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아이콘(3)
[아, 우리 최수원 선수가 심판에게 가볍게 어필을 하네요. 사실 이번 공은 조금 많이 빠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거 제가 보기엔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최수원 선수도 판정으로 좀 이득을 본 부분이 있었거든요. 방금 이건 편파 판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오늘 심판의 존이 전체적으로 후하다. 뭐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 참······. 어렵네요. 사실 지금 최수원 선수. 8경기 연속 안타를 앞둔 상황 아니겠습니까? 선발로 6이닝 무실점도 정말 대견하긴 합니다만, 이게 기록이라는 게 참 그렇단 말이죠.]
[네, 게다가 이 데뷔 경기 이후 연속 안타 기록이라는 건 평생에 한 번밖에 도전할 수 없는 기록이니까 더더욱 그런 면이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1회에 제이스 애덤스 선수가 좀 흔들렸을 때 타석에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죠. 만약 1회에 투아웃 만루에서 제이크 도밍고 선수가 뭔가 해줬더라면······. 우리 최수원 선수 노디시전이 아니라 승리도 가져가고. 제이스 애덤스 선수도 흔들린 상태에서 타격 찬스를 가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만약 KBO 경기였다면, 아니 설사 국제 경기였더라도 나오기 힘든 그야말로 전지적 수원 시점의 편파 중계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아침 일찍부터 이 야구 중계를 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수원의 팬일 것이며, 설사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팬이라고 해도 팀이 승리하는 한도 이내에서 최수원의 연속 안타 기록 정도는 이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아, 경기 계속되네요.]
***
당연히 내가 어필 좀 했다고 심판의 판정이 바뀔 수는 없었다. 애초에 스트라이크, 볼 판정은 구심 고유의 권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늘 심판이 후한 판정을 주는 공은 ‘커브’였다. 마이너에서 이미 AI심판이 커브의 판정에 인간과 조금 다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게다가 AI심판의 빅리그 도입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그게 조만간이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심판이 커브의 판정에 조금씩 후해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야? 본인이 꿀 빨때는 달달하게 잘 빨더니. 이제 마운드 넘겨줬다고 갑자기 이러는 건 좀 치졸한 거 아닌가?”
“좀 치졸할 수도 있지. 너라면 데뷔 이후 8경기 연속 안타 기록 같은 거 세울 기회인데 발버둥 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장렬히 산화할 수 있겠냐?”
“······. 젠장.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토론토의 포수인 메이슨 마틴이 나의 말을 너무 쿨하게 인정했다. 이건 좀 뜻밖이긴 했는데 덕분에 조금 곤란해졌다. 애초에 이 대화의 목적 자체가 메이슨 마틴과의 말싸움에서 이기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랑 다음 경기에서만 안타를 치면 ‘그’ 테드 윌리엄스랑 타이 기록이라고. 평생에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에 무려 테드 윌리엄스인데 이건 욕심이 날 수밖에 없지.”
“역시 양키스 놈이라도 테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건가?”
“애초에 난 양키스맨이 된 지 이제 석 달밖에 안 됐거든? 게다가 알는지 모르겠지만 테드 윌리엄스는 우리 고국에 영웅 중 하나야.”
“영웅?”
“어, 한국전쟁에 전투기 타고 참전한 양반이거든.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한 인물이지.”
“그러면 오늘까지 안타 치고 내일은 쉬어가는 걸로 그 양반의 기록에 존경심을 표하면 되겠네.”
“아니지. 지나간 전설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양반의 기록을 깨주는 거라고.”
그래서 굳이 테드 윌리엄스까지 언급해가며 대화를 조금 더 길게 끌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토론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게 아니라 토론을 관람하는 청중들을 설득하는 데 있다고.
지금 나와 메이슨 마틴의 대화에 청중은 누구일까? 당연히 우리 뒤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오늘의 구심이 바로 그 청중이다.
8경기 연속 안타 기록.
그것도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데뷔 직후’라는 단어가 붙는 그러니까 평생에 단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것만 하더라도 부담이 심할텐데 심지어 사무국에서 밀어주는 것 같은 뉴욕 양키스의 유망주가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설을 ‘영웅’이라고까지 띄워준다.
아마 지금 구심의 머릿속에는
─최수원 데뷔 이후 연속 안타 기록 7경기에서 종료!! 원인은 넓어도 너무 넓었던 존 때문? ─최수원의 입장 표명!! ‘개인적으로 영웅이라 생각했던 테드의 기록에 도달하지 못했던 점은 참으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수원과 테드 윌리엄스의 관계는? 어릴 적부터 선망하던 영웅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것을 막아선 어처구니 없는 심판의 판정!!
뭐 이런 생각들이 떠돌지 않을까?
잠시 타임을 요청했다. 솟구치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오늘 경기 템포가 비교적 빨랐으니 시간 여유가 좀 있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구심이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헬멧을 고쳐 쓰고 장갑을 동여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마 그분도 내가 본인의 기록을 깨준다면 정말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생각해. 전쟁의 불길에 타오르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뻗었던 손길이 이토록 찬란한 성과로 남게 됐다는 거. 커리어의 정점기에 야구를 포기하면서까지 했던 그 선택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는 거. 난 여기서 방망이로 그걸 증명할 생각이야.”
“······. 젠장······. 야, 네가 아무리 그렇게 감동적인 말을 한다고 해도 난 절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할거다. 절대 쉬운 공 주문하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나도 그런 건 원하지 않아. 남의 손에 만들어진 기록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어.”
메이슨 마틴이라고 했던가?
이 녀석 대체 왜 이렇게 쉬운 거지?
