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96화 (296/305)

296화. 저길 봐라(5)

경기가 있던 날에는 경기에 집중한다고 머릿속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등판 전날에 하루 쉬는 날이 있어서 그런가? 세정이 생각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냉정하게 말해서 세정이는 좋은 와이프가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나쁜 와이프였다. 이게 내가 이혼을 해서 폄훼를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근데 이게 나쁜 사람이었는가를 묻는다면 글쎄······.

내가 생각할 때 세정이가 나쁜 와이프가 된 것은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쁜 와이프가 된 이유는 그냥 메이저리거의 부인이 되기에 그냥 너무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또 안 들어와? 이번 시즌 끝나면 같이 여행 가기로 했던 건 기억해?”

“나중에. 올 해 막판에 내 성적 봤잖아. 타격 폼이 좀 뒤틀렸어. 아무래도 겨울 시즌에 제대로 잡아두지 않으면 내년에 어떨지 몰라.”

“하지만!!”

“일단 귀국해서 친구들도 좀 만나고 장인어른이랑 장모님 뵙고 효도도 좀 하고 그래. 카드 줄 테니까 선물도 좀 사서 들어가고. 아, 장인어른께는 이번에 내가 선물 받았던 그 브랜디 가져가면 될 거야. 그거 이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술이라더라.”

시즌이 이어지는 8개월 동안 집에 들어오는 날은 80일 남짓. 주말 따윈 당연히 없고 그나마도 집에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게다가 당시 나는 MVP 2위를 차지했던 타이밍이었던 터라 정말 한 걸음만 더 나갈 수 있다면 MVP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MVP 2위가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됐을 때.

전처와 나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아 있었다. 당시 나는 나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서포트해주지 못하는 그녀가 원망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래, 당시 나에게는 그녀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시의 나도 누군가의 남편이 되기에는 조금 약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 다 지난 일이고, 앞으로는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야.”

타임 슬립을 다룬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같은 걸 보면 후회했던 결혼 생활이 서로의 미숙했던 실수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서로가 운명의 상대임을 자각하고 다시 만나서 행복해지는 뭐 그런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건 진짜 불행한 결혼을 경험해보지 않은 인간들의 부족하고 잘못된 상상이 만들어낸 끔찍한 결과물이다.

-우우웅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박은진이었다.

“어, 은진아.”

“최수원. 너 올스타전이 언제라고 그랬지?”

“올스타전? 7월 11일인데. 왜?”

“아니, 나 그 즈음에 어쩌면 스케줄을 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잘하면 미국에 직관 갈 수 있을지도?”

“어? 너희 6월 즈음에 또 활동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어?”

“응, 우리 원래 6월에 다시 컴백할 예정이었는데 5월에 컴백할 줄 알았던 타이니 일정이 한 달 뒤로 밀렸거든. 회사에서도 다른 애들은 몰라도 걔들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이렇게 된 거 7월 말로 완전히 미루기로 결정 났어.”

“아, 근데 그러면 컴백이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인 건데 나 보러 와도 돼? 여기 기자들도 많은데 괜히 사진 찍히고 그러면 곤란한 거 아니야?”

“어이쿠, 잘도 그러겠네요. 솔직히 지금 우리 상황에서 너랑 얽히면 반박 기사가 아니라 옳다구나 하고 홍보 기사를 내보내야지.”

“그래? 그러면 같이 다정하게 사진이라도 하나 찍혀 줄까?”

“됐거든요? 우리 이번 곡 괜찮으니까 굳이 너랑 나랑 관계로 그런 거······. 만들 필요 없어.”

잠깐 관계에서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버벅대던 박은진이 말을 이어갔다. 이거 모른척 해주려고 해도 너무 눈에 빤히 보여서 모른척 해주기도 어렵다.

“아무튼, 너 지금 쫌 잘나간다고 그렇게 잘난 척만 하지 말고. 계속 잘해서 꼭 올스타전 나가도록 해봐. 내가 미국까지 가려면 그 정도 명분은 있어야지.”

