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아이콘(2)
“사무국에서 왜 이렇게 두 사람을 푸쉬하라고 했는지 좀 알겠네.”
“그러게요. 확실히 둘이 있으니까 그림이 좋아요. 비주얼도 괜찮고. 나이도 이제 둘 다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 부상 같은 것만 없으면 오랫동안 활약할 수도 있고요.”
“아니, 난 그것보다 저 두 사람 시너지가 좋던데? 요즘 애들이라 그런지 방송도 되게 자연스럽고.”
“뭐, 요즘 애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동영상 기반의 SNS에 익숙한 세대니까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랑은 다르죠.”
“이거 왜 이래? 우리 같은 늙은이라니. 나 이래 봬도 팔로워 180만의 인플루언서라고.”
“어차피 그거 다 회사에서 관리해주는 거잖아요. 아무튼 느낌이 좋아요. 롭 맨프레드의 스타 마케팅도 오타니 쇼헤이 이후로는 딱히 들이는 공에 비해서 성과가 없었는데 얘들은 어쩌면 터질지도 모르겠네요.”
닐 스미스가 PD의 의견에 동의했다.
“작년에 알렉스도 나쁘진 않았는데 너무 4차원적이고 애들 같아 보였단 말이지. 근데 이게 최수원이랑 같이 나오니까 또 상당히 그림이 괜찮아. 알렉스가 완전히 4차원이라면 최수원은 그래도 절반 정도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느낌? 만약 올해에 둘 다 작년 알렉스 정도 성적만 내준다면 정말 볼만하겠어.”
“가능하지 않을까요? 알렉스도 작년보다 시작 페이스가 좋고, 그 수원이라는 아이도 성적 보니까 완전 미쳤던데요.”
“글쎄, 이제 고작 아홉 경기 지났을 뿐이니까. 그리고 원래 빅리그라는 게 마이너도 제대로 못 거친 신인들에게는 조금 더 가혹한 편이거든. 무엇보다 그 녀석들 아시안이랑 라틴이잖아. 심판들이 과연······.”
“어? 뭐에요? 닐 지금 인종 차별하는 겁니까?”
“아니, 무슨 헛소리야. 인종 차별이라니!! 내가 블랙인데. 그냥 빅리그 전반적인 분위기가 신인이나 백인 외의 인종들한테는 좀 그렇다. 뭐 그런 이야기지.”
***
-뻐엉!!!
“스트라잌!!! 아웃!!”
[4회 초!! 선두 타자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을 끌어내는 최수원 선수!! 이걸로 오늘 경기 벌써 다섯 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방금 커브가 상당히 예리하게 들어갔습니다. 특히 바깥으로 살짝 빠지는 움직임이 아주 좋네요.]
나의 두 번째 선발 등판이자 홈구장에서의 첫 번째 선발 등판 경기는 상당히 순조롭게 흘러갔다. 커브가 좋았느냐고?
그래, 제법 좋았다.
이미 미끄러운 공에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던지면 던질수록 어쩌면 ‘적응’을 넘어서 이게 커브를 던질 때는 내 손에 더 맞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다. 뭐랄까? 회전수가 오히려 더 높아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한국에서 박광식 코치님한테 커브 배울 때 좀 미국식으로 배운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간 커브는 본래 ‘더’ 떨어지는 공이다.
그리고 내 팔이 완전한 오버핸드가 아닌 오버핸드와 스리쿼터 사이의 어느 지점임을 고려할 때 우타자 기준 바깥으로 조금 휘어나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변화가 매우 미미했다면 오늘은 그게 약간 유의미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차이 정도다.
[자, 이제 타석에 토론토의 3번 타자 코리 맥그리거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0.333/0.395/0.576으로 매우 훌륭한 타격을 보여주고 있죠? 사실상 지금 토론토에서 가장 위협적인 타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앞선 타석에서는 우리 최수원 선수도 내야 안타를 허용했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최수원 선수. 이닝을 더해갈수록 공이 점점 더 좋아지는 느낌이거든요.]
하지만 오늘 내 활약의 1등 공신은 조금 더 움직임이 좋아진 커브가 아니었다.
[초구!! 바깥쪽 높은 공!!]
