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저길 봐라(2)
[사실 아홉 경기 연속 안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선수들의 커리어를 살펴봐도 아홉 경기 연속 안타를 찾는 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걸 20살 이하 데뷔 이후로 좁히면 메이저리그 150년 역사에서도 지금까지 고작 세 명뿐입니다.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이 20살 이전에 데뷔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전 이것만 보더라도 최수원 선수가 수천억을 포기하고 5년 일찍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수천억인데요?]
[무, 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죠. 저라면 무조건 돈을 고를 만큼요. 하지만 오타니 선수를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선수들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법이거든요. 저는 지금 최수원 선수가 도전하는 저 기록 역시 그러한 것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지금 최수원 선수가 수천억의 거금을 포기하고 5년이나 일찍 미국에 도전한 것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위해서였다. 뭐 그런 말씀이시겠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수원 선수. 오늘 그 위대한 테드 윌리엄스의 기록. 부디 그 기록과 나란히 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그걸 넘어서 10경기, 11경기. 12경기. 13경기까지. 쭉쭉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와, 진짜 이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수원 오빠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수천 억을 포기하고 기록에 도전이라니. 우리 회사보다도 훨씬 더 비싼 거잖아요.”
“뭐 그렇지.”
강세정의 이야기에 박은진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언니는 진짜 좋겠어요. 남자친구가 완전 잘 생겼지. 키 크지. 심지어 능력까지 좋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면 ‘예비 남자친구’정도로 할게요. 근데 언니. 언니 어제 1시간도 넘게 통화했잖아요. 제가 좀 아는데 남자는 관심 있는 여자 아니면 그렇게 막 1시간씩 통화하고 그런 거 절대 안 하거든요.”
“그래?”
“그렇다니까요.”
“근데 너 남자친구도 없잖아. 마지막 연애도 3년 전에 중학교 때가 끝이라고 그랬고. 근데 그런건 어떻게 아는 거야?”
“아이참. 그런 건 직접경험이 아니더라도 다 알 수 있죠. 영화평론가가 어디 다 영화 감독 출신인가요? 영화 많이 봤으면 영화평론가 하는 거잖아요. 저 로맨스 웹 소설 진짜 많이 봤고 유튜브에 연애 전문가들 엄청 구독하고 있거든요. 간접경험으로 따지면 거의 전문가예요.”
아니, 그런 건 전문가가 아니라 x문가가 아니냐는 말이 박은진의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애써 참아 눌렀다. 화면 속에서는 최수원이 타석에서 특유의 루틴을 수행했다.
그런데 정말로 남자는 관심이 없으면 길게 통화를 하지 않는 걸까?
일단 수원의 타석까지 지켜 보고 인터넷의 익명게시판을 이용해서 집단지성 힘이라도 빌려볼까? 박은진이 살짝 고민했다.
***
-뻐엉!!!
“스트라잌!!!”
103.1
전광판에 쓰인 숫자였다.
최고 104마일을 던지는 유망주라고 하더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기적으로 이제 4월 중순에 심지어 1회 초인데. 게다가 바로 앞선 타자인 앤서니 볼피한테는 99마일 던지던 녀석이 갑자기 103마일을 던진다고?
“네 사정은 잘 알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쉽지 않을 거야.”
지난 경기 나의 테드 윌리엄스 6.25 전쟁 참전 스토리에 좀 껌뻑 넘어갔던 메이슨 마틴이 또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 것 같네요. 아니 근데 이제 1회 초인데 이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닙니까? 경기 전에 자료 보니까 최고 104마일 던진다던데 경기 초반부터 이러면 오늘 경기 5이닝이나 제대로 던질 수 있겠어요?”
“양키스가 자료 업데이트가 좀 늦네. 그거 작년 기록이잖아. 원래 저 나이 때는 하루 다르게 쑥쑥 자라는 법이야.”
“스물넷이 쑥쑥 자랄 나이요?”
“젠장······. 그러고 보니 너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지.”
