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아이콘(1)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
팀의 중심 타자인 애런 저지의 부상과 시리즈 마지막 경기 패배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팀의 분위기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우리는 개막 이후 9경기에서 6승 3패. 세 번의 시리즈 모두를 가져왔다. 또한, 애런 저지의 햄스트링 부상 역시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부분 근육 파열로 3주. 뭐, 그 정도면 본인 노력에 따라 조금 더 빨리 복귀할 수도 있을 테고 쉬는 김에 오른쪽 발목도 같이 치료받아서 조금 더 완전한 상태로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최수원!! 리그 MVP를 향한 위대한 여정의 시작!!
─양키스 125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신인!!
─제2의 디마지오? ‘오늘도 최수원은 안타를 쳤나요?’ ‘아니요, 오늘은 홈런을 쳤습니다.’
─데뷔 이후 7경기 연속 안타!! 만 20세 이하 데뷔 기록 가운데 역대 8위!!
잠시 스마트폰을 펼쳐 뉴스를 읽었다.
호들갑스럽기 짝이 없는 이 뉴스들은 놀랍게도 한국 포탈의 뉴스들이 아니었다. 그쪽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낯뜨거운 수준이라 차마 보기 힘들 정도다.
마린스 애들이 단톡방에 스샷을 올려주는데 대충 훑어봤을 때 박지성의 심장과 손흥민의 양발 그리고 나의 방망이가 대한민국의 3대 신기인 건 확정이고 한국의 역대 스포츠 No.1 자리에 나를 놔야 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야구팬과 축구팬들의 병림픽이 날짜를 넘기면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 확인한 기사들은 다름 아닌 뉴욕 신문사들의 기사였다.
얘들 예전에는 내가 가지도 않은 클럽 갔다는 헛소문을 퍼트리더니 이제는 고작 9경기 지났는데 무슨 리그 MVP부터 양키스 125년 역사까지 다양하게 소환 중이다. 심지어 저 조 디마지오 이야기는 이게 칭찬인지, 아니면 돌려서 먹이려고 그러는 건지 모를 정도다. 무려 56경기 연속 안타를 친 선수랑 이제 고작 일곱 경기 연속 안타 친 나랑 벌써 비교하는 건 인간적으로 좀 심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잠시.
─알렉산더 맥도웰 시즌 3호 4호 멀티 홈런 작렬!!
─신인왕을 넘어 MVP를 향하여!! 알렉산더 맥도웰 20살 젊은 천재의 대활약!!
─알렉산더 맥도웰 커리어 일곱 번째 멀티 홈런!! 역대 가장 빠른 페이스. 과연 루스를 뛰어 넘는 것은 가능할까?
알렉스가 멀티 홈런 하나 추가한 거로 베이브 루스까지 소환하는 걸 보고 있자니 역시 자본주의의 나라구나. 트래픽에 목숨 거는 어그로성 제목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조차 능가하는구나 싶었다.
근처에 앉아있던 타일러 비트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스완, 뉴욕 돌아가면 뭐 할 거야?”
“뭐 하기는 밤도 늦었는데 자야지.”
“내일 노는 날이잖아. 달려줘야지.”
“응, 나 스무살.”
“아······.”
한국과 다르게 미국의 경우 음주 연령은 21세다. 18살에 총은 살 수 있지만, 술은 살 수 없는 나라. 그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리고 내일은 어차피 일정이 있어서.”
“일정? 무슨 일정?”
“ESPN의 TV쇼에 출연하기로 했어.”
전국 단위로 송출되는 TV쇼의 출연은 아무리 맹활약을 하고 있다고 해도 데뷔한지 이제 고작 아홉 경기에 출장한 선수에게 들어온 제안치고는 너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나름의 ‘명분’이 존재하긴 했으니 바로 일요일 저녁에 전국으로 송출되는 ESPN의 야구 방송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이 그 명분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에서도 일요일 경기는 낮시간에 치러진다. 그런데 매주 일요일 딱 한 경기는 동부 표준시 기준으로 저녁 7시에 열리는데 1990년부터 ESPN에서 그 한 경기를 전국 단위로 중계를 시작하면서 생긴 전통이다.
