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승리요정(4)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어느 유명 법률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성공한 변호사가 MLB의 커미셔너에 도전할 기회를 두고 ‘평생의 꿈’을 이룰 기회라며 고민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MLB의 커미셔너는 세계 스포츠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를 꼽으면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위치다. 30개 구단 구단주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선출직이다. 임기는 5년이며 2회의 연임이 가능하다.
현재 MLB의 커미셔너인 롭 맨프레드는 지난 2014년에 MLB의 커미셔너로 선출이 되어 무며 두 번의 재신임을 얻었다. 규정상 가능한 연임 횟수를 모두 채운 것이다.
그가 MLB의 커미셔너로 있는 동안 메이저리그는 수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무려 150년 역사를 지닌 이 야구라는 종목이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생각해보면 그 변화들은 그야말로 ‘혁명’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변화들이었다.
그렇게 13년.
롭 맨프레드는 이제 임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다.
야구의 인기를 70년대 이전 수준으로 돌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NFL의 아성은 견고했고 그것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장벽과도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MLB가 그저 NBA에게 추월을 허용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야기했다.
하지만 롭 맨프레드는 동의하지 않았다.
세계 스포츠 시장은 크게 보자면 미국과 그 외로 나뉜다.
그 외를 조금 더 세분화하면 유럽과 동북아 삼 개국. 영연방 그리고 그 외로 나눌 수 있다.
풋볼은 미국을 정복했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너무나도 미미하다. 심지어 얘들은 그 외로 나갈 의지조차 없다. 이미 세계 스포츠 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싸커는 유럽을 정복했다. 아니, 어쩌면 현시점에서 가장 ‘세계’에 가까운 스포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세계 스포츠의 절반인 미국에서는 진짜 축구를 하기 전의 아이들이나 계집들이 하는 나약한 운동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크리켓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인도를 정복한 스포츠이기에 자연스럽게 영연방에서 가장 잘 나가는 종목이 됐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동남아 지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한다.
그렇다면 야구는 어떨까?
미국 시장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스포츠이며 동북아 삼 개국 가운데 두 개 국가를 사실상 정복한 종목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었다.
하지만 롭 맨프레드는 바로 거기서 희망을 찾았다.
NFL은 세계화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축구에 이어 ‘세계화’를 선점한다면? 물론 야구는 여전히 저변이 넓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즐기는 스포츠는 야구의 ‘친척’이 아니던가.
“호주 상황은 좀 어때?”
“수치적으로 봤을 때 지속적으로 성장 중입니다. 노아 스미스 그 친구가 작년 대회에서 활약했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루카스 윌리엄스 그 친구는?”
“지속적으로 설득 중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인디언 프리미어 리그 쪽으로 마음이 좀 기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저점이 확실하고 최근 인도 성장과 함께 성장세도 꽤 가파르니까요.”
“그래봐야 최고 연봉자가 이제 겨우 700만 달러 남짓인 점은 충분히 강조하고 있겠지?”
“작년에 스폰서 수입이 잔뜩 붙어서 3,700만이나 벌었다고······. 인도 시장이 워낙에 크니까요.”
호주의 프로 크리켓 선수를 꾸준하게 회유했으며 그 가운데 몇몇을 메이저리그로 불러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동시에 WBC를 지속적으로 푸쉬했고 마침내 2027년 WBC에서 크리켓 선수 출신의 빅리거가 대활약을 보이며 호주팀을 4강까지 올려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롭 맨프레드는 이미 현대 야구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한 일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쇠락해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던 야구를 그래도 미국의 두 번째 스포츠 정도 자리는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세계화’라는 세 글자에서 적어도 ‘세’ 정도는 이뤄냈다고 자신해도 될 정도다.
“아, 그리고 지금 뉴욕 쪽도 조금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뉴욕? 알렉스랑 스완의 라이벌리 말고 또 뭐를?”
“아, 그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거 조금 더 크게 띄워주셔도 될 것 같아요.”
