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94화 (294/305)

294화. 저길 봐라(3)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웃카운트 하나가 또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제 남은 카운트는 12개.

게릿 콜이 마운드 위에 올라갔다.

올해로 37세.

회귀하기 전의 나조차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이다.

하루하루 노력하는 만큼 더 나아지는 시점을 지나서, 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도 제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시점에 접어드는 고통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뒤로 밀려날 때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뻐엉!!!

물론 마운드의 게릿 콜은 그딴 거 모르겠고 오늘 최소 무실점 완봉승각이라는 느낌으로 공을 뿌려댔다.

오늘 토론토의 선발인 제리 맥과이어가 최고 104마일을 던지는 거로 유명하듯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 102마일을 던지는 피지컬 좋은 투수로 유명했던 게릿 콜이다. 하지만 110kg의 저 근육덩어리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만이 아닌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그 나름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딱!!!

토론토의 타자가 97.7마일 속구를 두들겼다.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하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지금 외야에 선 중견수는 부산의 어느 야구 팀에 달리기만 빠르던 중견수가 아니었으니까.

[제이크 도밍고의 안정적인 캐치!! 선두 타자 뜬공 아웃!!]

[오늘 게릿 콜 선수 피칭이 상당히 훌륭합니다. 전체적인 구속은 제리 맥과이어 선수보다 6, 7마일 정도 느리지만 확실히 안정적이에요.]

[작년을 기준으로 시즌 평균 구속은 93.4마일. 전성기에 비하면 거의 5마일 가깝게 떨어졌지만 이렇게 중간중간 하나씩 나오는 90마일 후반대의 강속구는 여전히 위력적입니다.]

[나이가 주는 노련한 완급조절이라고 봐야겠죠?]

[글쎄요.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투수가 저런 것을 갖출 수는 없으니. 이건 게릿 콜 선수가 쌓아 올린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봐야겠죠.]

마운드의 게릿 콜이 로진백을 몇 차례 매만졌다.

5.1이닝 무실점.

모처럼 만의 무실점 경기였으니 집중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느낌이었다.

타석에 1회, 오늘 나의 안타를 훔쳤던 레오 루카스가 올라왔다.

[앞선 두 번의 타석에서 2타수 1안타를 기록 중인 레오 루카스. 오늘 경기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차례 사인이 오고 갔다.

덕아웃에서 내려가는 지시였는데 게릿 콜이 고개를 저은 탓이다. 뭐, 저만한 커리어에 저만한 성적. 그리고 오늘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이건 투수의 감대로 가는 게 맞다.

-따악!!!

그리고 몸쪽 낮은 코스.

레오 루카스가 정확하게 그 공을 두들겼다.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넘어갔습니다.]

[6회 초. 레오 루카스의 시즌 2호 솔로 홈런포. 점수는 다시 1:1.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상당히 좋은 코스로 들어가는 공이었는데······. 이건 레오 루카스 선수가 정말 잘 쳤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94.8마일.

코스는 좋았지만, 공이 느렸다. 덕분에 카운트를 잡으려던 공이 우격다짐 힘으로 넘어갔다. 아마 전성기에 97마일, 98마일짜리 공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경기가 계속됐다. 성격도 그렇고 커리어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빅리그 16년 차의 훌륭한 투수였다.

허무하게 1점을 내줬음에도 불구하고 게릿 콜은 흔들리지 않고 피칭을 이어갔다.

토론토의 덕아웃이 바빠졌다.

[시리즈 스코어 2:0. 물론 이번 시리즈는 4연전이라서 오늘 경기에 패배해도 스윕까지 한 경기가 남긴 합니다만, 블루제이스 입장에서 보자면 3연패는 정말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일 거거든요.]

[그렇죠. 상대가 다른 리그. 하다못해 다른 지구팀도 아니고 같은 리그에 같은 지구 팀 아니겠습니까.]

6회 말.

점수는 1:1.

[역시 투수를 교체하네요. 6회 말 뉴욕 양키스의 공격.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운드에 제리 맥과이어를 대신해서 마르코스 데 라 로사 선수가 올라옵니다.]

[24살. 104마일을 던지는 영건 이후로 36살의 노련한 불펜을 기용하네요.]