야구가 경기 숫자가 조금 많아서 시청자도 분산되고 덕분에 NBA나 NFL등에 비하면 한 경기당 시청자 수가 조금 적은 편인데 이 경기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만큼은 예외라서 경기당 시청자 수가 평균적으로 180만을 넘어간다.
NBA가 보통 경기당 150만 내외. 먼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이나 웬즈데이 나이트 베이스볼의 경우 80만에서 90만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ESPN을 대표하는 중계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이에 관련한 선수들의 사전 인터뷰나, 간단한 쇼등을 구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 나에게 들어온 출연 제안이 바로 그 일환이었다. 그래, 돌아오는 토론토와의 4연전을 끝낸 직후에 있을 메츠와의 원정 2연전 가운데 2차전 경기가 바로 이번 주 선데이 나이트 베이스볼 경기로 선정이 됐다.
[마침내 마주하는 두 천재!! MLB의 차세대 아이콘을 가린다!!]
회귀하기 전 비인기 팀에서 뛰던 시절에는 포스트시즌 진출권이 걸린 중요한 경기임에도 찾아오지 않았던 전국방송 출연이었다.
***
코네티컷의 한 스튜디오.
“전국의 야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저희가 아주 특별한 손님 두 분을 어렵게 어렵게 모셨습니다. 작년 양대 리그 역대 최연소 신인왕이자 최연소 올스타 그리고 최연소 올스타 MVP를 차지했던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
“닐, 오래간만이에요.”
“하하, 작년 8월에 본 이후로 처음이니 8개월 만이군요. 못 본 사이에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한창 클 시기니까요. 그보다 저기 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데 인사는 천천히 하고 얼른 소개해주시죠.”
“워워, 재촉하지 마세요. 원래 방송이라는 게 일단 스타팅에 제일 좋은 선수를 내보내야하는 야구와는 달리 주인공은 분위기를 좀 고조시키고 뜸도 좀 들인 다음에 등장시켜야 하는 법입니다.”
“어라? 그런 거라면 저 너무 빨리 나온 것 같은데요. 다시 들어가서 대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쉽지만 오늘은 순서에 맞게 나오신 거 맞습니다. 원래 이 바닥은 항상 새로운 얼굴을 환영하는 법이거든요. 자 소개하겠습니다. 세계에서 1년에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남자. 저 알렉산더 맥도웰이 매번 자기 라이벌이라며 떠들고 다녔던 사나이. 101마일을 던지는 홈런왕!! 최수원 선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수원입니다.”
닐 스미스라는 흑인 사회자가 조금 과장된 제스쳐로 나를 환영했다.
“와, TV로 볼 때보다 키가 훨씬 크신 것 같네요. 6피트 4인치?”
“아뇨 3.5인치 정도 될 겁니다.”
“그렇군요. 알렉스가 5피트 11인치니까 거의 5인치 차이네요.”
닐의 키 이야기에 알렉스가 발끈했다.
“누가 5피트 11인칩니까. 6피트에요. 6피트.”
“네? 분명 프로필상에 5피트하고 11인치 아닌가요?”
“그건 작년 수치고요. 그때도 11.5인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더 컸어요.”
사실 5피트 11인치면 센티로 하면 180이라서 절대 작은 키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도 179랑 180이랑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 없지만, 이상하게 180이 뭔가 미묘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미국도 5피트 11인치와 6피트 간에는 미묘한 무언가가 존재했다. 잠깐의 투닥거림이 지나가고 키와 몸무게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확실히 101마일짜리 공을 던진다는 건 타고난 신체조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 참. 그리고 최수원 선수에게 항상 묻고 싶던 질문이 있었는데요. 예전에 알렉스가 쇼에 출연했을 때 자기 라이벌로 무려 테드 윌리엄스와 최수원 선수를 들었단 말이죠. 그러면서 무슨 청소년 대회에서 숙명의 라이벌임을 서로 직감했다느니. 태평양을 넘어선 교감을 나누고 있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게 모두 사실인가요?”
