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82화 (282/305)

282화. 선발의 품격(5)

3회 말.

마운드에 오르기 전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역시 학폭이의 생각이 옳았어. 그 녀석 사람은 글러 먹었지만 그래도 빅리그에서 솔리드한 3선발 소리까지 듣던 녀석이잖아. 투수는 결국 자신감으로 던지는 거지. 내가 메이저리그라는 것에 너무 위축이 되어 있던 게 아닐까?’

그래, 오늘 내 속구는 평균 96마일에 형성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자신감을 갖고 조금 과감하게 던져도······.

-딱!!!

“아······.”

안된다.

살짝 몰리기는 했지만 KBO였다면 어지간하면 헛스윙, 혹은 내야 뜬공이나 땅볼로 끝났을 공이 여지없이 통타 당했다.

그것도 중심타선도 아닌 8번 타자······. 아니지. 잭슨 캐롤이면 아직 수염도 제대로 안 난 보송보송 상태라고 해도 MVP 컨텐더급의 재능을 지닌 녀석이다. 아직 보송보송하다고 goe 단순한 애송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우중간!! 잭슨 캐롤의 잘 맞은 타구!! 타일러 비트 빠르게 쫓아 봅니다만, 그 사이 잭슨 캐롤은 2루까지!! 탬파베이!! 3회 말에 노아웃. 탬파베이가 오늘 경기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를 올려보냅니다.]

[살짝 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공이었는데 잭슨 캐롤이 잘 공략했네요. 자, 과연 득점권에 주자가 올라간 상황에서 최수원 선수의 대응은 어떨지 좀 지켜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젊은 선수들의 경우 위기 상황에서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타석에는 9번 타자. 제이크 보일.]

제이크 보일은 특별히 인상적인 타자는 아니었다.

DFA만 세 번을 거쳤고 작년 피츠버그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보여줬지만, 유망주에 밀려서 재계약에는 실패. 올해 달릴 각오를 끝낸 탬파베이와 2년 24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우리 팀의 호세 트레비뇨만큼 환상적인 수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건실했고, 타격은 호세 트레비뇨보다 살짝 낫다.

그러니까 2할 4푼에 OPS 0.7정도?

잭슨 캐롤이라는 재앙에게 2루타를 허용했지만 나는 여전히 학폭 조동혁 선생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96마일짜리 속구면 제대로 던지면!!

-딱!!

아, 씹······.

[1, 2루간 빠른 타구!!]

앤서니 볼피는 많은 면에서 데릭 지터를 닮았다.

공격력이 좋은 유격수라는 점.

뉴저지에서 태어났다는 점.

외모가 준수하다는 점.

그리고 세이버매트릭스적 측면에서 봤을 때 수비가 마이너스라는 점까지.

[아!! 앤서니 볼피!! 몸을 날려봅니다만 놓쳤습니다!! 잭슨 캐롤!! 3루로 달립니다!!]

당연히 앤서니가 공을 잡을 줄 알았을 잭슨 캐롤이 조금 늦게 출발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좌익수인 앙헬 카브레라가 매우 건실한 좌익수라는 점이었다.

빠른 커버.

-뻐엉!!

타자 주자는 2루까지 뛰지 못했다.

그리하여 3회 말 노아웃에 주자 1, 3루. 2회까지 진짜 좋았는데 공 2개 던지고 타자 둘이 1루와 3루에 서 있게 됐다.

[아, 3회 말 노아웃에 8번과 9번 타자를 상대로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한 최수원 선수. 심지어 더 최악인 점은 이제 타순은 다시 1번부터 시작되는 상위타순이라는 점입니다. 이거 위기네요. 그나저나 스털링, 방금 공은 실투였던 것 같죠? 한가운데로 좀 많이 몰렸습니다.]

[네, 거의 가운데로 몰린 실투였어요. 그리고 이게 바로 제가 최수원 선수의 피칭에서 조금 걱정하던 부분입니다.]

[실투를요?]

