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승리요정(1)
“야, 지금 한국 인터넷 진짜 장난 아니야.”
“뭐가? 아, 내 데뷔전 승리? 그래 봐야 꼴랑 5.1이닝 던지면서 4실점이나 했는데. 물론 메이저리그 데뷔전 치고는 나쁘지 않긴 했지. 그래도 막 진짜 장난 아니게 난리 날 정도의 성적은 아닌데?”
“아니, 그거 말고. 그 앤서니 볼피인가? 유격수가 공 빠트린 거. 에러인데 안타로 기록돼서 너 자책점 늘어났다고. 그거 정정 들어가야 한다고.”
오래간만에 쪼유와의 통화였다.
“아, 그거? 안 그래도 그거 뉴욕에서도 지금 말이 좀 많긴 하더라. 아마 정정될 것 같아.”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통의 데뷔전 5.1이닝 4실점짜리 루키 투수였다면 이거 절대 정정될만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실책이라는 건 규정은 있지만, 그 판단 자체를 기록원이 하는 거다. 게다가 규정도 좀 애매한 게 유격수가 몸을 날렸는데 몸이 좀 무거워서 공을 못 받은 거나 글러브에서 공이 도는 바람에 빼는 게 조금 늦는 것 같은 일들을 과연 에러라고 봐야할까? 아니면 정상적인 플레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난 현재 메이저리그 전체의 주목을 받는 슈퍼 루키였고 무엇보다 소수인종인 아시안이기도 했다. 아, 야구에 인종이 대체 뭐가 중요하냐고?
당연히 중요하다. 예전에 드래프트에서 비슷한 실력이면 잘 생긴 선수를 뽑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강박적인 PC가 주류문화가 돼버린 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1등 시민이라면 아시아인은 2등 시민 정도는 된다. 본인은 권력을 쥔 적이 없지만, 아무튼 권력층인 뉴저지 출신의 백인 남성 앤서니 볼피의 부족한 플레이로 인하여 메이저리그의 소수인종인 아시아인이 피해를 보는 일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근데 그런 것 치고 MVP 투표는 여전히······.”
“그거야 그거 투표권 가진 사람들은 30년 이상 야구를 봤던 진짜 전문가들이잖아. 그보다 마린스는 요즘 좀 어때?”
“우리? 우리야 뭐 잘 나가지. 어제도 잠실에서 재규어스 이겨서 선두 유지 중이야.”
“말세네.”
“뭐, 인마?”
“아니, 그렇잖아. 세상에. 마린스, 엘리츠, 피닉스가 리그 1, 2, 3등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파업 직전 마지막 눈물의 대 서비스 수준 아니야? 설마 내년에 KBO 문 닫냐?”
“왜? 너 없는데도 우리가 잘 하니까 좀 섭섭하냐? 막 너 빠지면 우리 꼴찌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리고 어차피 지금 아직 4월이잖아. 마린스가 봄에 잘하는 건······.”
“마!!!”
‘마!’라니. 너무나도 부산스러운 쪼유 녀석의 호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상하게 정겹다. 아무래도 나는 마린스에서의 1년이 그리 나쁘지 않았나 보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계속 쭉 잘 하고. 그리고 쪼유.”
“어?”
“팀 성적도 중요하지만 네 성적도 좀 챙겨라. 아무리 포수라지만 타율이 대체 1할 9푼이 뭐냐? 마린스가 진짜 1위 수성하고 있는 것도 용하다니까.”
“1할 9푼 8리거든? 오늘 경기 뛰면 무조건 2할 1푼은 간다.”
“그래, 제발 그래라. 아무튼, 나 이제 자야 하니까 이따가 경기 잘 뛰고. 하민이 형한테도 오늘 경기 잘 하라고 응원 좀 팍팍 해주고.”
