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저길 봐라(4)
“와, 우리 수원이 또 오래간만에 최수원 하고 있네.”
“자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봐봐. 4타석 1타수 3볼넷. 뭔가 좀 익숙하지 않아? 얘 작년에 한국 있을 때 500타석 좀 넘게 들어가서 볼넷이 거의 140개였잖아.”
“아······. 하긴. 마린스 타선 거의 식물이라서 최수원만 나오면 무조건 걸렀지?”
“에이, 꼭 그래서 거른 건 아니지. 그래도 노형욱 작년에 홈런이 몇 개였는데. 최거노도 몇 번 보여주기도 했고. 그냥 그런 거 다 감안해도 최수원이 워낙 미쳤으니까 걸렀던 거지. 솔직히 작년에 최수원은 뒤에 백강호가 서 있었어도 무조건 걸러야 하는 타자였어.”
양키 스타디움.
새로 산 0번 유니폼을 입은 두 남녀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두 사람의 옆에 앉아있던 한 커다란 체구의 노신사가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 한국에서 왔나?”
“네.”
“커플?”
“부부요. 신혼여행 왔어요.”
“오, 신혼여행을 와서 양키스 경기라니. 아주 좋은 추억이 되겠구만.”
“네, 그랬으면 좋겠는데. 상대 팀이 영 도와주지를 않네요. 보니까 지금도 그냥 볼넷 내주고 만루작전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만약 스완이 데뷔 이후 8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 중인 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에이, 앞에서 이미 3번이나 볼넷을 줬잖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지금은 아니라는 거지. 두 번은 참았고 세 번째는 빈볼로 응징을 했어. 그런데 만약 여기서 또 그런 짓을 저지른다? 설사 빌어먹을 프런트나 거기에 오염된 코치진의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흐른다고 할지라도 그건 선수들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야구라는 게 오늘 한 경기에서 모든 게 결정 나는 것도 아니야. 그런 비겁한 짓을 한 팀이 좋은 분위기로 시즌을 이어나간다? 코치진도 제정신이면 여기서 그런 짓은 도저히 못 저지르지.”
제법 영어에 자신이 있는 남자였지만 흥분하여 말이 빨라진 탓인지 노인의 말은 중간부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노인은 지금 여기서 최수원이 뭔가를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완 힛!! 스완 힛!! 스완 힛!!
KBO에서처럼 응원단의 누군가가 주도하여 시작된 챈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웅장한 그 외침이 양키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
양키 스타디움의 프리미엄 좌석.
신혼여행의 경비 가운데 가장 큰 사치였다. 남자가 기도했다.
‘제발 한 방 보여줘라. 어?’
지금 누군가가 마이클 조던의 데뷔 시즌을 직관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먼 훗날 최수원이 20살의 테드 윌리엄스와 나란히 하는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최수원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일까.
양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그 거대한 챈트 속에서 타석에 선 최수원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
빅터 프랑수아.
대단한 마무리 투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무리를 꼽으라면 당연히 그건 마리아노 리베라다. 그리고 빅터 프랑수아는 그런 마리아노 리베라와 거의 비슷한 피칭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모의 전성기와 지금의 빅터 프랑수아요? 흐음······ 글쎄요. 일단 모는 69년생이고 빅터는 04년생이에요. 무려 35년의 차이가 있죠. 그리고 그 35년 동안 야구계가 얼마나 엄청난 발전을 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이건 정말 공평하지 않은 비교입니다. 우리가 뛰던 당시 투수들은 96마일을 던지면 ‘와우, 너 정말 빠른 공을 던지네.’라는 말을 들었고 100마일은 정말 꿈의 구속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100마일은 던져야 정말 빠른 공 소리를 듣고, 105마일, 106마일을 던지는 투수도 종종 보입니다. 사람의 유전자는 35년 만에 극적으로 변하지 않았어요. 변한 건 훈련 방법이죠.”
언젠가 언론에서 앤티 페팃에게 자신의 동료였던 마리아노 리베라와 빅터 프랑수아를 비교해달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은 사실상 빅터 프랑수아의 기량이 전성기의 마리아노 리베라 이상이라는 의미로 사람들에게 전달이 됐다.