[아뇨, 뭐 실투야 누구나 할 수 있죠. 실제로 10개 던지면 2, 3개는 복판에 들어가는 투수들도 많습니다. 제가 걱정한 부분은 그러니까······. 최수원 선수가 뛰던 KBO의 평균 구속이 90마일 정도던가요? 아무튼 빅리그와 거의 4마일 정도 차이가 나거든요. 그런 곳에서는 98마일짜리 속구면 체감이 102마일 103마일 정도일 테니 한가운데 실투가 나오더라도 무조건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공이 두들겨 맞을 확률이 굉장히 높아요. 이게 단순히 두들겨 맞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투수를 상당히 위축시킬 수가 있거든요. 이걸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문제인데. 지금 최수원 선수 같은 경우는 하위 타순을 상대로 연속으로 출루를 허용하고 상위 타순을 맞이하게 됐단 말이죠. 상당히 어려운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털링?]

[네?]

[방금은 진짜 전직 투수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주 좋았어요. 하지만 전 우리 최수원 선수가 이런 어려움도 충분히 이겨낼 만한 터프가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게다가 5년간 자국 리그에서 슈퍼스타 놀이하다가 2억 달러 받고 빅리그에 올 수 있는 선수가 최저연봉에 5년 일찍 빅리그로 오는 선택을 한 것부터가 터프가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 타석에 1번 타자 에반 머피. 에반 머피 선수가 들어오네요. 앞선 타석에서 초구 파울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었습니다. 과연 이번 타석 역시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지.]

긍정적 생각, 긍정적 생각.

노아웃에 주자 1, 3루. 타순은 1번부터 시작되는 상위 타순. 하지만 그래도 점수는 8:0이다. 심지어 저 두 명이 다 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8:2. 쓰리런을 맞아도 8:3이다. 게다가 오늘 우리 팀 빠따 생각해보면 점수는 더 뽑아낼 확률이 높다.

볼피가 나를 향해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솔직히 미안할 만하다. 아니, 근데 왜 이게 에러가 아니라 안타로 기록되는 거지? 기록원들 다 미친 건가? 인종 차별? 이 새끼들. 디즈니 프린세스도 이제 블랙워싱을 넘어 옐로우워싱이 이뤄지는 2028년에 감히 뉴저지 출신 백인 유격수의 에러를 아시아인 투수의 피안타로 둔갑시킨다고? 지옥에서 돌아온 월트 디즈니한테 아주 혼쭐을 나 봐야 정신을 차릴 생각인가?

잠깐의 잡생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다.

어차피 1회 말에도 선두 타자 상대로 깔끔하게 삼자범퇴를 하지 않았던가. 그걸 한 번 더 하면 그만이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3루 주자 들여보내주고 병살타 같은 걸 해도 괜찮다. 아무튼, 괜찮다.

초구.

몸쪽 정강이 높이로 파고드는 빠른 속구.

-뻐엉!!!

너무 낮았다.

볼카운트 1-0.

두 번째.

또 한 번 몸쪽 낮은 공.

-뻐엉!!!

이번에도 심판은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너무 깊숙했다.

[아, 2구 연속 볼. 최수원 선수, 갑자기 제구가 좀 흔들리는 것 같은데······. 양키스 덕아웃이 움직입니다!! 해롤드 코치가 마운드로 향하네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

“수원 괜찮아?”

“네.”

“그래, 오늘 끝나고 맥주나 한잔하자고. 내가 이 근처에 윙이 죽여주는 가게를 하나 알고 있거든?”

코치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호세가 끼어들었다.

“코치님?”“걱정하지마. 호세 너도 끼워줄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스완 얘 스무 살인데요.”

“아······. 그러면 레모네이드?”

“콜라가 낫지 않을까요? 그래도 윙인데?”

노아웃에 주자 1, 3루. 타석에는 1번 타자. 볼카운트는 2-0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수석코치와 포수, 투수가 옹기종기 모여 경기 이후에 먹을 야식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 콜라로 하지. 어차피 수원은 액상과당 좀 먹어도 괜찮잖아. 안 그래?”

“아무리 살찌워도 되는 몸이라지만 그래도 튀김에다가 액상과당은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냥 다이어트 콜라로 하죠.”

해롤드 코치의 마운드 방문은 야식으로 윙이 죽여주는 가게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자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끝났다.

아, 마지막에 한 마디 덧붙여주기는 했다.

“수원, 굿럭.”

아니, 이 양반아. 덕아웃에서 왔으면 뭔가 조언을 해야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노아웃에 주자 1, 3루.

볼카운트는 2-0.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몸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은데 그걸 잊고 있었다. 솔직히 실투가 안타로 연결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멍청한 기록원이 지옥에서 돌아온 월트 디즈니에게 잡혀갈 인종차별적 판정을 했기 때문이고 원래는 에러다. 그러니까 적당히 실투가 나오더라도 나는 무적이다.