“알렉스랑 스완이랑 홈런 레이스가 지금 MLB.com 메인 아니야? 이 이상이 필요할까? 어차피 서브웨이 시리즈까지는 좀 남았잖아.”
“네, 그래서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자료들 좀 보시죠.”
***
햄스트링 부상으로 병원에 이송된 애런 저지를 대신해서 2루에 섰다.
팀 내에서 선의의 경쟁 좀 해보나 했더니 곧바로 부상이라니. 그나저나 크게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좀 걱정이다.
앤서니 볼피와 애런 저지에게 연속해서 안타를 허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7:8이라는 팽팽한 점수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둘 모두일지도 모르겠다.
6회 초 원아웃에 주자 2루 상황에서 워싱턴 내셔널스가 리차드 브라운을 강판시켰다. 그를 대신하여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블레이크 로메로. 올해 23살. 최고 103마일을 뿌리는 우완 강속구 투수였다.
두 걸음 반.
도루까지는 생각이 없었다. 굳이 3루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럴싸한 안타 하나면 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위치가 2루다. 괜히 득점권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타석에 3번 타자 타일러 비트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가 올해로 3년 차인데 이번 시즌 지금까지 활약이 정말 대단합니다. 작년에도 물론 0.266/0.320/0.456에 26홈런으로 2년 차치고는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만 올해는 지금까지 0.303/0.351/0.606에 2홈런으로 한단계 스탭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항상 체중 조절에 애를 먹던 선수였는데 올해의 경우 그냥 5kg 정도를 더 증량한 것이 좋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코너 외야수의 경우 저 정도 체중도 나쁘지 않거든요.]
타일러 비트는 지난 스프링캠프 때 옆집을 썼던 인연 덕분에 야수들 가운데서는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녀석이었다. 나를 볼 때마다 살 안 찌는 체질이 부럽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내가 볼 때는 저 녀석 체질을 떠나서 그냥 무식할 정도로 많이 먹는다. 솔직히 먹는 양을 생각하면 저 정도 체중이 유지되는 게 용할 정도다.
-부웅!!
“스트라잌!!”
높은 코스 빠른 공.
전광판에는 101마일이 찍혔다.
[초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블레이크 로메로. 확실히 공이 쭉쭉 뻗어나가는 느낌입니다.]
[구속도 구속인데 회전수가 2,542회로 리그 탑급이에요. 타자 입장에서는 정말 공이 떠오르는 느낌일 겁니다.]
라이징 패스트볼은 없다.
이론적으로 라이징 패스트볼. 그러니까 속구가 떠오를 만큼 양력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회전수가 3,500은 돼야 하는데 현재 리그에서 가장 회전수가 높은 투수도 2,800이 넘지 않으니 그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공이다.
다만 타자가 공을 치는 매커니즘이 공의 시작점과 중간 위치를 통해 그 공이 지나갈 곳을 ‘예측’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 예측보다 훨씬 높은 지점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치 공이 떠오르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는 최대한 수평적 움직임이 없는 일명 ‘작대기 포심’을 던지는 투수의 회전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효과를 극대화된다. 지금 마운드에 선 블레이크 로메로처럼.
-딱!!!
포수 뒤편 내야 관중석을 보호하는 그물에 직격 하는 파울.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타일러 비트가 몇 차례 고개를 젓고는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세 번째.
마찬가지로 빠른 공.
최고 103마일. 리그 탑급의 회전수를 자랑하는 포심을 던지는 23살의 투수가 선발도 셋업도 마무리도 아닌 중간계투로 나오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커맨드가 좋지 않거나. 혹은 변화구가 변변치 않거나.
블레이크 로메로의 경우는 후자였다.
-딱!!
타일러 비트의 방망이가 몸쪽으로 파고드는 속구를 두들겼다.
강한 타구가 2루수의 키를 훌쩍 넘겨 우중간으로 떨어졌다.