시대적인 보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대부분 과거의 선수는 지금의 선수보다 기량적인 부분에서 부족하다. 이건 그들을 폄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쨌거나 모든 사람은 거인의 어깨에 타기 마련이고 자신의 어깨를 내어준 거인의 높이가 그 어깨에 탄 이보다 낮다고 하여 그 위대함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대단한 선수라고 해서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전성기 71경기 78.1이닝 1.38이라는 터무니 없는 성적을 기록했던 마리아노 리베라조차도 0.2이닝 3피안타 5실점 1자책을 기록한 날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오늘의 빅터 프랑수아도 마찬가지다.
0.2이닝 동안 삼진 하나. 그리고 1피안타에 1볼넷.
이 정도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
마운드의 빅터 프랑수아가 초구를 뿌렸다.
낮게 깔린 101마일의 빠른 공.
-따악!!!
[최수원!! 초구 타격!!]
바깥으로 슬쩍 빠지는 커터였다.
1루 파울라인을 아득히 벗어나는 타구.
[존에서 살짝 벗어나는 커터를 건드려봤습니다만 안타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회귀 전 내가 경험했던 2035년의 빅터 프랑수아도 리그 최고의 마무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공의 위력만 따져본다면 지금이 더 위력적이라고 느껴진다.
이유는 간단했다.
-따악!!!
몸쪽 깊숙하게 파고드는 102.4마일의 빠른 속구.
빗맞은 타구가 이번에는 포수 뒤편 펜스를 강타했다.
굉장한 회전수.
공이 대기 타석에서 관찰하면서 예측했던 것보다 반개는 더 높게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거 커터랑 거의 구분이 안 된다. 같은 폼에 같은 궤적인데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어느 공은 높게 들어오고, 어느 공은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 파울!! 파울입니다!!]
[9회 말. 점수는 2:1. 투아웃에 주자 1, 2루. 그리고 볼카운트는 0-2. 최수원 선수.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릅니다만 모두 파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공들이 살짝살짝 보더라인에 걸치거나 벗어나는 공이거든요. 충분히 더 지켜봐도 좋을 것 같은데. 최수원 선수 방망이를 너무 적극적으로 휘두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싶습니다만······. 그래도 최수원 선수 조금만 더 침착하고 냉정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0-2다.
여기까지 왔으면 의도적인 볼넷은 이제 없다고 봐야 했다. 스트라이크 하나 잡는 걸 겁내서 대신에 볼넷을 내주는 머저리라면 지금 이 타이밍에 마운드에 서 있을 자격도 없을테니까.
세 번째.
내가 기억하는 빅터 프랑수아라면 여기서 하나 정도 유인구를 던질 법도 하다. 그래, 내가 기억하는 2034년. 29살의 빅터 프랑수아라면 말이다.
-따악!!!
1루 우리 팀의 덕아웃 쪽으로 날아간 파울.
아슬아슬하게 보더라인 안쪽에 걸치는 커터였다. 29살의 빅터 프랑수아였다면 한 번 쉬어갔을 상황에서도 24살의 젊은 빅터 프랑수아는 그대로 달려든다.
네 번째.
분명 어려웠다.
구분이 가지 않는 포심과 커터.
102마일에서 104마일을 오가는 빠른 구속.
절대 일반적이지 않은, 매우 특별한 무브먼트.
하지만.
포심, 그리고 커터.
커터, 그리고 포심.
선택지가 두 개라는 이야기는.
나의 문과적 마인드로 생각해 봤을 때 그 경우의 수를 계속 늘려가면 찍어서 맞출 확률이 50%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악!!!
낮게 제구된 103.7마일의 속구를 그대로 잡아당겼다.
‘아, 좀 높은데?’
하지만 괜찮았다.
아니 괜찮아야만 했다.
원래 슈퍼스타는 이런 순간에 더 빛이 나는 법이니까.
***
[쳤습니다!! 최수원!! 빠른 타구!!]
[좌익수 카메론 존스 타구 방향으로 달립니다!!]
