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저길 봐라(1)
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까칠하게 굴더니만.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예쁘다고 그랬지? 세정아. 수원이도 네 미모에 놀랐나 봐.”
“아이, 언니. 자꾸 그러지 마요. 솔직히 예쁘긴 언니가 훨씬 예쁘죠.”
“너 어디 가서 남들한테 그런 말 하지 마. 나 정도 되니까 그래도 칭찬으로 듣는 거지, 너 같이 생긴 애가 그런 이야기 하면 보통 사람은 칭찬이 아니라 까는 걸로 들린다?”
“헤헤, 저도 그래서 딱 언니한테만 하는 이야기에요.”
남들이 보면 예쁜 애 옆에 더 예쁜 애라는 말이 어울리는 훈훈한 광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튼, 두 분 통화하는 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제가 워낙에 팬이라서요. 내일, 아니다. 거기는 오늘이려나? 아무튼 다음 경기도 응원할게요!!”
“네, 응원 감사합니다.”
“오빠. 저 오빠보다 두 살이나 동생이에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 네.”
“아무튼 방해꾼은 이만 빠지겠습니다!!”
전처가 어설픈 거수경례와 함께 화면에서 사라졌다.
충격적인 등장과 빠른 퇴장.
“왜 넋이 나간 표정이야? 혹시 저런 게 딱 네 취향이야?”
“아니, 절대로. 네버. 에버.”
“뭐야?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라던데. 너 진짜 설마?”
“아니, 절대. 장담하는데 내가 앞으로 열 번을 다시 태어나도 절대 네가 상상한 그쪽은 없을 거야. 지구가 멸망 직전에 몰려서 만약 인류가 쟤랑 나만 남는다면. 그래서 쟤랑 내가 신세계의 아담과 이브가 된다면. 그건 곧 인류의 멸망이야.”
나의 호언장담에 박은진이 피식 웃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그래? 하지만 나쁘진 않았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거짓말이라도 해주는 성의를 갖도록 해봐.”
“거짓말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쟤는 어쩌다 너희 팀에 갑자기 합류한 거야? 아니, 애초에 너희 제법 괜찮게 나가는 걸그룹 아니야? 무슨 1년 만에 새 멤버가 충원이 돼?”
“아······, 그거? 내가 예전에 한 번 말하지 않았나? 그게 그러니까······.”
박은진의 입에서 아이돌 시장에 관한 장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왜 예전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지를 알 것 같은 별 관심이 가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니까 네 이야기는 현재 아이돌이라는 게 굉장히 자본 집약적 산업이고 중소에서는 사실 제대로 된 아이돌을 내놓을 만한 역량이 떨어진다. 뭐 그런 이야기잖아. 근데 너희 회사는 중소라며. 대체 어떻게 데뷔한 거야?”
“뭐, 가끔 나오는 중소의 기적이지. 근데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중소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뜬 건 아니고. 완전히 중소라고 하기도 뭐하긴 한데······. 알잖아? 지금 우리 팀에 처음부터 우리 회사에서 연습생으로 시작한 애들이 하나도 없는 거.”
아이돌을 키우는 데는 정말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래서 은진이네 회사 사장은 거기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솔직히 아이돌 데뷔하는 애들이랑 연습생으로 끝나는 애들 전부 한 끗 차이 잖아. 그러면 그 한 끗 차이인 애들만 모아다가 적당히 보완해서 데뷔시키면 적은 비용으로 데뷔 가능한 거 아니야? 대기업 연습생들로만 잘 모으면 이거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워낙에 아이돌 시장이 커지고 정부에서도 관심 있게 시장을 지켜본 덕분에 과거와 같은 연습생에 대한 착취나 위약금 등은 상당 부분 해소된 상황이다. 게다가 은진이네 회사 사장은 수완도 제법 괜찮았는지 기존 회사들과 잡음 없이 정말 스무스하게 아이들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번에 폭탄이 빵 터져버렸지 뭐야.”
“폭탄?”
“혜지라고 우리 팀에 메인 보컬. 대체 왜 이전 회사에서 데뷔 못 하고 튕겨 나왔는지 모르겠던 걔.”
“어.”
“학폭이래.”
“학폭?”