-뻐엉!!!
“스트라잌!!!”
조금, 아니 내가 봐도 너무 후하다 싶은 판정.
토론토의 3번 타자인 코리 맥그리거가 정말 이게 맞냐는 표정으로 심판을 한 번 바라봤다. 물론 심판의 표정은 매우 단호했다. 그래, 잘한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바깥쪽. 이번에는 낮은 코스.
-따악!!
1루 파울라인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파울볼.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그래, 솔직히 이런 공을 쳐서 페어 지역으로 보내는 건 좀 말이 안 된다. 이건 내가 들어가서 두들겨도 셋 중 하나 정도 안타 만들까 말까다.
그리고 세 번째.
-뻐엉!!!
[아, 하나 살짝 빼봅니다만 코리 맥그리거 넘어오지 않습니다. 볼카운트는 이제 1-2.]
아, 이 정도까지 빠진 건 그래도 안 잡아주네.
네 번째.
바깥쪽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며 외곽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커브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심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 경기 네 번째 삼진.
그래, 역시 야구는 팀 게임이다.
심판이 우리 팀이면 그건 그냥 무적이다.
-딱!!!
초구 타격.
중견수인 제이크가 가볍게 공을 잡아내며 이닝이 마무리됐다.
[4회 초. 최수원이 토론토의 공격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이닝 마무리 짓습니다.]
[사실 오늘 선발 투수의 무게감만 보자면 토론토 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게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최수원 선수. 정말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토론토의 타선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오늘 나랑 맞대결하는 토론토의 선발은 제이스 애덤스라고 6년 9천만 달러짜리 투수다. 토론토의 2선발이라고 볼 수 있는 투수인데 첫 번째 등판에서 손톱부상으로 등판 일정이 조금 밀린 끝에 나와 맞대결이 성사가 돼버렸다.
손톱부상이라는 말에서 대충 알 수 있듯이 이 녀석 커브볼 투수로 예전에 다저스에서 뛰었던 커브 마스터 리치 힐처럼 속구보다 커브를 더 많이 던진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트로이 존슨의 헛스윙 삼진!!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선발로 출장해서 정말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최수원 선수!! 하지만 이 선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 1일 데뷔전 이후로 지금까지 출장한 모든 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7경기 연속 안타를 이어가고 있거든요. 20살. 데뷔전 이후로 한정할 경우 양키스 역대 최고. MLB 전체를 통틀어서도 4번째로 긴 기록입니다. 과연 오늘 최수원 선수가 8경기 연속으로 그 기록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저는 물론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선수 타격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거든요.]
데이터상으로 제이스 애덤스가 던지는 커브는 크게 구분했을 때 세 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게 현장에서 뛰는 선수 입장에서는 사실 그 구분이라는 것도 별 의미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 팔 각도와 손가락 힘의 배분 그리고 심지어 팔을 휘두르는 속도까지 적당히 조절해가며 정말 ‘감각’으로 커브를 제어한다.
-뻐엉!!!!
“스트라잌!!!”
초구. 존을 전혀 스치지 않는 커브볼에 루킹 스트라이크.
와, 뭐 이딴 공을 스트라이크를 잡아준다고? 싶은 공이었는데 참았다. 심판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 오늘 심판 녀석. 내가 마운드에 섰을 때는 든든한 나의 편이었지만 타석에 서면 금세 적으로 돌변하는 타입이다. 이런 놈들은 괜히 내가 어필 같은 거 한 번 잘못하면 금방 쪼잔해져서 내 차례에 판정을 개똥같이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단 참는다.
두 번째.
-뻐엉!!!
“스트라잌!!!”
와, 씹.
잠깐만.
이걸 스트라이크를 부른다고?
심판 이거 눈이 달리긴 한 건가?
[아, 최수원. 공 두 개를 그냥 흘려 보냅니다.]
[오늘 심판 바깥쪽 판정이 상당히 후한 경향이 있네요.]
그래, 어디 죽이되던 밥이되던 한 번 해보자.
세 번째.
바깥 코스. 앞선 두 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커브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니, 앞선 두 개랑 크게 달랐던 커브볼이었다.