[최수원!! 빠릅니다!!]
3루 코치의 팔이 빠르게 돌아갔다.
[3루 지나 홈까지!!]
워싱턴의 우익수가 공을 쥐고 그대로 홈까지 공을 뿌렸다. 빅리그의 코너 외야수다운 강한 어깨. 마치 빨랫줄과 같은 송구가 정확하게 포수의 미트로 향했다.
홈플레이트의 절반 가량을 막고 있는 포수를 피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어쩌면 슬라이딩을 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내 왼손이 홈플레이트를 스치고 거의 0.3초 정도 후에야 포수의 미트에 공이 들어왔으니까.
“세이프!!”
[세잎!! 세잎입니다!! 6회 초 8:8!! 타일러 비트의 1타점 적시 안타!! 애런 저지를 대신하여 2루에 나가 있던 최수원이 타일러 비트의 안타에 홈을 밟습니다!!]
[와, 최수원 선수 정말 빠릅니다. 지금 2루에서 홈까지 거의 7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거든요. 만약 애런 저지 선수였더라······.]
[아, 지금 저지 선수 소식이 들어왔네요. 현재 병원에 무사히 도착해서 정밀검사에 들어갔다고 하네요. 부디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경기가 계속됐다.
우리는 6회 초에 추가점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6회 말에 제이스 휘태커를 상대로 또 다시 불방망이를 선보이며 3점을 추가하며 워싱턴 팬들의 엉덩이를 경기장에 조금 더 붙여두는 데 성공했다.
7회.
그리고 8회.
원아웃.
주자는 없는 상황.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자,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현재 점수는 8:11. 양키스가 석 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네, 비록 석 점을 뒤지고 있긴 합니다만 오늘 양키스 타자들의 컨디션도 괜찮고 아직 아웃카운트도 다섯 개나 남아 있거든요. 충분히 역전할 수 있습니다.]
마운드의 투수는 루이스 로드.
워싱턴의 셋업맨으로 지난 2022년 워싱턴이 자신들의 마지막 기둥뿌리를 팔아먹으며 데려왔던 우완 투수다. 올해 나이 26세. 최고 구속은 102마일.
당시 워싱턴에서 팔려나갔던 기둥뿌리가 지금까지 MVP 한 번에 MVP 5위 이내에 세 번이나 랭크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트레이드 자체는 철저하게 실패한 트레이드였지만, 그래도 그나마 워싱턴 팬들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이 루이스 로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앞선 블레이크 로메로와 마찬가지로 딱 한가지 공만 던지는 투수였는데 그게 ‘커터’였다. 그래, 무려 최고 102마일짜리 커터다.
무려 102마일짜리 커터를 던지는 투수가 마무리가 아닌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녀석이 새가슴이라는 점. 그리고 컨트롤이 컨디션에 따라 조금 들쭉날쭉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8회 말에 석 점이나 앞서는 상황에서는 첫 번째 약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두 번째 약점 역시 앞선 볼피를 상대하던 것으로 미뤄봤을 때 오늘은 적용되지 않는 날이었다. 따라서 그 모든 조건들을 헤아려봤을 때 지금 마운드에 선 루이스 로드는 분명 리그 탑 급의 불펜이었다.
-딱!!!
근데 이걸 어쩌나.
사실 이 녀석 내가 회귀하기 전에 우리 팀에 불펜 투수였다. 물론 구속은 지금이 3마일 정도 빠르긴했지만, 그 궤적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쳤습니다!! 최수원!! 초구를 그대로 잡아 당긴 강한 타구!! 담장!! 담장!! 담장!!!! 넘어!! 갔습니다!! 맙소사!! 최수원!! 최수원의 시즌 다섯 번째 홈런포!! 믿기지 않는 활약!! 최수원이 루이스 로드를 상대로 솔로 홈런포를 추가합니다!!]
그리고 나의 활약에 힘입어 마리······, 아니. 양키스는 10:12로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