뭐, 스물넷이 쑥쑥 자랄 나이냐고 반문하긴 했지만, 사실 스물넷이면 기량이 하루 다르게 쑥쑥 늘어날 시기는 맞다. 보통 1라운드 투수 기준으로는 2, 3년 차 정도 되는 시기니까. 메이슨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최고 104마일이 아니라 105마일 어쩌면 그 이상을 던진다는 뜻인데······.
두 번째.
1미터 98센티의 큰 키에, 그 키보다 긴 팔. 그리고 쓰리 쿼터 우완.
진짜 과장 조금 보태면 내 등 뒤에서 출발하는 느낌을 줬다.
아슬아슬하게 바깥쪽 꽉 찬 코스 빠른 공.
방망이를 움직였다. 이건 충분히 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0.05초 정도?
분명 빠른 공이었다.
근데 느렸다.
힘차게 돌아가던 몸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전력을 다한 회전과 전진이었다. 그것을 급격히 멈춰 세우는 데는 또 그만한 힘이 필요했으며 그 힘의 충돌이 전신을 삐거덕거리게 만들었다.
-뻐엉!!!!
[95.1마일의 빠른 슬라이더!!! 메이슨 마틴, 1루심에게 체크 스윙 여부를 확인합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확실하게 방망이를 멈춰 세웠거든요.]
[아, 네. 1루심도 체크스윙이라고 판정을 하네요. 최수원 선수. 메이슨 마틴의 슬라이더를 훌륭하게 잘 골라냈습니다.]
와, 95.1마일짜리 슬라이더라니.
솔직히 지금 이 공만 따지자면 이건 MLB를 기준으로도 최소 플러스급으로 평가받을만한 공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그런 공을 골라 낸 나 자신의 예리한 감각 매우 칭찬하자.
세 번째.
-뻐엉!!!
아니, 1루 견제였다.
황급히 몸을 날려 1루로 귀루한 앤서니가 흙이 잔뜩 묻은 자신의 앞섶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세 걸음 반의 리드폭을 벌렸다. 언제든지 2루로 달릴 수 있다. 혹은 내가 장타라도 치면 그대로 홈까지 달려갈 수 있다는 명백한 위협이었다.
-뻐엉!!!
또 한 번의 견제구.
이번에도 역시 앤서니가 여유롭게 귀루에 성공했다. 마운드의 제리 맥과이어가 로진백을 매만졌다. 이번에도 역시 1루를 한차례 노려보던 그 녀석이 세 번째 공을 뿌렸다.
바깥쪽 낮은 코스 존을 스쳐가는 빠른 공.
내가 좋아하는 공이었다. 보기에 따라서 살짝 빠지는 코스이긴 했지만, 볼카운트 하나 더 얻어내자고 그냥 보내기에는 아까운 공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본능적인 판단에 따라 방망이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따악!!!
각도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제법 힘 있는 타구였다. 앤서니 볼피가 빠르게 2루를 향해 달렸다.
[레오 루카스!!]
가끔 인터넷을 보면 ‘메이저리그의 미친수비.gif’ 같은 움짤들이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메이저리그는 다 그런 미친 수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야수의 전반적인 수준이 KBO에 비해서 조금 높을 뿐, 얘들이라고 다 그런 미친 수비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토론토의 3루수인 레오 루카스가 보여준 수비는 그 ‘메이저리그의 미친수비.gif’에 어울리는 그런 수비였다.
팔을 쭉 뻗은 채 거의 서전트점프로 70센티 이상을 뛰어오른 레오 루카스의 글러브가 그 공을 받아냈다. 물론 착지는 좋을 수 없었다. 공을 받은 채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레오 루카스가 자신에게 빠르게 접근한 유격수에게 글러브에 있던 공을 반대 손으로 뽑지 않고 그대로 토스했다.
[레오 루카스의 환상적인 점프 캐치!! 레오 루카스가 스완의 완벽한 안타를 훔쳐냅니다!!]
그리고 그대로 2루로 이어지는 가벼운 송구.