숙명의 라이벌부터 태평양을 넘어선 교감에 테드 윌리엄스까지.
내 입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그냥 남이 말하는 걸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그라드는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근데 또 이 와중에 알렉스 녀석 표정이 너무 당당하다. 아니, 당당함을 넘어서 뭔가 ‘기대’ 같은 것이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으드득······.
내 취향에는 맞지 않은 오글거리는 스토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겉보기야 20살이지만 속내는 30대 중반이다. 아무리 강력한 중2병도 완치되기에 충분한 나이다. 하지만 참았다. 이건 다 비즈니스다. 비즈니스.
“네, 알렉스와 처음 WBSC 2025 U-18 Baseball World Cup에서 만났을 때부터 녀석과는 합이 잘 맞았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1년이라도 빠르게 MLB에 진출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진학조차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아, 그러면 혹시 최수원 선수가 ‘수억 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국제 유망주 자격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도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의 결정이 영향을 미쳤나요?”
“어느 정도는요. 사실 야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MLB는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전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는 ‘특권’이 있었기에 굳이 미국에 와서 마이너 생활을 거치는 것보다 고국의 프로리그에서 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고 보다시피 그건 사실로 증명됐습니다.”
기껏해야 20분 정도 되는 짧은 대화.
하지만 역시 스포츠 중계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는 ESPN이라고 해야 할까? 이어지는 질문 질문들이 상당히 알찼다. 나와 알렉산더 맥도웰을 적당히 띄워줄 수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또, 많은 팬들이 최수원 선수에게 궁금해하는 부분인데. 혹시 전업 타자로 전향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물론 101마일을 던지는 건 대단합니다만 사실 OPS 1.902는 대단함을 넘어서는 곳에 있는 숫자잖습니까.”
“잠깐만요. 이건 제가 먼저 제 의견을 좀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내가 뭐라 답하기 전 알렉산더 맥도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닐과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전 수원이가 선택한 투타겸업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홈런왕 경쟁에 부담감 느끼는 건 절대 아니고요. 수원이 같은 경우 계속 투수를 해왔거든요. 물론 20살 이후로 야수 전환하는 선수들도 종종 있긴 하지만 그런 선수들치고 수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좀 두서가 없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전 수원이를 타격이 끝내주는 투수라고 생각을 합니다. 101마일을 던지는 타자가 아니라요.”
“아, 그러니까 홈런을 73개 치는 투수이지, 101마일을 던지는 타자가 아니다.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살짝 말장난 같기는 합니다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요. 최수원 선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KBO에 뛰던 시절에도 참 많이 나오던 이야기였습니다. 뭐, 합리적으로 판단해보자면 아마 지금 당장의 성적만 따지면 제가 타자로 전업해서 최대한 많은 경기에 나오는 게 WAR 측면에서는 더 높게 나올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의 숨 고르기.
그리고 시선은 사회자에서 메인 카메라로 자연스럽게.
“합리성만을 따진다면 전 지금 빅리그가 아니라 한국의 리그에서 5년을 더 뛰고 국제 유망주가 아닌 메이저 계약으로 미국에 진출했을 겁니다. 또한, 합리성만을 따진다면 미키 맨틀은 그런 허슬 플레이를 하지 않았겠죠. 또한, 데릭 지터의 The flip는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플레이?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귀와 귀 사이의 작은 덩어리보다 여기 가슴에 쿵쿵거리는 녀석의 의견을 따르는 쪽이 더 멋진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참 뭐랄까? 어째서 알렉스가 자기 숙명의 라이벌로 꼽았는지 알 것 같은 말이로군요.”
뭐지?
욕인가?
화요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시리즈 1차전.
나의 두 번째 등판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