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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98화 (298/305)

298화. 저길 봐라(7)

가끔 그런 놈들이 있다. 개발자가 깨지 말라고 만든 챕터를 어떻게든 변태적인 방법으로 깨는 놈들.

지금 타석에 선 알렉스 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치지 말라고 던진 유인구를 꾸역꾸역 쳐내더니. 아니, 심지어 그걸 넘겨버린다고? 수십 년 전 배리 본즈의 그 유명한 체인지업런을 허용한 리반 에르난데스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외야 중앙 전광판 아래에서 시뻘건 색깔의 대형 사과가 올라왔다. 시티필드에서 메츠 타자가 홈런을 치면 나오는 시티필드의 명물 빅애플이었다. 빌어먹을 사과 같으니. 홈런 두들겨 맞고 나서 저 꼬락서니 보니까 괜히 기분이 나쁘다.

점수는 이제 2:1.

그래, 내가 홈런 한 방 친 거 되돌려 받았다고 치자. 여기서 내가 추가 점수를 내주지 않는다면 일단 1회는 이기는 거다.

[타석에 3번 타자 제레미아 와일드가 올라옵니다.]

재작년에 메츠에 8년 2억1천만 달러에 계약을 맺은 32세의 3루수. 시장에서 평가받던 금액은 1억 후반대 정도였던지라 메츠의 미친 돈지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로 남은 녀석이다.

다만 그렇게 거액의 계약을 주고 돈값 못한 수많은 사례와 달리 제레미아 와일드는 딱 2억1천만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장기계약을 맺은 선수가 초반에 딱 그만큼만 보여준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가면 악성 계약으로 남을 확률이 농후하다는 의미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현재만 따진다면 저 녀석 역시 올스타급의 타자라는 의미다.

초구.

침착하게 바깥쪽 코스 보더라인에 걸치는 커브를!!

-따악!!!

던지려고 했는데 공이 손에서 좀 쉽게 빠져버렸다. 회전이 부족한 커브가 조금 밋밋하게 들어갔다.

나름대로 올스타급 타자인 제레미아답게 그 공을 놓치지 않았다. 타구에 힘은 제법 실려 있었지만, 방향이 좋지 않았다.

[2루수 정면!! 빠른 타구!!]

[트로이 존슨이 가볍게 타구를 처리하며 투아웃.]

[방금은 실투였죠?]

[네, 아무래도 홈런을 두들겨 맞은게 영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투수 입장에서는 자신있게 던진 공이 저렇게 어이없이 담장을 넘어가면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이제 고작 스무 살의 어린 선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순간에 저런 좋은 수비가 나와주면 또 투수가 멘탈을 다잡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 터무니없는 이상한 공이 담장을 넘어가면 이렇게 실투도 아웃이 나와줘야 공평하지.

이어지는 4번 타자를 상대로 파울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그리고 6구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최수원이 경기 첫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아주 좋은 커브였습니다. 데릭, 어떻게 보셨나요?]

[방금 저 공. 처음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에게 홈런을 두들겨 맞았던 그 코스입니다. 위축될 법도 한데 멘탈이 상당히 단단하네요. 제가 투수는 잘 모릅니다만 예전에 모한테 들었던 말이 얼핏 기억납니다. 자신 있게 던진 공이 두들겨 맞았다고 거기에 같은 공을 또 넣지 못하면 그보다 자신 없는 공밖에 던질 게 없는 거라고 했었죠.]

[마리아노 리베라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으음······. 어쩌면 앤디의 말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닌가? 로저가 한 이야기인가?]

[아, 네. 알겠습니다.]

경기가 이어졌다.

1회 초에 나한테 홈런 한 방 두들겨 맞고 흔들렸던 레니엘 디아즈는 우리 하위 타순을 맞아 제법 침착하게 피칭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세계 대회에서는 이 정도 느낌까지는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왜 알렉스한테 망해도 MVP 컨텐더급 타자라고 하는지 이제 좀 알겠더라.”

“어?”