[저 선수 작년 하반기부터 불펜으로 전향하고 성적이 꽤 잘 나오고 있죠? 작년 21.1이닝동안 고작 7실점. 평자책이 2.96에 불과했어요.]

[토론토 블루제이스. 어떻게든 오늘 승부는 가져가겠다. 뭐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100마일 전후의 공을 상대하던 타자들에게 갑자기 90마일 전후의 공이 날아왔다. 이 정도면 거의 배팅볼 속도가 아니냐 싶겠지만 커맨드가 또 그렇지 않았다. 바깥쪽 낮은 코스 보더라인에 집요하게 들어오는 속구와 느린 공보다 더 느린 체인지업. 그리고 미묘하게 꺾여 들어오는 87마일의 투심까지.

-딱!!!

삼진으로 물러나지는 않았지만, 타구가 좀처럼 뻗어 나가지를 못한다.

양키스의 하위타선을 상대로 적립되는 아웃카운트.

오늘 양키스의 빠따 상태를 봤을 때 두 번의 기회는 거의 확정적이라고 생각했건만 돌아가는 꼴이 어째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7회 초.

게릿 콜이 또 다시 마운드에 올라갔다.

-따악!!

이제는 제법 힘이 빠진 기색이 엿보인다. 하지만 하위타선을 상대로는 그래도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일까? 마지막 9번 타자를 상대로 내야땅볼아웃을 잡아내며 게릿 콜이 기어코 추가실점 없이 7회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7회 말.

[7회. 블루제이스가 블레이크 헌트 선수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이 선수 이번 시즌 6경기에서 6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아직 실점이 없습니다.]

앤서니 볼피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 저 녀석 별거 아니니까.”

“긴장은 무슨.”

“그런거 치고는 표정이 별로인데?”

“이건 내 차례가 혹시 안 돌아올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야.”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거네. 아웃 카운트가 몇 개일지, 앞에 주자가 몇 명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 명은 나간 상태로 너한테 찬스가 돌아올 테니 저 녀석 공이나 잘 관찰하고 있으라고.”

선두 타자의 내야 땅볼 아웃.

그리고 9번 타자인 트로이 존슨의 내야 안타가 이어졌다.

“그러면 이제 네가 병살 안 치고 삼진으로 물러나면 앞에 말한 것처럼 나한테 찬스가 돌아오는 건가?”

“그것보다는 너한테 쓰리런 찬스가 돌아왔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블레이크 헌트는 까다로운 투수였다.

하지만 앤서니 볼피는 그 까다로운 투수를 공략하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한 타자였다.

-딱!!!

[우중간!! 유격수의 키를 넘기는 타구!! 안타!! 안타입니다!!]

[1루 주자 트로이 존슨!! 빠르게 2루로!! 2루 지나서 3루까지!!]

“세이프!!!”

원아웃에 주자 1, 3루.

앤서니 볼피가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경기 네 번째 타석!! 그리고 어쩌면 오늘 경기 마지막 타석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부디 저 젊은, 아니 어린 선수가 중압감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하, 우리 마이클이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네요. 저 어린 선수는 세계 최초로 한 시즌 74홈런을 기록한 타자이자 이미 퍼펙트 게임을 경험한 투수입니다. 고작 연속경기 안타 정도에 중압감? 그럴 리가요. 장담합니다. 최수원 선수는 분명 여기서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암요!!]

자.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7회 말에 1:1이다.

상대는 시리즈 2연패 중이고 원아웃에 주자 1, 3루다.

그리고 타석에는 미친 듯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가 있다.

여기서 정답은 무엇일까?

-뻐엉!!!

[아!! 6구째!! 존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공!! 최수원 선수!! 경기 세 번째 볼넷입니다.]

[아니!! 뭐 이런 ㅆ······. 그러니까 후······.]

그래, 정답은 볼넷을 통한 원아웃에 주자 만루다.

솔직히 이게 정답인 건 맞는데 토론토가 진짜 이걸 할 줄은 몰랐다. 앞선 볼넷에는 드문드문 나오던 야유가 진짜 과장 한 푼 없이 경기장 전체에 가득 찼다.

물론 경기의 승패도 중요하지만, 3연속 볼넷이라니. 기록에 대한 고의적인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은 야구의 불문율이다. 이걸로 내 기록이 끊기면 다음번에 내가 마운드에서 토론토 상대할 때 저기 중심 타자 대가리를 깨트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폭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솔직히 앞선 두 번의 볼넷은 투수가 최선을 다하다가 실수로 했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글쎄······.

