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86화 (286/305)

286화. 승리요정(3)

수석 코치인 해롤드 파머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어차피 내일 이동일이 있는데 굳이 오늘 경기에 수원이를 빼실 필요까지는······.”

“해롤드.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네?”

“부단장 의견이야.”

“부단장이면 그 평생 야구공 한 번 못 잡아봤을 것 같은 안경잡이 말씀입니까? 맨날 돈돈돈 노래만 부르는 그 쪼잔한 안경잡이?”

현대 야구에서 프런트의 중요성은 이제 그것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 돼버렸다. 그 유명한 영화 머니볼에서 사용된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린 놀랄 만큼 무지하다.’라는 말은 사실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수인 미키 맨틀의 명언이다.

그리고 이 말이야말로 어째서 메이저리그의 프런트가 은퇴한 선수들이 아닌 아이비리그 출신의 쪼잔한 안경잡이들로 가득 채워지는지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쪼잔한 안경잡이가 몇 년 이내로 우리 단장이 될 거야.”

“젠장. 아니, 아무리 단장이라도 현장에 이딴 걸로 간섭하는 게 말이 됩니까? 선수 운용은 감독의 권한 아닙니까.”

“상황이 특수하잖아.”

“네, 수원이가 대단한 타자는 대단한 타자죠. 대단한 유망주고요. 근데 감독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타격감이라는 게 확 떴을 때 몰아쳐야 하는 거.”

“지금이야 타격이 워낙 부각되고 있지만, 이 녀석 고작 열아홉에 최고 101마일짜리 공을 던진 녀석이야. AA급 리그를 열아홉에 폭격을 했고. 만약 마이너에 이런 투수 유망주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

“지금 프런트 입장에서는 최수원이라는 선수를 앞으로 최소 6년을 써먹을 자원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더 나아가서는 장기계약으로 묶어놔야 하는 자원으로도 생각하는 거고. 게다가 최수원 개인의 입장으로 보더라도 당장이야 타격에 집중하는 게 좋아 보이만 본인의 의지가 있잖나. 게다가 투수의 재능이 아깝기도 하고. 실제로 투타겸업 룰로 인해서 이쪽에 매리트가 생기기도 했으니······. 우리 때와는 상황이 많이다르지.”

“하, 하지만······.”

해롤드 파머가 뭐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프 클라크 감독이 씨익 웃었다. 확실히 프런트 놈들이 가방 끈이 길어서 그런가 말을 잘 하기는 잘 한다. 당시 자신도 그들 앞에서는 뭐라 반박을 하지 못했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프런트의 의견이고.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난 지금 수원이 등판 이틀 전부터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물론 메이저의 일정이 한국보다 훨씬 터프하겠지. 하지만 이제 시즌 초반이야. 아직 퍼지기엔 많이 이르다고. 게다가 그런 체력적인 부분은 현장에서 체크해서 관리해줄 만한 부분이잖아.”

“그렇다면?”

“경기 중 판단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재량이지. 그러라고 아직 덕아웃에 전자기기 반입은 금지인 거 아니겠어?”

***

[자, 벌써 시리즈 스코어 2:0. 이번 시즌 양키스의 기세가 아주 매섭습니다. 현재까지 6승 2패로 리그 전체 승률 1위를 기록 중이에요. 자 그런 양키스를 상대할 내셔널스의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난 경기 4.1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습니다만 작년 21경기에 출장해서 3.44의 매우 훌륭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던 투수죠? 조나단 클라크입니다.]

[하······. 그나저나 결국 양키스의 스타팅 라인업에서는 최수원 선수가 빠졌네요.]

[하하, 우리 스털링 위원이 아무래도 최수원 선수엑 단단히 빠진 모양입니다. 하지만 양키스 입장에서도 바로 다음 시리즈 1차전의 선발로 예약이 되어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죠.]

[아니, 내일 이동일이라서 어차피 하루를 쉬거든요. 게다가 워싱턴에서 뉴욕이면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고요.]

