈가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그래,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강철이 담금질 되듯이, 원래 젊은 투수는 다 이렇게 두들겨 맞고 크는 거다. 아, 담금질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면 어떻게 되냐고?
그야 뻔하다.
은퇴를 하던지, 아니면 일본이나 한국에 가서 돈이라도 바짝 당기고 은퇴를 하겠지.
[레니엘 디아즈를 대신하여 라울 히메네즈. 라울 히메네즈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2024년에 빅리그에서 1시즌 17.1이닝 4.68의 평자책을 기록했었죠? 이후로는 NPB에서 활약하던 선수인데 작년에는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174.2이닝 3.04의 평자책을 기록했습니다.]
아, 물론 이렇게 운 좋게 다시 빅리그로 돌아오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매우 훌륭한 포크볼이었어요.]
[투아웃 주자 1루 상황. 라울 히메네즈가 추가점을 허락하지 않은 채 2회 초. 양키스의 길었던 공격을 마무리 짓습니다.]
포크볼? 스플리터?
하나는 탑스핀이고 하나는 백스핀으로 던지는 매커니즘은 상당히 다르지만 사실 두 공 모두 떨어지는 공으로 그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낙폭은 보통 포크볼이 좀 더 큰 편이고, 구속은 스플리터가 훨씬 빠르다. 부상 위험 역시 스플리터 쪽이 압도적으로 낮고, 무엇보다 던지는데 필요한 재능도 포크볼 쪽이 더 괴랄한 편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포크볼 쪽이 스플리터에 비해서 배우기 어렵고, 위력은 대동소이한데 부상위험은 더 높다. 당연히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는 거의 사장된 공이다.
근데 일본은 여전히 가끔 스플리터가 아닌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가 나온다. 이유야 뭐 여러 가지겠지만 아마추어 지도자들 가운데 현역 시절에 자기가 포크볼을 던졌던 투수들이 아직 좀 남아 있는 탓이다.
물론 지금 라울 히메네즈가 던진 공이 포크볼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뭐 크게 중요한 일인 것 같지도 않고.
2회 말.
피안타 하나, 삼진 하나. 그리고 병살.
깔끔하게 이닝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의 공격.
메츠의 마운드에는 여전히 라울 히메네즈라는 녀석이 올라왔다.
[그러니까 저 선수 올해 연봉이 250만 달러죠?]
[네, 그렇습니다. 라울 히메네즈 선수 같은 경우 작년에 NPB에서 옵션 포함 220만 달러를 받던 선수거든요. 재계약으로 옵션 포함 300만 달러를 제안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니까 최수원 선수처럼 돈을 완전히 버리고 왔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저 선수도 돈 보다는 빅리그에서 뛰겠다는 열망으로 빅리그에 진출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올해 나이 33세.
투수의 커리어하이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보는 게 일반적이라는 걸 감안할 때 이미 정점은 지난 나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라울 히메네즈가 기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이너를 전전하다가 빅리그에서 딱 17이닝 뛰고 퇴출당한 이후 NPB에서만 5년 정도 뛴 선수다. NPB에서 성공적으로 은퇴하는 대신 굳이 빅리그에 다시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
KKK.
근데 아니, 잠깐만.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공이 뚝 하고 떨어지는데?”
“슬라이더도 상당히 까다로워.”
“속구는 공략할 만할 것 같은데. 속구인 줄 알고 휘두르면 귀신처럼 스플리터가 들어오네?”
물론 6, 7, 8번의 하위 타순이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KKK라니.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다시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로 향했다.
3회 초.
삼자 범퇴로 끝내면 알렉스의 타순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저 녀석 좀 껄끄럽다. 물론 그런 공을 쳐서 담장을 넘기는 미친 짓은 4, 50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할만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 자체가 녀석의 터무니 없는 기량을 증명한다. 게다가 나도 항상 그렇게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석에 메츠의 8번 타자.
오늘 그래도 몇 마디 나눠서 좀 익숙한 메츠의 포수 마일즈 터너가 올라왔다. 2할 초반의 평범한 포수다.
초구.
몸쪽 깊숙한 속구.
-딱!!!!
어라?
마일즈 터너가 퍼 올린 공이 쭉쭉 뻗어 나갔다. 역시 2할 초반의 타자라고 해도 공이 좀 몰리니까 어김없다.
[3회 초. 선두 타자 마일즈 터너!! 우측 방면 깊숙한 타구!! 우익수 타일러 비트가 잡아서 2루에!!]
“세이프!!”
[세잎!! 세잎입니다. 마일즈 터너의 2루타!! 3회 초. 메츠가 득점권에 주자를 올려 놓습니다.]