지난 삶에서 나는 KBO에서 무려 7년을 뛰고 빅리그에 진출했었다. 유명세 역시 지금과 비교해서 그리 크게는 부족하지 않았다. 7년 1억 3천만짜리 계약이었고 1루수 불가 판정을 받기는 했어도 무려 데뷔 시즌에 홈런, 타점, 타율의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 지금처럼 기분 좋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됐을까? 심지어 결혼하고 함께 미국에 건너왔던 전처와의 대화조차도 그리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걔는 지금쯤 열심히 입시를 준비하고 있겠지? 내 인생도 멍게비빔밥 한 그릇에 꼬였던 것처럼, 전처의 인생도 그 멍게비빔밥에 꼬인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 그녀 역시 멍게비빔밥이 없는 이번 삶은 이전보다 더 낫지 않을까?
***
[뉴욕 양키스 대 탬파베이 레이스의 시리즈 3차전 경기. 여기는 트로피카나 필드입니다.]
[지난 1차전과 2차전. 각기 한 번씩 승리를 주고 받았던 두 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 과연 양키스는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지. 마운드에 탬파베이의 에이스. 숀 카펜터가 올라옵니다.]
[지난 시즌 9월 말에 옆구리 염좌로 아쉽게 시즌 아웃 됐던 숀 카펜터. 하지만 그 직전까지의 성적은 정말 엄청났었죠?]
[26경기 14승 5패. 163.1이닝 평자책이 2.76으로 그야말로 언터쳐블에 가까웠습니다. 오죽했으면 9월 말에 시즌 아웃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이 영 투표에서 3위를 기록했어요.]
[물론 그를 맞상대할 우리 양키스의 에이스 도밍고 로드리게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도밍고 선수가 탬파베이에 있던 당시에 숀 카펜터 선수는 한 번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었거든요.]
탬파베이 레이스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선발을 잘 키우기로 유명한 팀이다. 이게 진짜 오래 된 역사인데 스캇 카자미어, 제임스 실즈, 데이비드 프라이스, 제이크 오도리지, 블레이크 스넬에 셰인 맥클래너핸과 도밍고 로드리게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숀 카펜터까지. 내가 열거한 선수들 말고도 정말 많은 에이스급 투수들이 이 탬파베이 출신이다.
21세기 이후로 누적 연봉 1억 달러 급의 선발만 거의 2, 3년에 한 명씩은 꾸준히 배출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얘들도 좀 묘한 문화가 있다. 그러니까 브레이브스 소속 내야수들이 메이저리그에 꾸준히 진출하면서 생겼던 싹수 보이는 선수간에 ‘팁 전달 문화’ 같은 것이 탬파베이 투수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다. 미국은 자율훈련이네 뭐네 하는데 얘들은 살짝 한국 고등학교 스타일로 진행한다. 듣기로는 9시에 캠프가 시작하는데 8시 30분에 출석하면 선배 투수가 그 유망주를 ‘꾸짖는다.’
“올바른 정신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서 시작하는 거야.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겠지.”
마음가짐과 이른 출근이 무슨 상관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탬파베이 출신 에이스들의 스프링 트레이닝 집합시간은 해 뜨기 전이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숀 카펜터는 그 탬파베이 에이스 계보의 현 세대를 계승하는 인물이고, 우리 팀의 에이스인 도밍고 로드리게스는 그에게 탬파베이 에이스의 스피릿을 물려주고 나온 인물이다.
-뻐엉!!!
“스트라잌!!!”
구속은 95마일 전후. 하지만 좌완 사이드암에서 나오는 기묘한 움직임이 구속 이상으로 위협적이다. 게다가 저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허를 찌르는 타이밍도 타이밍이지만 투심과 포심 사이에서 고민할 때 들어오는 저 체인지업은 그 궤적마저도 매우 더러웠다. 얼마나 더러웠냐면.
-딱!!!
[높게 뜬 타구!! 하지만 내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웃!!!”
[내야 뜬공 아웃. 애런 저지가 내야 뜬공 아웃으로 물러납니다.]
그래, 저 애런 저지의 무식한 똥파워로도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더럽다. 34시즌에 내가 데뷔했을 때에는 부상을 당한 이후라 좀 맛이 가 있었는데 전성기의 기량을 보니 과연 10년 2억8천만 달러를 제시받을만한 기량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4구째!! 타일러 비트!! 헛스윙 삼진!! 숀 카펜터가 1회 초 양키스의 공격을 삼자범퇴로 막아냅니다.]