토론토의 좌익수인 카메론 존스는 그리 나쁘지 않은 코너 외야수였다. 타격도 괜찮았고 어깨도 좌익수치고는 훌륭했으며 발도 그 정도면 제법 빨랐다. 타구 판단이 아주 조금 느린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애초에 저런 조건을 다 갖춘 상태에서 타구 판단까지 좋았다면 코너 외야수가 아니라 중견수를 해야 한다. 분명 카메론 존스는 준수한 좌익수였다.
최수원이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으로 날아왔다.
마지막 하나의 아웃카운트다.
만약 그대로 잡아낸다면 경기 종료.
어떤 대단한 야수들처럼 소리만 듣고 바로 달려나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카메론 존스의 스타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빴던 것은 따로 있었다.
‘윽······.’
앞선 7회 말.
블루 제이스는 기록을 세우고 있던 최수원을 볼넷으로 내보냈다. 자동고의사구는 아니었지만 덕아웃에 있던 선수라면 누구나 그게 고의사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8회 초에 선두 타자는 카메론 존스였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운이 없었던 거다. 카메론 존스가 상대방이 보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타자라는 점. 그리고 그가 하필 선두 타자였다는 점.
카메론 존스는 기꺼이 빈볼을 감내했다.
덕분에 94마일짜리 속구에 두들겨 맞은 허벅지는 시퍼렇다 못해 거뭇거뭇하게 타박상이 올라왔지만 원래 야구 선수는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야구를 하는 게 야구 선수다.
약간의 불편함이 5초도 안 돼서 도착할 거리를 6초가 넘는 시간이 걸리게 했다. 좌측 외야. 워닝 트랙까지 열 걸음이 넘게 남은 위치. 덕분에 본래라면 나쁘지 않게 잡을 수 있었을 타구가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안전하게 1점을 내주고 연장전으로 간다?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내 본다?
머리로 계산하고 고른 선택지가 아니었다.
카메론 존스가 달려가던 방향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의 오랜 경험에 비춰 판단했을 때 충분히 슬라이딩 캐치가 가능한 거리였으니까.
물론 그의 몸이 온전하다는 전제하에서.
[빠졌!! 빠졌습니다!! 안타!! 2루 주자 3루 지나 홈으로!! 그 사이 1루 주자도 3루로!!]
[3루!! 3루 지나갑니다!! 홈까지!! 홈까지!!!]
카메론 존스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기로 굴러가는 공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반 바퀴 몸을 돌려 그대로 홈을 향해 공을 던졌다. 일부 우익수들처럼 레이저와 같은 송구는 아니었지만, 좌익수치고는 매우 강한 송구였다.
그래, 디딤발이 되는 왼쪽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어쩌면 홈에서 아웃을 잡아낼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송구의 방향이 흐트러졌다.
세 걸음이나 옆으로 이동하여 공을 받아낸 포수가 몸을 돌려봤지만 이미 앤서니 볼피의 발은 안전하게 홈플레이트를 밟고 있었다.
“세이프!!!”
저 북쪽 국경 너머 캐나다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블루제이스의 팬들이 카메론 존스의 어이없는 수비와 송구에 피를 토했다. 그들로서는 7회 말에 두들겨 맞은 그의 허벅지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9회 말 2:1 상황!! 역전 2타점 끝내기 적시 안타!! 최수원이!! 최수원이 시리즈 3번째 경기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본인의 데뷔 이후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9경기로 연장했습니다.]
[와, 이 선수 대체 뭐죠? 정말 기가 막힙니다. 아니, 여기서 끝내기 2루타를 때려버리네요.]
[최수원 선수. 이제 이걸로 20살 이하 데뷔 선수 연속 안타 기록에서 1939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와 공동 3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리즈 3연승.
경기가 끝났다.
***
─양키스 시리즈 스윕!! 파죽의 4연승!! 압도적 지구 1위 등극!!
─최수원의 4차전 결장에 몰려오는 의문들. 과연 최수원에게 등판 전날 휴식이 꼭 필요한 일일까?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 알렉산더 맥도웰 그리고 최수원!! 오래 이어온 라이벌의 맞대결 성사!!
─뉴욕의 왕을 가리는 승부!! 과연 그 승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