“그건 뭐 걱정거리도 아니고. 그보다 올 때 혼자 올거야? 다른 멤버들은?”

“왜? 다른 애들 보고 싶어? 누구? 세희? 희진이? 아니면······. 세정이?”

“아니, 표를 구해놔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너무 많이 오면 좋은 자리 구하기 힘드니까 좋은 자리에서 보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와라. 그리고 그렇게 해야 사진 찍혀도 이런저런 언플하기 좋지.”

“그, 그래. 네가 굳이 정 내가 혼자 오길 원한다면.”

“아니, 같이 오고 싶으면 같이 오고. 대신 프리미엄석 구해주긴 좀 어렵겠지만.”

“아, 아냐!! 이왕 미국 가는 거 평생에 몇 번이나 볼지도 모르고. 네 첫 번째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인데 프리미엄 석에서 가까이 봐주는 게 또 친구 된 도리지.”

“뭐, 그러던지.”

아, 그런데 이게 설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 인생의 같은 실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

-따악!!!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알렉산더 맥도웰의 시즌 여덟 번째 홈런!!]

필리스와의 4차전.

알렉산더 맥도웰이 기어코 시즌 여덟 번째 홈런을 기록했다.

[고작 시즌 13경기 만에 무려 여덟 개의 홈런을 쏘아 올리는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 정말 역대급 페이스네요.]

[네, 맞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개막전 이후 13경기 만에 8홈런은 역대 3위의 기록으로 그보다 많은 홈런을 몰아친 선수는 06년의 푸홀스 선수. 그리고 01년의 루이스 곤잘레스 선수뿐입니다. 기존 3위였던 켄 그리피 주니어 선수의 7홈런을 넘어선 기록이죠. 만약 남은 15경기 동안 7개의 홈런을 추가할 수 있다면 4월 역대 최다 홈런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이 선수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군요.]

바로 어제.

최수원이 기어코 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테드 윌리엄스와 같은 높이에 섰다. 그렇기에 알렉산더 맥도웰은 그의 라이벌로서 도저히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경기가 다 끝난 새벽.

“뭐야? 오늘 홈런까지 친 녀석이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설마 경기에서 져서 그런 거야?”

“아뇨, 오늘 홈런 세 개 치려고 했는데. 하나 밖에 못 쳐서요.”

브라이스 하퍼가 알렉산더 맥도웰의 머리를 슥슥 헝클어트렸다.

“왜? 최수원이 기록 세우니까 너도 세우고 싶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래, 뭐 열심히 해봐라. 근데 이건 잊지 마. 만약 기록을 못 세운다고 해도 너희 아직 엄청 젊다는 거. 랜디 존슨은 40살까지 그렉 매덕스 발끝밖에 못 따라갔지만 40살 이후에 그렉 매덕스 턱끝까지는 따라 갔다는 것도.”

“그거 조급해하지 말라는 거죠?”

“아니, 따라갈 거면 40살은 너무 늦으니까 그 전에는 따라가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대충 한 서른여섯 정도?”

알렉산더 맥도웰이 피식 웃었다.

“결국 본인 이야기입니까?”

“그래. 너희 애송이 둘이서 자꾸 자기들이 메이저리그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고까워서 해주는 말이다. 진짜 주인공 이렇게 앞에 두고 말이야.”

“주인공은 무슨······. 그거 20년 전 이야기잖아요. 마이크 트라웃에. 오타니 쇼헤이에. 솔직히 하퍼씨가 주인공은 아니죠.”

브라이스 하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에요? 설마 기분 상한거에요?”

“아니, 이제 슬슬 집합시간이 다 돼가서. 뭐,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지. 마이크 트라웃에 오타니 쇼헤이에. 근데 너 그거 아냐?”

“뭐를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예전에 너희 팀 감독 하던 어떤 영감님이 남긴 이야기니까 꼭 기억해둬라. 내가 봤을 때 이 말은 나뿐만 아니라 미래의 너한테도 꼭 필요한 이야기 같으니까.”