[공이 좀 몰렸습니다. 살짝 아쉽네요.]
[3회 초. 현재 스코어는 6:1. 메츠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기회를 살려야 하는 순간이거든요? 타석에 9번 타자 밀턴 프리드먼. 밀턴 프리드먼 선수가 올라옵니다. 아무래도 아직 3회 초밖에 되지 않았는데 주전 유격수를 내리고 대타를 사용하기에는 조금 이른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노아웃에 주자 2루.
사실상 병살도 힘들고 이제는 어지간하면 알렉스의 타석까지는 돌아온다고 봐야 했다.
가벼운 심호흡.
머릿속에서 녀석의 그림자를 지워냈다.
뭐, 그건 그거고.
지금은 일단 타자에 집중하자. 괜히 방금도 알렉스 녀석 생각하다가 엄한 타자에게 안타 두들겨 맞은 것 같으니까.
-부웅!!!
“스트라잌!!!”
밀턴 프리드먼이 나의 100마일짜리 속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99.7마일이기는 했는데, 아무튼 거의 공 한 개 차이 날만큼 떨어진 곳으로 방망이가 튀어나왔다.
두 번째는 높은 코스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지는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녀석의 방망이가 또 따라 나왔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는 밀턴 프리드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이 타석에 다시 섰다.
[볼카운트는 이제 0-2. 2구 연속 빠른 공이었습니다만 밀턴 프리드먼 선수의 방망이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커브.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는 공에 타자가 방망이를 내밀지 않았다.
-뻐엉!!!
“스트라잌!!!”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보는 타자.
하지만 당연히 소용없었다. 오늘 심판은 요즘 메이저의 심판들이 그렇듯 커브에 상당히 후한 판정을 해주고 있었으니까.
원아웃에 주자 2루.
타석에 1번 타자인 후안 로메로가 올라왔다.
1회 초에는 운이 좋게 파울 플라이 하나로 아웃시키기는 했지만 아무튼 4할 출루율의 사나이다. 장타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없다.
초구에 바깥쪽 살짝 빠지는 코스로 유인구 하나.
-뻐엉!!!
[호세 트레비뇨. 체크 스윙 여부를 확인합니다만······. 아 방망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볼카운트는 1-0.]
바깥쪽 코스.
이 정도에는 방망이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몸쪽.
-딱
녀석의 방망이가 공을 두들겼다. 포수 뒤편 그물망을 때리는 파울.
볼카운트는 이걸로 1-1.
바깥쪽.
존을 살짝 스치는 속구.
-뻐엉!!!
원하던 곳보다 살짝 더 빠졌다. 당연히 이번에도 방망이는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잌!!!”
하지만 판정은 스트라이크.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존이 확실한 타입이다.
하지만 이제 볼카운트는 1-2.
조금 집요하게 바깥쪽으로 승부를 걸어봤다.
파울, 파울, 그리고 볼.
까다롭다.
바깥 쪽 높은 코스 커브.
-딱
타구가 3루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후······.
여덟 번째.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폼.
하지만 정말로 이를 악물었다.
몸쪽 무릎 높이.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
노리던 곳보다는 살짝 가운데로 몰린 공이었다. 하지만 바깥쪽으로만 공 5개를 연속으로 본 녀석의 반응이 조금 늦다.
-부우웅!!!
“스트라잌!! 아웃!!!!”
102.7마일.
거지 같은 야드 파운드법 말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5.3km/h. 그러니까 내 종전 최고 구속이었던 163.1km/h를 1km/h도 아니고 무려 2km/h나 갱신하는 숫자가 전광판에 찍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타석에 알렉스가 올라왔다.
투아웃에 주자 2루.
방금 나의 최구 구속을 무려 2km/h나 갱신한 상황.
자신감은 충분했다.
호세가 일단 초구로 몸쪽 살짝 높은 코스 깊숙하게 속구를 꽂아 넣자고 주문했다. 마음에 드는 주문이었다.
그래, 진정한 파이어볼러는 몸쪽에 공을 찔러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60년대의 로망 넘치던 투수들처럼 할머니가 타석에 서 있어도 주저 없이 던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앞선 타석에서 나한테 홈런을 뽑아낸 친구 놈한테는 얼마든지 찔러 넣을 수 있다.
간다.
165km/h의 몸쪽 강속구!!
-따아아아악!!!
!?
이런 미친?
***
“이런 미친?”
“왜? 뭐가?”
“실시간 시청자 240만 넘겼습니다. 서브웨이 시리즈 신기록이에요. 게다가 지금 SNS 쪽 반응도 장난 아닙니다.”
최수원이 경기 두 번째 홈런을 허용하는 바로 그 순간.
ESPN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