[워낙에 대단한 시즌 초반을 보내고 있어서 종종 잊게 됩니다만 최수원 선수. 투타 겸업에 빅리그 데뷔 시즌. 심지어 이제 고작 스무 살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직 어린 선수인 만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까요? 시즌은 길고 이제 고작 여덟 경기를 치렀을 뿐이니까요.]

경기가 시작됐다.

빅리그에 올라왔다는 것은 결국 어느정도 자신의 기량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또한 선발투수는 결국 모든 투수 가운데 가장 기량이 출중한 선수가 담당하는 보직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4선발이라는 말은 그래도 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투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긁히는 날에는 그들 역시 어지간한 에이스급 기량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딱!!!

[우측 깊숙한 코스!! 매우 강한 타구!! 앤서니 볼피 매우 빠르게 달립니다!! 1루 지나 2루로!! 앤서니 볼피!! 멈추지 않습니다!! 2루 지나서 3루까지!!! 3루에서!!]

“세이프!!!”

[세잎!! 세잎입니다!! 선두 타자 앤서니 볼피의 3루타!! 양키스!! 기세가 정말 대단하네요.]

물론 그들이 4선발인 이유는 그 긁히는 날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 조나단 클라크는 긁히는 날이 아닌 듯싶다.

[자, 타석에 2번 타자. 애런 저지!! 애런 저지가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총 2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애런 저지 선수. 아직 1루수로 출장한 걸 보면 다리 부상의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네, 왼쪽 무릎 수술은 잘 끝냈지만, 오른쪽 발목의 경우 여전히 좀 불편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자가 3루에 있으니 어쨌든 큼지막한 타구를 퍼올리지 않겠습니까? 저지 선수 역시 그 불편한 다리로 뛰는 일이 없게. 편안하게 걸어들어올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네요.]

애런 저지가 3개의 공을 그냥 보냈다.

볼카운트 2-1.

그리고 네 번째.

-따악!!!!!

시원한 타격.

140kg의 몸뚱이에서 나오는 막대한 파워가 방망이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타격을 보는 순간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좌중간. 담장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

앤서니 볼피와 애런 저지가 매우 가벼운 걸음으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안타 치고 진짜 뭐 빠지게 뛰었는데. 그럴 필요 없이 1루에서 편히 대기할 걸 그랬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미리 애런한테 컨디션을 물어봐. 그랬으면 이렇게 열심히 뛸 필요 없었잖아. 안 그래 애런?”

“좋은 아이디어야. 이봐. 볼피. 내가 미리 말해줄게. 오늘 아무래도 내 컨디션 끝장인 것 같으니까 그냥 출루만 꼬박꼬박하면 될 것 같아.”

가벼운 농담.

나한테 2번 타순을 뺏기고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확실히 명전급 베테랑은 베테랑이다. 그 좋지 않은 마음을 동력으로 사용해서 이렇게 확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히 애런 저지 정도 되면 전성기 기량으로는 내구성만 제외하면 나랑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타자이기도 했으니 이렇게 팀 내 선의의 경쟁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경기가 진행됐다.

오늘이 워싱턴의 4선발 조나단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 4선발인 앤드릭 나바에게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앤드릭 나바에게는 반대 의미로 좀 특별한 날인 것 같았다.

-딱!!!

오늘 경기에 나와 마찬가지로 선발로 출장하지 못했던 마크 토마스가 나에게 헛소리를 했다.

“수원아.”

“어?”

“너 조만간 4선발 하겠는데?”

아무튼간 양 팀의 타자들이 모두 스탯을 쭉쭉 쌓아올리는 그런 경기가 이어졌다.

고작 5회가 끝난 시점에서 무려 7:9

6회 초.

타석에 9번 타자인 호세가 들어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오늘 같은 경기에서도 타격 스탯을 세탁하지 못하는 슬픔이 느껴지는 헛스윙 삼진.

하지만 호세 트레비뇨의 입장에서도 억울할 것이 하필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신나게 두들겨 맞았던 선발 투수 조나단 클라크도, 그의 뒤를 이어 올라왔지만 마찬가지로 두들겨 맞았던 제임스 윌리엄스도 아닌 제법 준수한 불펜 투수 리차드 브라운이었다.