타석에 타일러 비트가 올라왔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양키스의 팬들 모두가 강력한 정의구현을 희망하는 상황.

-딱!!!

초구 몸쪽 낮은 코스 싱커.

타구가 3루수인 레오 루카스의 정면으로 흘러갔다.

얄짤 없는 병살타.

이닝이 그대로 끝났다.

“이 씨x 새끼들이? 이거 누가 봐도 만루 채우려고 일부러 한 거잖아.”

“씹······. 진짜 미친놈들 아니야?”

“이번에 우리 투수 누구지? 제이스인가?”

“어.”

그리고 8회 초.

제이스 휘태커는 나와 그리 사이가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녀석은 항상 나 때문에 자신이 선발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입은 옷과 녀석이 입은 옷은 같은 핀스프라이트였다. 그렇기에 녀석은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실행에 옮겼다.

-뻐억!!!

블루제이스 선두 타자 카메론 존스의 허벅지를 94마일의 속구가 정확하게 두들겼다. KBO식의 예의 바른 꾸벅 따윈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당당히 든 쪽은 제이스 휘태커 쪽이었다. 허벅지에 공을 두들겨 맞은 카메론 존스가 아무 어필 없이 묵묵히 1루로 걸어 나갔다. 녀석도 자기들이 저지른 짓이 두들겨 맞을만한 짓임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계속됐다.

8회.

그리고 9회.

-딱!!!

[우익수 타일러 비트 잡아서 홈까지!! 홈에서!! 홈에서!!!]

“세이프!!!”

[아······. 세잎입니다. 2:1······. 9회 초. 양키스가 역전을 허용합니다.]

연장전이라도 간다면 다섯 번째 타석 기회가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바람이 깨졌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고작 세 개. 그리고 내 앞에 타자는 총 네 명.

과연 나에게 기회가 돌아올까?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무리 투수인 빅터 프랑수아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앞선 첫 번째 타석에서 아쉽게 뺏겼던 안타가 눈앞을 아른거렸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타석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존에서 빠지는 공이라도 어떻게든 쳐서 행운의 안타라도 노려볼 껄 그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완.”

“어?”

호세 트레비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한테 기회를 이어 줄 테니까.”

“어······.”

뭔가 나는 너의 영원한 도우미라고!! 라는 유명한 짤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래, 팀원을 한 번 믿어보자. 여긴 마린스가 아닌 양키스다. 나한테 다섯 번째 타석 찬스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줄 수 있다.

[자,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8번 타자 호세 트레비뇨 선수를 대신하여 대타자 마크 토마스. 마크 토마스 선수가 올라옵니다.]

“······.”

뻘쭘한 표정의 호세 트레비뇨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아니, 거기서 그렇게 진지하게 선언을 했는데 교체라니.

-따악!!!

마크 토마스의 안타.

그리고 이어지는 트로이 존슨의 삼진 아웃.

투아웃에 주자 1루.

앤서니 볼피의 차례였다.

녀석이 별말 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가벼운 피스트 범프.

기록을 앞둔 나도 부담감이 있겠지만, 그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자신의 방망이에 달린 앤서니 녀석 역시 그 부담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이 녀석.

충분히 훌륭한 타자다.

무려 ‘데릭 지터의 후계자’라는 무겁기 짝이 없는 타이틀을 등에 짊어지고도 꾸역꾸역 자신의 몫을 해낸다는 것은 보통의 멘탈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부담감 속에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녀석에게는 충분히 익숙한 일이 아닐까?

-뻐엉!!!!

볼카운트 3-2.

마지막 1구.

녀석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정적.

4만 6천명의 사람이 모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0.1초의 기묘한 정적이 경기장에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설명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압도적인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볼넷!! 볼넷입니다!! 앤서니 볼피!! 앤서니 볼피가 여기서 볼넷을 골라냅니다!!]

[9회 말, 양키스가 득점권에 동점 주자를 올려보냅니다!! 그리고 타석에는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9회 말.

2:1.

투아웃에 주자는 1, 2루.

나의 다섯 번째 기회이자 경기장에 가득 찬 모든 이들이 바라는 정의구현의 찬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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