폼도 똑같고 날아오는 궤적도 비슷해 보였는데 훨씬 빨랐고 훨씬 덜 떨어졌다. 커브는 커브인데 그 궤적과 속도가 마치 슬라이더 같다. 그래, KBO에서는 슬라이더를 커브처럼 쓰는 변태들이 잔뜩이니, MLB에는 커브를 슬라이더처럼 던지는 변태가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헛스윙 삼진!! 제이스 애덤스가 최수원 선수를 상대로 삼구삼진을 뽑아내네요.]
[이어지는 9번 타자 호세 트레비뇨!!]
-딱!!
[높게 뜬 타구!! 내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호세 트레비뇨의 내야 뜬공 아웃!! 양키스의 4회 말 공격이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습니다.]
[4회가 끝난 시점에서 점수는 여전히 0:0. 양 팀 정말 기대 밖의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경기장을 찾은 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일겁니다. 아시다시피 양팀 모두 최근 타격감이 정말 좋지 않습니까? 현재 양키스는 양대 리그 득점 2위. 토론토도 7위에 올라와 있거든요.]
[맞습니다. 전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최수원 선수를 칭찬하고 싶어요. 솔직히 제이스 애덤스 선수야 긁히는 날에 언터쳐블급 포스를 뽐내는 거를 이미 몇 차례 보여 줬거든요. 그런데 그런 선수를 상대로 정말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팽팽하게 경기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경기가 이어졌다.
타석에서는 나의 원수였던 심판이 마운드에 서자 마자 또다시 나의 절친으로 둔갑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6이닝 5피안타 1볼넷 무실점.
6회 초에는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다. 1회부터 좀 전력으로 공을 던졌더니 손가락에 힘도 좀 빠졌고 생각처럼 공도 잘 뻗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6이닝 무실점이다.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에게 제프 클라크 감독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제 6회 말 공격에서 좀 푹 쉬고 7회 말에 타석에 대비하면 된다.
오타니룰이 없던 KBO와 다르게 빅리그는 오타니룰이 있어서 투수가 교체되도 지명타자의 소멸 따위 없이 그냥 이대로 지명타자로 들어갈 수 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래, 타자들이 방망이를 붕붕 돌린다.
솔직히 오늘 심판을 상대로 안타를······. 아니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기란 제법 힘든 일이다.
-딱!!!
저렇게 공을 두들기더라도 파울로 끝나거나 타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가 않는다. 애당초 마린스도 아니고 저런 공은 무조건 아웃······. 어?
[오스틴 배틀!! 행운의 안타!! 원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 6번 타자 제이크 도밍고가 올라옵니다.]
삼자범퇴를 예상했는데 여기서 안타가 나온다고? 이렇게 되면 제이크나 트로이 둘 중 하나만 더 출루에 성공해도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쉬고 체력을 회복하고 나가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건 좀 힘으로 잡아 당겨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그만한 완력이 나와줄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딱!!!
그리고 제이크가 깔끔하게 나의 그런 고민을 날려주었다.
[유격수 잡아서 2루에!!]
“아웃!!”
[그리고 다시 1루로!!]
“아웃!!!”
깔끔한 더블 아웃.
6회 말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이어지는 7회 초.
제이스 휘태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선발 경쟁에서는 탈락했지만, 솔직히 저 녀석은 타순 두 바퀴 이상 돌리는 선발보다는 불펜 쪽이 더 어울린다.
-딱!!!
[좌익수 정면!! 앙헬 카브레라가 타구를 가볍게 처리합니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붙을만한 피칭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제이스 휘태커가 7회 초 토론토의 공격을 무사히 막아냈다.
그리고 다시 7회 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선두 타자인 트로이 존슨이 내야 땅볼 아웃으로 물러났다.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점수는 0:0.
제이스 애덤스의 투구 수는 지금까지 91개.
초구.
바깥 코스. 존에서 빠져나가는 커브볼.
-뻐엉!!!
“스트라잌!!!”
앞선 타석과 마찬가지로 심판이 이 개똥 같은 공에 또다시 스트라이크를 줬다. 하지만 앞서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난 이제 더 이상 마운드에 서지 않는다.
내가 한치의 주저도 없이 등을 돌려 심판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왓?”
지극히 합리적이며 타당한 어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