학폭 조동혁 선생의 마음으로.

조금 더 자신감 있게.

몸쪽 깊숙하게 낮은 코스로.

-뻐엉!!!

“스트라잌!!!”

[절묘한 코스!! 방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죠!! 이겁니다. 97마일짜리 공이 이렇게 들어가면 어지간하면 방망이 내밀기 어렵거든요.]

[자, 볼카운트는 이제 1-2. 네 번째. 투수 와인드업]

주자 1, 3루.

뭐 1루 주자가 달려서 도루를 성공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괜히 슬라이드 스텝 밟았다가 두들겨 맞으면 그게 더 손해니까.

바깥쪽 높은 코스.

-부웅!!!

“스트라잌!!!”

에반 머피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볼카운트 2-2.

자, 이제 여기서는 둘 중 하나다.

몸쪽 커브를 집어넣느냐.

아니면 하나 빼느냐.

‘굿 럭.’

망할 덕아웃에서는 딱히 나에게 뭔가를 요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긴 사실상 투피치에 뭐 넣으라고 시킨다고 무조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빼란다고 무조건 빠질 것도 아니니.

다섯 번째.

아마, 타자도 여기서 커브가 들어올 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을 거다. 근데 속구만 연속으로 4개를 보여줬으니 여기서 예상을 뒤집는 속구!! 이런 거 던지는 것보다······.

‘나쁘지 않은데?’

의외로 여기서 그냥 또 속구 집어 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회 말.

몸도 적절하게 풀렸고. 느낌도 좋다. 진짜 전력으로 100마일짜리 하나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 간다.

[최수원!! 크게 와인드업!!]

불꽃 같은 몸쪽 101마일 속구!!

나의 다섯 번째 공이 날았다.

-딱!!!

[에반 머피!! 쳤습니다!! 1, 2루간 빠른 타구!! 2루수 트로이 존슨의 다이빙 캐치!!]

메이저리그 하면 생각나는 아주 정상적으로 환상적인 수비.

트로이 존슨이 자신의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오른손으로 뽑는 대신 왼손의 손목 스냅만을 이용하여 그대로 앤서니 볼피에게 토스했다.

“아웃!!!”

1루 주자인 제이크 보일이 다소 거친 벤트레그 슬라이딩으로 앤서니 볼피를 방해하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약간 무너진 자세로 트로이 존슨의 공을 받아낸 앤서니 볼피가 그 자세 그대로 1루를 향해 빠르게 공을 뿌렸다.

무너진 자세 만큼이나 빗나간 송구.

하지만 1루의 애런 저지는 그 공을 받기에 충분히 거대한 남자였다.

“아웃!!!”

그대로 더블 아웃.

여기서 다소 아쉬운 점은 3루 주자인 잭슨 캐롤이 홈에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삼진을 하나 잡고 병살을 끌어냈으면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와우, 매우 훌륭한 더블 플레이. 양키스가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적립합니다.]

[앤서니 볼피가 앞선 자신의 실수를 이렇게 훌륭하게 만회를 하네요. 3회 말 점수는 8:1. 이제 아웃카운트는 하나 남았습니다.]

[그나저나 방금 구속이 100.1마일이 나왔습니다. 조금 가운데로 몰린 감이 있었지만 굉장히 빠른 공이었어요. 최수원 선수가 메이저에 진출한 이후 100마일을 넘기는 공을 던진 건 이번이 처음이죠?]

[네, 본래 모국의 리그에서도 101마일까지 던지는 투수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제 4월인데 벌써 100.1마일짜리 속구라니 매우 놀랍네요.]

[자,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앞선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었죠? 타석에는 완더 프랑코. 완더 프랑코 선수가 올라옵니다.]

응?

좌타자는 우완 투수에게 유리하다.

뭐 개인적인 체감으로 우타자가 딱히 좌완 투수에게 유리한 느낌은 아니지만, 아무튼 좌완에게는 그래도 우타자가 좀 유리하다고 한다.

스위치 히터는 그래서 스위치 히터다.

좌완에게는 우타석으로.

우완에게는 좌타석으로.

그리고 완더 프랑코는 스위치 히터다.

나는 우완투수고.

근데 왜?

[이게 뭐죠? 완더 프랑코 선수. 지금 우타석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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