여기서 안타까운 부분은 앤서니 볼피의 발이 너무 빨랐다는 점이었다. 만약 발이 느리거나 출발이 느렸더라면 1루로 귀루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1루보다 2루에 훨씬 가까웠다. 등을 돌려 1루로 향해보지만 답이 없는 상황.
-툭
“아웃!!”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적립됐다.
[와, 정말이지 엄청난 점프 캐치였습니다. 이건 올해의 수비 후보로 올라갈 만하겠는데요?]
[이건 아마 공을 잡아낸 레오 루카스 본인도 좀 얼떨떨할 겁니다.]
[최수원 선수. 첫 타석에서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가나 싶었는데 상당히 아쉬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방금 슬라이더를 골라내는 것도 그렇고, 타격 컨디션 자체는 상당히 좋아 보이거든요. 이대로라면 오늘 충분히 기록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사실 최근 경기에서 멀티 안타가 나오지 않았던 만큼 타격감을 좀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걱정 넣어 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 1회 말.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3번 타자 타일러 비트 선수가 올라옵니다.]
“아깝네.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건데.”
그래, 그냥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작 이런 것 정도로 침울하기에는 프로야구 7년에 메이저리그 9년. 그리고 마린스에서 또 1년의 시련을 경험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운이 없을 때가 있으면 운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야구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
-딱!!!
타일러 비트가 솔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경기가 계속됐다.
***
“아 씹.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부우우우우!!!
경기장 여기저기에서도 야유가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5회 말.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타석은 총 세 번이었는데······.
[아, 7구째. 완전히 빠지는 공. 최수원 선수가 볼넷으로 걸어 나갑니다. 이걸로 오늘 경기 두 번째 볼넷. 멀티 출루를 기록합니다.]
[노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에서 볼넷으로 출루. 사실 평소였다면 상당히 좋아할 만한 상황입니다만 이게 참······. 상황이 묘합니다.]
[이게 고의 사구는 아니에요. 분명 고의 사구는 아닙니다. 오늘 경기에서 제리 맥과이어 선수가 허용한 사구가 무려 다섯 개나 되거든요. 확실히 제구에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 아쉽네요.]
3타석 1타수 2볼넷.
무려 볼넷만 두 번 연속이다.
물론 내가 적극적으로 타격을 해보려는 마음으로 타석에 섰으니까 투수 입장에서는 그걸 노리고 유인구 위주로 피칭을 가져갈 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지금 저 녀석이 던졌던 공들을 보면 그걸 노리고 헛스윙을 유도한다고 하기에는 진짜 너무 얼토당토않은 공들이 한가득이다.
“구속을 얻고 제구를 내주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
메이슨 이 새끼.
얼굴 가득한 당황이 포수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이거 대충 봐도 자기 두들겨 팰만한 투수 상대로는 볼넷을 내주건 뭐건 있는 힘껏 105마일 던지겠다는 각오로 던지는 거다. 그러다보니까 제구가 더 흔들리는 거고.
마운드의 제리 맥과이어가 잠시 모자를 벗고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아직 4월의 선선한 날씨인데 혼자만 땀으로 샤워를 한 것이 대충 봐도 이거 이번 이닝이 끝이겠구나 싶은 모습이다.
-딱!!!
4구째.
존을 빠져나가는 공에 타일러 비트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내야 땅볼.
“아웃!!!”
“아웃!!!!”
그대로 더블아웃.
그리고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13개.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기회는 매우 높은 확률로 두 번.
5할 타자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충분한 숫자였다.
[그나저나 최수원 선수 정말 지금까지 성적이 터무니 없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3타석 1타수 무안타 2볼넷을 했는데 OPS가 오히려 떨어졌어요.]
[아, 그러고 보니 경기 전에 0.500/0.536/1.192로 OPS가 1.728이었는데 지금은 0.481/0.578/1.148로 OPS가 1.697. 출루율이 저렇게 늘어나도 오히려 OPS가 감소를 하네요.]
아무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