“응, 본인 말로는 학폭까지는 아니라는데. 실제로 생기부도 뭐 적힌 거 없고. 서류상으로는 뭐 나오는 게 없는데. 사장님이 인맥 동원해서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따돌림 주동자 중에 하나인 건 맞다고 하더라.”
아, 진짜.
아니, 이놈의 학폭은 대체 왜 뭐만 하면 튀어 나오는 걸까? 막 애들 안 괴롭히면 참을 수 없는 유전자가 내장이라도 되어있는 건가? 심지어 아이돌을 준비할 정도면 알아서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로서는 다행히도 언론에 나간 건 아닌데. 아무튼, 사장님이 그것땜에 엄청 고생했어. 혜지가 울면서 어릴 적에 잠깐 어울렸던 친구들이 그랬던 거로. 그냥 실수 하나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했는데······. 사장님이 이렇게 말하시더라.”
-큼큼
갑자기 목소리를 고른 은진이가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목소리로 누군가의 말을 흉내냈다.
“그냥 실수 한 번.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원래 세상 사람들이 다 실수 한 번이 인생이 휙휙 바뀌면서 살고 있어. 시험 문제 하나 잘못 찍어서 시험 떨어지는 사람. 집에서 나오면서 핸드폰 깜빡 놓고 나오는 바람에 버스 놓쳐서 면접 지각하는 사람. 신혼여행 비행기 예매하면서 이름 스펠링 하나 틀리는 바람에 신혼여행 못 가서 평생 와이프한테 잔소리 듣고 사는 사람. 전부 진짜 실수 하나로 그냥 그렇게 살아. 그러니까 너도 그 실수 하나로 그렇게 사는 거 별로 특별한 거 아니다.”
중간이 묘하게 이상한 예시가 하나 들어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아무튼 그렇게 혜지가 빠졌는데 큰일이 난 게 이미 노래도 다 나오고 안무도 구성이 끝난 상황이었거든. 안무야 어떻게든 개조한다고 치겠는데. 문제는 우리 노래가 솔직히 혜지 기량에 좀 기대는 면이 있었거든. 싸비가 G#5까지 올라가는 데 이걸 낮추니까 노래가 완전히 죽어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세정이가 합류했다는 거구나.”
내가 살아 봐서 아는데 세정이 얘 고음이라면 확실히 쭉쭉 올라간다.
”근데 걔는 원래 너희 회사 소속이었어?”
“그건 아니고. 우리 팀에 희진이라고 있잖아. 걔 동생이 예고 다니거든. 거기 같은 반 친구.”
아무리 나비 효과라지만. 이 무슨······.
“원래는 뮤지컬 쪽 지망했다고 하던데. 뭐, 어떻게 보면 쟤 입장에서는 잘된 거지. 어차피 여기서 뜨면 뮤지컬 쪽 공략도 더 쉽잖아.”
“그렇구나······.”
***
“팀장님. 최수원 선수 ‘그걸’ 넘겼습니다.”
“어제?”
“네.”
양키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기라성 같다는 표현이 적합한 선수들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양키 스타디움 내부 매장에서 판매되는 유니폼 가운데 상당 수가 현역이 아닌 이미 은퇴하여 동판에 자신의 얼굴을 새긴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이는 단연 No.2 데릭 지터였다. 2014년에 은퇴한 데릭 지터가 유니폼 판매에서 2위로 밀린 것은 2017년 애런 저지가 신인왕을 탄 이후였으며 지금까지도 저지 연간 판매량에서 한 번이라도 데릭 지터를 넘어선 현역 선수는 고작 일곱에 불과했다.
“오늘 안타 치면 테드 윌리엄스랑 타이기록이지?”
“네.”
“상품들 조금 더 전면으로 배치하고 버블 헤드는?”
“디자인 1차 수정본이 오후에 나올 예정입니다.”
“오케이. 이왕이면 다음. 늦어도 다다음 홈 시리즈까지는 매장에 상품 깔아보자고.”
그런 의미에서 아직 날짜 단위라고는 하지만 고작 데뷔 열흘 만에 데릭 지터의 저지 판매량을 넘어선 최수원의 존재는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 그리고 메뉴 개발 말인데요.”