“그건 전혀 동의가 되지 않는 말이네요.”

“동의가 되건 안 되건. 오늘 여기 밥값은 나의 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으로 대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아니!! 돈도 많이 버는 분이.”

“원래 이런 건 집 주인이 사는 거야. 뉴욕의 왕 소리 듣고 싶으면 뉴욕에 온 손님한테 식사 대접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뉴욕의 왕이라는 단어를 남겨 놓고 브라이스 하퍼가 그대로 레스토랑을 떠났다.

그래, 뉴욕의 왕.

벌써 15년 넘게 공석인 바로 그 자리.

일요일 저녁.

뉴욕의 왕을 가리는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이 시작됐다.

***

[전국에 계신 야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오늘 경기는 뉴욕의 두 팀. 양키스와 메츠의 경기를 중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콘.]

[저는 루이스 곤잘레스입니다.]

[그리고 오늘 중계석에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던 조시를 대신하여 정말 특별한 손님을 한 분 어렵게 모셨습니다. 조시에게 특별히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요. 아시다시피 여기 자리가 세 개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자, 농담은 이만하고. 오늘의 특별 손님을 소개드리죠. No.2. 데릭 지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조시를 밀어내고 이 자리를 차지한 데릭 지터입니다.]

[오늘 경기. 뉴욕 언론에서 앞다퉈서 ‘뉴욕의 왕좌는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고 떠들고 있는데요. 전직 뉴욕의 왕이신 데릭의 생각을 좀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양 팀 모두 만만한 전력이 아닌지라 섣불리 어디가 이길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 좀 힘드네요. 다만 지난 시리즈에서 든든한 주장이자 프랜차이즈인 애런 저지의 빈 자리를 훌륭하게 메우고 시리즈 4연전을 스윕한 양키스의 기세가 직전 시리즈를 2:2로 반반 나눠가졌던 메츠보다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 괜찮겠어?”

“네, 아시잖습니까. 야수로 뛰던 사람이 갑자기 지명타자가 되면 몸이 더 편한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도 생기는 거. 이미 1년 가깝게 해왔던 루틴입니다. 오히려 그게 더 편합니다.”

지난 두 번의 등판에서 나의 타순은 9번이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선발 투수인데 피칭도 하기 전에 타격부터 하면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늘 또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최수원 선수의 타순인데요. 선발로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계속 9번 타순으로 나왔었는데 오늘은 2번입니다. 오늘 경기가 원정인 만큼 피칭도 하기 전에 일단 타자로 무조건 경기를 시작하는 거죠.]

[제가 생각할 때 지금까지는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과정이었고 이제는 슬슬 본인이 자국 리그에서 뛰던 루틴을 되찾아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자, 오늘 메츠의 선발은 레니엘 디아즈. 작년 9월에 데뷔하여 평자책 3.71. 그리고 올해는 2경기 11이닝 동안 고작 2실점을 기록하며 1.64의 평자책을 기록 중인 젊은 선발 투수입니다. 개인적으로 미래가 몹시 기대되는 선수예요.]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앤서니 볼피의 헛스윙 삼진. 최근 타격감이 상당히 좋은 선수인데. 오늘 레니엘 디아즈 선수. 공이 상당히 좋네요.]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금까지 데뷔 이후 아홉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최수원 선수. 과연 오늘 그 기록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 선수 최근 네 경기에서 멀티 안타를 기록하지 못했거든요. 초반에 몰아치던 홈런도 잠잠한 상태고요. 개인적으로는 타격감이 좀 떨어진 상태가 아닌가 싶은데. 아마 오늘 경기가 고비가 아닐까······.]

-따악!!!!!!

[초구!! 쳤습니다!! 최수원!!! 강한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외야!! 외야!!!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맙소사.]

[······.]

[최수원의 시즌 여섯 번째 홈런. 본인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홈런으로 갱신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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