“아니, 마지막 그 홈런 맞은 공. 솔직히 대놓고 치지 말라고 던진 공이었거든. 존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공이었고. 심지어 이 녀석 완전히 속이기까지 했단 말이야? 근데 그걸 억지로 잡아당기더니 결국 담장까지 넘겨버리네? 그 왜, 예전 MLB 영상 보면 배리 본즈가 체인지업에 속아서 타격 타이밍 뺏겼는데 방망이 다시 돌려서 담장 넘겨버리는 홈런 있잖아? 완전히 그거 보는 느낌이더라.”

“어······. 그렇구나.”

“뭐야? 그 반응은? 어째 좀 뜨뜻미지근한데?”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어째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쪼끔 뭐랄까······. 와, 이 녀석 양심이 너무 없는데? 이런 느낌이랄까?”

앤서니 볼피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지금 네가 하는 이야기들. 다른 투수들도 너한테 거의 비슷한 이야기할 걸? 너도 진짜 턱도 없는 거 몇 개나 넘겼잖아. 너희 나라에 있을 때는 그것보다 더했을 거고.”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내 머릿속에서 터무니없는 괴물처럼 느껴지던 알렉스가 갑자기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래, 잘 생각해보니까 나도 내가 홈런 두들겨 맞았던 공을 한 40번, 50번 정도 두들기면 한 번 정도는 담장을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저 녀석 높게 쳐서 나랑 동급이라고 해준다면 2% 확률의 행운이 첫 턴에 터진 셈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레니엘 디아즈의 체인지업이 트로이 존스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헛스윙 삼진.

대기 타석에 있던 호세 트레비뇨가 타석으로 올라갔다.

“나가 있을 테니까 이왕이면 천천히 걸어오게 한 방 더 날려줘 봐.”

“왜? 직접 날려보지?”

“알렉산더 맥도웰한테 홈런 두들겨 맞고 시무룩한 것 같아서 서비스 주는 거니까 그냥 감사하게 받아.”

앤서니 볼피가 대기 타석으로 걸어나갔다.

타석에 선 호세가 상대 팀의 포수와 뭐라 뭐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솔직히 앤서니가 자기 말처럼 나가 있을 확률보다는 이번 이닝에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공수교대가 이뤄질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타석에 올라가 있는 호세의 이번 시즌 지금까지 기록한 타격 성적은 0.196/0.208/0.217로 끔찍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녀석은 좋은 포수였다. 골드 글러브 세 개에 플래티넘 글러브 두 개는 그가 마스크를 썼을 때 얼만 좋은 포수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아무리 그의 수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곤란했다.

-부웅!!!

“스트라잌!!!”

상당히 어림 없는 공에 헛스윙 스트라이크. 호세 본인도 조금씩 마음이 급해지는 것인지 타격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뻐엉!!

그나마 다행이라면 0-2에서 체인지업을 참아낼 만한 무언가는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볼카운트는 이제 1-2.

레니엘 디아즈가 공을 던졌다.

상대적으로 가장 쉬운 타자에게 굳이 투구수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이었다.

-따악!!!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물론 지금 호세 트레비뇨가 기록하고 있는 타격 성적은 과거 지명타자가 없던 시절 NL의 투수에 근접한 형편없는 타출장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빅리그에서 13년이라는 시간을 생존한 베테랑이었다.

2루수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

호세 트레비뇨가 1루에 섰다. 이걸로 이제 0.213/0.224/0.234. 여전히 형편없는 성적이지만 그래도 다시 2할 타율로 복귀다.

타석에 앤서니 볼피가 올라갔다.

[2회 초. 2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는 1번 타자인 앤서니 볼피 선수입니다.]

[2회 초에 벌써 타순이 한 바퀴 돌았습니다. 다행이라면 아직 점수는 2점밖에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겠죠.]

[메츠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여기서 이닝을 마무리하고 싶을 겁니다. 만약 여기서 볼피 선수까지 출루를 허용한다면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낸 상태에서 최수원 선수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거 상당히 무섭거든요.]