이어지는 앤서니 볼피의 타석.

자신이 앞선 호세 트레비뇨와는 급이 다른 타자임을 증명하듯 리차드 브라운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던 녀석이 마침내 일곱 번째 공을 두들겨 안타를 만들어냈다.

원아웃에 주자 1루.

애런 저지의 네 번째 타석.

[오늘 경기 3타석 2타수 1안타 1볼넷. 홈런 하나. 애런 저지. 과연 여기서 경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1루를 힐끔 바라본 리차드 브라운이 세트 포지션에서 빠르게 피칭을 가져갔다. 요즘 빅리그에 흔치 않은 슬라이드 스텝.

-뻐엉!!

존을 빠져나가는 공을 애런 저지가 침착하게 잘 골라냈다.

두 개, 세 개. 그리고 네 개.

다섯 번째 공을 파울로 만들어낸 애런 저지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서 자세를 가다듬는다. 2연패 탓인지 조금 한산한 관중석이 조용했다. 아마 그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저 녀석 무언가 해낼 것 같다.’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슈퍼 스타’라고 불리는 선수가 갖는 특유의 아우라일지도 모르겠다.

여섯 번째.

볼카운트는 2-2

보더라인에 걸쳐 날아오는 공을 애런 저지가 매우 깊숙하게 잡아당겼다.

-따악!!!

넘어갈까?

타구의 세기는 충분해보였다. 하지만 각도가 그리 좋지 않다. 1루 주자인 앤서니 볼피가 빠르게 질주했다.

애런 저지 역시 그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오른쪽 발목이 좀 불편하다고 설렁설렁 뛰더니 타순이 2번에서 3번으로 밀리니까 그 불편함이 싹 사라지기라도 한듯한 속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는 앤서니 볼피에 비교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앤서니가 2루를 지나 3루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그제야 애런 저지의 발이 1루를 밟았다.

담장을 맞고 튕겨나온 공을 내셔널스의 좌익수가 한 차례 더듬었다.

앤서니 볼피도, 애런 저지도 3루와 1루에 멈출 생각은 없었다.

2루, 그리고 홈.

양키스의 주자들이 빠르게 달리는 가운데 내셔널스의 좌익수가 선택을 했다.

2루 송구.

애런 저지가 달리던 기세 그대로 2루 베이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벤트 레그 슬라이딩.

140kg의 마치 대형 전차와 같은 육중함이 느껴지는 슬라이딩이다.

멀리서 날아온 공을 받아낸 2루수가 그 육중한 슬라이딩을 살짝 피해 애런 저지의 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잠깐의 정적.

“세이프!!!!”

심판의 양손이 올라갔다.

6:8.

6회 초 원아웃에 주자 1루의 상황이 순식간에 7:8 주자 2루로 바뀌었다. 원아웃에 득점권에 주자가 올라갔으니 최소 동점의 가능성이 더없이 높아진 것이다. 관중석의 분위기는 조금 싸했지만 그 대신 우리 덕아웃의 선수들이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2루에 몸을 날렸던 애런 저지가 엉덩이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 섰······.

-털썩.

[어? 뭐죠? 애런 저지 선수?]

[애런 저지!! 왼쪽 다리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설마 또 무릎인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다행히도 작년에 수술했던 무릎은 아니었다.

햄스트링이었다.

이게 다리 부상이 참 어려운 것이 왼쪽 다리를 다치면 오른쪽 다리에 부하가 걸리고, 그래서 오른쪽 다리에 신경 쓰다 보면 또 왼쪽 다리에 부하가 걸린다. 애런 저지가 그랬다. 왼쪽 무릎부상 때문에 오른쪽 발목이 안 좋아졌고 그걸 참고 뛰다 보니 왼쪽 다리에 부상이 생긴 것이다.

[아, 애런 저지 선수. 부디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스완 준비해라.”

“네.”

[6회 초. 원아웃에 주자 2루. 부상으로 빠진 애런 저지 선수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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