“메뉴? 바게트 핫도그로 하기로 하지 않았어?”
“아니, 그 유타 컵밥에서 제안서가 들어와서요.”
“유타 컵밥? 거기서 왜?”
“그게 한국의 로컬푸드랍니다.”
“아!! 그게 한국의 로컬푸드였어? 흐음······. 스토리는 나쁘지 않은데. 일단 제안서 검토해봐.”
통계에 따르면 MLB 구장을 찾은 4인 가족이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금액은 약 250달러. 평균적인 티켓 가격이 30달러 수준이니 티켓을 제외하고도 거의 130달러에 가까운 금액을 경기장에서 쓰고 간다는 뜻이다.
“행사는 어떻게 진행할까요?”
“최수원 선수한테 협조 요청해서 메뉴 런칭 이벤트로 사인볼이나 사인배트 행사 진행하자. 아, 한정판으로 컵밥에 사용하는 컵을 이전에 그 아이스크림 때 사용했던 양키 스타디움 형태로 사출하는 것도 괜찮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익은 당연히 포괄적인 퍼블리시티권을 적용하여 선수에게 일부 귀속된다. 하지만 선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굿즈들을 판매함으로써 들어오는 소득보다 판매량으로 표기되는 본인의 인기에 대한 객관적 증거자료일 것이다.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시리즈 3차전.
경기가 시작됐다.
***
[양키스와 블루제이스의 시리즈 3차전. 양키스의 마운드에 게릿 콜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바로 지난 워싱턴과의 경기에서 7이닝 1실점으로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게릿 콜 선수. 오늘 경기 역시 좋은 모습을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네, 사실 어제 도밍고 로드리게스 선수가 좀 무너지는 바람에 양키스 불펜에 살짝 과부하가 걸렸거든요. 오늘 만약 게릿 콜 선수가 이전 경기처럼 7이닝. 혹은 그 이상을 소화해준다면 양키스 입장에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나에게 게릿 콜이 좋은 리더인가를 묻는다면 확실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녀석이 좋은 투수인가를 묻는다면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2020년대를 통틀어 그보다 확실히 한 수 위로 꼽을 수 있는 투수는 존재하지 않았노라고.
지난 2010년대.
클레이튼 커쇼와 저스틴 벌렌더의 시대 이후로 그들만큼 긴 시간 리그를 압도한 투수는 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게릿 콜은 분명 거기에 가장 가까운 남자였고 오늘 그가 보여준 피칭은 어째서 자신이 먼 미래 명예의 전당에 10수를 한 투수인지를 여실하게 증명했다.
혹자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10수 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게 맞다. 애초에 명전 후보가 되는 것부터가 10년 이상. 리그에 제법 족적을 남긴 선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선수들조차도 대부분이 첫 턴에 광탈하는 게 명전이다. 10년이나 거기서 5%이상 득표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의 10년 차 투표율은 거의 50%에 육박했다. 적어도 BBWAAA의 투표권자 절반은 그를 명전에 어울리는 선수라 판단했다는 뜻이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게릿 콜!! 1회 초 게릿 콜이 삼자 범퇴로 토론토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게릿 콜 선수 오늘 슬라이더가 상당히 좋습니다. 타자들이 거의 속수무책으로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고 있어요.]
오늘 토론토의 선발은 최고 104마일을 던지는 24세의 영건 제리 맥과이어.
커맨드가 조금 불안한 선수였지만 그래도 104마일이라는 구속은 그 불안한 커맨드를 감수할만큼 위력적이었다.
-딱!!
초구 99.7마일.
볼피의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이어지는 승부.
3구째.
조금 밋밋하게 들어온 슬라이더를 볼피가 두들겼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역시 파울. 슬라이더 구속이 무려 94.4마일이 찍혔다. 151km/h짜리 슬라이더라니. 진짜 터무니 없는 구속이다.
-뻐엉!!!
7구째.
2-3 풀카운트에서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넷!! 1회 말 선두 타자 앤서니 볼피가 볼넷을 얻어냅니다.]
[아주 좋은 출발이네요. 자, 그리고 타석에 2번 타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난 데뷔전 경기 이후 출장한 모든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 중인 최수원!! 최수원이 오늘 무려 아홉경기 연속 안타에 도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