[글쎄요. 그렇게 되면 굳이 최수원 선수를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요? 베이스가 하나 비었는데요.]

[그렇게 되면 만루에서 타일러 비트 선수를 맞이하는 거니까요. 그 경우 최수원 선수의 빠른 발까지 생각하면 장타 하나에 3점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대기 타석에서 방망이를 몇 차례 휘둘렀다.

중계 카메라들이 나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경기 전국 중계다. 심지어 그것도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이니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전국데뷔인 셈이다.

-뻐엉!!!

레니엘 디아즈가 견제구를 벌써 세 개째 던졌다.

아마 우리 홈구장이었다면 야유가 나왔어도 벌써 나왔을 상황. 호세 트레비뇨가 자신의 앞섶을 툭툭 털어냈다. 사실 포수를 하는 데 필요한 체력과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굳이 주루 플레이에 많은 힘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본인도 그걸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최근 타격 성적이 상당히 초조하긴 초조한 모양이다.

-따악!!!

4구째.

앤서니 볼피가 몸쪽 공을 제대로 잡아 당겼다.

3루수인 제레미아가 멋지게 점프를 뛰어봤지만 지난 토론토 전에서 내가 안타를 도둑맞았던 것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장면은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장면이다.

3루 코치가 호세를 2루에 멈춰 세웠다. 3루까지 달리기에 그의 속도가 충분하지 않았던 탓이다. 뭐 서른다섯의 포수라면 무릎이 정상일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두 번째 차례가 돌아왔다.

[2회 말. 2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까지 무려 10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가고 있는 최수원 선수. 현재까지 타율이 무려 5할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타석수가 고작 34타석에 타수도 29타수의 스몰 샘플이긴 합니다만······. 와, 이거 메츠 입장에서는 정말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겠습니다.]

[과연 메츠의 덕아웃에서는 어떤 선택을 할지······.]

[제가 생각할 때는 여기서는 절대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경기가 뭐 포스트시즌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시즌 중의 많은 경기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 덕아웃에서는 아무런 사인이 나오지 않네요. 자동고의사구는 없습니다.]

마운드의 레니엘 디아즈가 괜히 1루를 힐끔 바라보더니 견제구를 하나 던졌다.

“세이프!!”

당연히 세이프다. 애초에 2루에 주자도 있는데 볼피가 바보도 아니고 간격을 넓게 잡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뭐야? 쟤 겁 먹은 거야?”

“헛소리.”

메츠의 포수 녀석이 나의 말을 일축했지만.

사실이다.

저 녀석 저거 겁 먹었다.

솔직히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나도 알렉스한테 빠지는 공 두들겨 맞은 게 담장 넘어가고 나니까 와, 다음번에는 대체 뭘 던져야 하나. 좀 암담한 느낌이었는데 저 녀석은 이제 고작 22살에 불과하다. 당연히 겁먹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두들겨 맞고 충격을 완화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나한테 홈런 두들겨 맞은 게 직전 이닝이었으니까.

아, 물론 나랑은 좀 다른 부분은 알렉스는 터무니없는 공을 홈런으로 만들었고, 난 충분히 두들길만한 공을 두들겨서 홈런을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0.517/0.588/1.276이라는 나의 미친 성적이 갈음해준다.

초구.

-뻐엉!!

어이없이 빠지는 공.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3구 연속으로 빠지는 공. 최수원 선수의 방망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레니엘 디아즈. 갑자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네요. 애런 감독. 마운드에 올라갑니다.]

연속되는 볼질에 메츠의 덕아웃이 움직였다.

대충 너 할 수 있어. 공 괜찮다. 자신감을 갖고 던져. 뭐 그런 말을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감독이 몇 차례 레니엘 디아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네 번째.

어느 정도 용기를 충전시킨 녀석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와인드업.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복판.”

“어?”

공이 날아왔다.

정중앙에서 살짝 바깥으로 치우친 공.

-따악!!!!

스트레이트 볼넷을 두려워하는 투수들이 종종 미친 척하고 집어넣는 한가운데 빠른 공이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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