하지만 지금 내가 신경 쓰는 건 쓸데없이 감동 받은 포수 따위가 아니다. 지금 내 말에 숨겨진 함의는 내가 메이저리그의 소수 인종인 ‘아시안’이라는 점. 그리고 현재 MLB 사무국에서 야구의 세계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어딜 감히 백인과 황인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민단 말인가. 그것은 공정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인종 차별’이다. 아, 참고로 이건 내 의견은 아니고 미국 PC 주의자들의 공식 의견이다. 땡큐, 헐리웃. 땡큐, 디즈니.
두 번째.
앞서 나의 타임 요청으로 자신의 타이밍을 살짝 뺏겼던 제이스 애덤스가 빠르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날카로운 커브가 바깥쪽 코스를 공략했다.
하나 더 지켜본다.
-뻐엉!!!
0.01초의 침묵.
정말 아주 짧은 시간. 과연 구심은 무엇을 선택할까?
[볼!! 볼입니다!! 최수원!! 존에서 빠지는 공을 아주 잘 골라냅니다.]
볼카운트 1-1.
초구랑 거의 비슷한 코스였다.
하지만 상이한 판정이다.
마운드의 제이스 애덤스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저거 짜증났네.’
나라도 그렇겠다. 가뜩이나 마운드에 서면 별 것 아닌 일에도 화가 버럭버럭 나기 마련인데 잘 잡아주던 공을 갑자기 안 잡아주는데 짜증이 안날 수가 없다.
이럴 경우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세 가지다.
하나는 공을 존 안쪽으로 조금 더 밀어 넣어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뻐엉!!!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나 더 던져보는 것.
심판의 손이 또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세 번째 경우의 수인 투수가 좀 흔들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볼카운트는 이제 2-1.
아직 두 번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그건 마운드의 투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2-0에서 2-1가 된 거랑 0-1에서 2-1가 된 건 느낌이 다르다.
네 번째 공.
바깥쪽 높은 코스.
-뻐엉!!!
“스트라잌!!!”
아, 여기서 기습적인 속구라니.
그것도 이렇게 보더라인에 완벽하게 걸치는 공으로.
최고 94마일밖에 못 던지는 녀석이 빅리그의 프론트라이너급으로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게다가 이 녀석 오늘 확실하게 긁히는 날이다.
[이제 볼카운트는 2-2. 지금 분위기를 봤을 때 최수원 선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 과연 최수원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제이스 애덤스 와인드업!!]
다섯 번째.
일단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움직였다.
투수의 손을 떠나는 공의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커브다.
관건은 이게 과연 존에서 빠질만큼 크게 빠지는 공이냐.
아니면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이냐 하는 점이다.
찰나의 순간.
선택에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딱!!!!
존에서 살짝 걸치는 커브.
완전히 빠지는 공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다. 오른쪽 겨드랑이가 살짝 벌어졌다. 그만큼 배트에 실리는 힘이 줄어든다. 아마 6회에 피칭을 끝내자마자 타석에 섰더라면 답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10분에 가까운 휴식이 나의 근력을 상당히 회복시켰다.
몸통의 회전이 온전하게 실리지 않는 불완전한 자세.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억지로 방망이를 잡아당겼다.
2, 3루간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
토론토의 2루수가 몸을 날렸다.
빠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타구의 속도는 그의 움직임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심지어 운도 따랐다.
글러브의 끝을 살짝 스친 타구가 빠르게 움직이던 우익수의 방향과 반대쪽으로 굴절됐다. 우익수가 재빨리 몸을 틀어 타구를 줍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난 이 모든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나를 향해 소리치는 1루 코치의 커다란 동작뿐이다.
“고!!! 고고고!!!”
가능하다.
[최수원 빠릅니다!! 매우 빠릅니다!!]
1루까지 3초 중반대를 밟는 메이저 최상위 레벨의 주자들과 비교하자면 여러모로 부족했으리라. 내가 타격에서 괴물 같은 것처럼 그 녀석들 역시 주루 플레이만큼은 괴물 같은 놈들이니까.
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1루를 밟고 그대로 2루를 향해 돌진한 나의 주루는 그래도 인간계에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볼만했다.
2루 커버를 나온 유격수가 공을 받는 과정에서 베이스의 귀퉁이를 살짝 막아섰다. 물론 그걸 용서할 내가 아니다. 정의의 슬라이딩으로 가볍게 녀석의 발목을 위협했다.
그리고 충돌을 의식한 녀석의 제법 높은 점프.
매우 쓸데없는 동작이었다.
-뻐엉!!
높이 뛰어올라 공을 받은 녀석이 그대로 글러브를 내 몸에 가져다 댔다. 애초에 지금 포스아웃 상황도 아니고 태그아웃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 것도 없었다. 심판의 양손이 올라왔다.
“세이프!!!”
[안타!! 안타입니다!! 7회 말 원아웃, 0:0의 팽팽한 상황에서 최수원의 2루타!! 양키스가 득점권에 주자를 올려 보냅니다!!]
[이걸로 데뷔 이후 8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가는 최수원 선수!! 메이저리그 전체로 따졌을 때 역대 4위의 기록입니다. 위로는 12개로 공동 1위인 에디 머피와 조던 워커. 그리고 9개로 3위를 기록 중인 테드 윌리엄스만이 남았습니다.]
***
[양키스와 블루 제이스의 시리즈 1차전. 양키스의 2:0 승리!!]
[8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가는 최수원!! 4타수 1안타!! 그리고 6이닝 무실점!!]
[승리 추가에는 실패. 하지만 공수양면 모두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최수원!! 과연 테드 윌리엄스를 넘어설 수 있을까?]
[메이슨 마틴 ‘그는 정말이지 로망으로 가득한 선수다. 나는 그를 존중하며 비록 오늘 경기에는 우리가 패배했지만 그를 존중하는 만큼 다음 경기에서 꼭 승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