[숀 카펜터. 지난 경기. 볼티모어와의 개막전에서도 7이닝 1실점으로 굉장히 좋은 성적을 거뒀었는데, 역시 까다롭습니다.]
[아, 지금 잠시 펜스에 최수원 선수가 보이네요. 어제 경기 5.1이닝 4실점. 6회 말에 살짝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3타석 2안타 1홈런으로 또 한 번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자신이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출장하지 못했네요.]
[이런 걸 보면 참 아쉬워요. 당장 성적을 생각하면 최수원 선수는 그냥 전업 타자를 하는 게 맞거든요. 물론 투수로도 101마일을 던지는 엄청난 재능이지만 타자로는 당장 MVP를 노릴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이렇게 한 경기 한 경기 결장하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하하, 스털링. 그거 관련해서는 제가 조금 조사를 해봤는데. 최수원 선수 KBO 시절에도 초반에는 지금과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 그러면 시즌 막판에는 평가가 좀 달라졌었나요?]
[아니요. 홈런 신기록 도전 때문에 지금이라도 투수 등판 그만두고 타자에 전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아······.]
[하지만 시즌 시작할 때는 팀의 4, 5선발급으로 시작했던 최수원 선수가 시즌 말미에는 1, 2선발을 다툴 만큼 성장해있던 것도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성장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부디 양키스에서도 그렇게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성장’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 1회 말 탬파베이의 공격. 마운드에 도밍고 로드리게스 선수가 올라옵니다.]
어제 등판을 했던 터라 오늘 경기에는 출장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숀 카펜터의 피칭은 제대로 봐둘 필요가 있었다. 탬파베이는 우리와 같은 동부지구 팀으로 이번 시리즈를 제외하더라도 앞으로 무려 10경기를 더 치러야 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경기. 많으면 세 경기까지도 상대할 확률이 있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숀 카펜터와는 조금 다른 호쾌함.
과연 거울 반대편의 페드로라는 평가를 받았던 남자 다운 피칭이었다. 좌완 주제에 최고 99마일, 시즌 평속이 95마일이 찍힌다고 하더니 지금도 전광판에 구속이 94마일 전후로 구속이 찍히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겨울시즌 페드로 마르티네즈에게 직접 코칭받았다는 저 체인지업이 대박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탬파베이의 타자들이 제대로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방망이를 붕붕 돌려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고향의 후배들에게 더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딱!!!
[빠른 타구!! 하지만 앤서니 볼피 받아서 가볍게 1루에. 1루에서!!]
“아웃!!”
[깔끔한 삼자범퇴!!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탬파베이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며 경기는 다시 2회 초. 양키스의 경기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고향에 남은 후배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숀 카펜터 역시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 거의 완벽한 피칭으로 양키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치 팽팽한 시소와 같은 경기.
그렇게 지난 1, 2차전과 사뭇 다른 투수전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고작 1시간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8회 초. 점수는 여전히 0:0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또 한 번 마운드에 올라갔다.
선두 타자는 2번 타자인 완더 프랑코.
오늘 경기 앞선 세 타석에서 3타수 무안타 2삼진이라는 상당히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든 그가 타석에서 크게 호흡했다.
마운드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오늘 경기를 그대로 셧아웃으로 끝내겠다는 기세로 공을 던졌다.
그리하여 3구 째.
-따악!!!!
우타석에서 좌완을 상대로 OPS 1.0이상.
8회 초에 살짝 지치기 시작한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공을 그가 제대로 두들겼다.
시즌 2호 홈런.
오늘 경기의 결승타였다.
[양키스 3차전 0:1 아쉬운 패배!!]
[도밍고 로드리게스. 8이닝 1실점 패배!! 양키스의 타자들은 대체 무엇을 했을까?]
[압도적 실력? 아니면 놀라운 우연? 양키스, 최수원이 출장한 모든 경기 승리!! 결장한 모든 경기 패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5.1 이닝 4실점 선발이 아닌 OPS 2.0의 압도적인 타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