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선발의 품격(4)
미국 동부의 시간은 한국보다 13시간이 느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규환 씨는 오늘 매우 훌륭한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본래라면 7시 50분이 넘은 시간에 간신히 눈을 비비고 일어나 8시 20분쯤 집에서 나와 아슬아슬하게 9시에 회사에 도착할 것을 지금은 그보다 무려 1시간 30분을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빠르게 끝내고 7시 30분에 회사에 도착한 것이다.
“그래, 수원이 역사적인 메이저 등판인데. 내가 미국까지는 못 가더라도 딱 자리 잡고 제대로 봐줘야지.”
그리하여 7시 45분에 경기가 시작되고 정확히 15분. 그는 그 수고에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미친!! 와, 진짜 개 미쳤네.”
그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해설자들의 말에 따르자면 이번 시즌 탬파베이는 팀의 10년 치 여력을 단번에 집중하여 대권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라고 했다.
그리고 수원은 그런 타자들을 상대로 삼자범퇴를 기록했다. 심지어 저 2번 타자라는 녀석은 작년 MVP 투표에서 7위를 했던 타자라고 했는데 삼구삼진이다.
이어지는 2회 초.
8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양키스의 공격.
글러브를 내려놓은 최수원이 방망이를 들고 대기 타석에 들어오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채 한동안 넘어가질 않았다.
뭐, 해설이야 한국에서 따로 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영상 자체는 미국에서 건너오는 그대로다. 결국 미국에서도 지금 최수원을 향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일 터. 오규환 씨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최수원을 응원해왔던 찐팬의 프라이드랄까?
[자, 지금 우리 최수원 선수. 대기 타석에서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 투수인 메이슨 몽고메리 선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경기. 그러니까 2경기는 선발 출장. 1경기는 대타로 출장해서 11타석 11타수 6안타에 2홈런. 0.545/0.545/1.182라는 터무니 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 최수원 선수인데요. 다음 타석 아주 좋은 모습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 타자의 타격감이라는 게 좀 사이클을 타는데. 우리 최수원 선수. 지금 사이클이 아주 쭉쭉 올라온 상태거든요. 굳이 일말의 불안을 꼽자면 어제 경기에서 한 템포 쉬었다 갔다는 점. 그리고 오늘 선발로 출장했다는 점인데요. 사실 이것도 그렇게 크게 걱정할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렇죠. 지난 보스턴 3연전에서 최수원 선수가 보여줬던 타격감은 고작 하루 출장 하지 않았던 정도로 떨어질 타격감이 아니었거든요. 게다가 우리 최수원 선수. 한국에서 뛸 때도 선발 출장한 경기에 타자로 나와서 정말 잘 쳤었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KBO에서 뛸 때도 투수로 출장한 날에는 타격 성적이 조금 저조하긴 했다. 특히 장타율이 약 0.15 정도 차이 났었는데 최수원이 시즌 장타율이 1.1에 가까운 규격 외의 괴물이라서 그렇지 보통 장타율이 0.2가 떨어진다는 건 리그 최고 수준의 장타자가 평범한 타자로 떨어진다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자, 타석에는 양키스의 8번 타자인 호세 트레비뇨. 오늘 최수원 선수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양키스의 주전 포수입니다.]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호세 트레비뇨 선수 같은 경우 8년 전에 호크스의 이효종 선수와 잠깐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는 선수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빅리그에서 그것도 양키스 같은 빅마켓 팀에서 이렇게까지 오래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이 선수도 참 대단한 대단하네요.]
호세 트레비뇨가 방망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호세 트레비뇨의 타격 성적은 작년을 기준으로 0.233/0.262/0.378.
수비는 골드글러브를 받을 만큼 여전히 훌륭했지만, 이제 포수의 평균에도 살짝 못 미치는 타격이었다.
1회 초에 실컷 두들겨 맞았던 메이슨 몽고메리가 과감한 체인지업으로 호세 트레비뇨의 방망이를 또 끌어냈다.
-딱!!
[빗맞은 타구!! 완더 프랑코 가볍게 잡아서 1루에!! 1루에서!!]
“아웃!!”
[아웃입니다.]
[호세 트레비뇨의 땅볼 아웃.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자 이제 타석에 드디어 우리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왼손으로 헬멧을 매만지고 그대로 탁탁 두 번을 두들긴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배트를 매만지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건드린 후 자세를 바로잡는다. 별다른 것 없는 최수원 특유의 타격 루틴이었다.
KBO처럼 앰프로 응원가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규환 씨는 이 순간 귓가에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BGM이 깔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오규환 씨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새끼, 존나 멋지네······.”
그래, 글러브를 끼고 공을 쥔 최수원도 멋졌지만, 역시 이 녀석에게 어울리는 건 헬멧을 쓰고 방망이를 쥔 모습이다.
마운드의 메이슨 몽고메리가 글러브 안의 공을 매만졌다.
이제 막 빅리그에 데뷔한 녀석이지만 애송이라 치부할 생각은 없었다. 재작년 메이슨 몽고메리는 알렉산더 맥도웰이 마이너를 쭉쭉 밀고 올라오는 과정에서 그에게 처참하게 짓밟혔었다. 그래, 지금 타석에 선 저 최수원은 메츠의 그 미친 괴물이 자신의 라이벌이라 떠들고 다니는 녀석이다.
그가 생각했다.
‘그래, 일단 바깥쪽 낮은 코스로 포심을 하나 빼고. 헛스윙이 나오면 살짝 깊숙하게 투심 하나. 안 나오면 바깥쪽으로 커브 하나 던져 보자. 그리고······(중략)······그렇게 해서 만약 볼카운트가 꽉 차면 삼진 잡겠다고 욕심내지 말고 바깥쪽 빠지는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이나 범타를 유도해보는 거야. 그래, 메이슨. 할 수 있어. 너 인마. 더 이상 그때 알렉산더 맥도웰한테 쳐 발리던 메이슨이 아니야.’
그리하여 마침내 초구.
바깥쪽 낮은 코스 살짝 빠지는 공.
-따악!!
‘어?’
최수원의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
망설이기 전에 일단 방망이가 먼저 나갔다.
요새 몸쪽 공을 좀 잘 두들기기는 했지만, 사실 내가 진짜 자신 있는 건 역시 바깥쪽 코스다. 살짝 빠지는 공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두들기만했다.
-따악!!!
하지만 역시 빅리거는 빅리거라는 것일까?
볼 끝이 살짝 지저분했다. 스윗스팟을 살짝 벗어나 방망이 끝에 걸린 타구를 억지로 끝까지 잡아당겼다.
1, 2루 간.
2루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타구.
2루까지 달려볼까?
아니, 아니다.
오늘 우익수 수비를 보고 있는 저 잭슨 캐롤의 수비는 무시할 수 없다. 나로 인하여 미래가 바뀐 이상 이제 그의 커리어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녀석이 골드글러브를 다섯 개나 탈 포텐셜을 지닌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최수원!! 초구에 깔끔한 안타!! 무리하지 않고 1루에서 멈춰 섭니다. 존에서 상당히 빠지는 공이었는데 저걸 또 저렇게 공략을 해내네요.]
[HIT에 80을 줄만한 선수라는 걸 정말 여실하게 증명을 해내네요. 최수원 선수. 이걸로 데뷔 직후 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진짜 환상적인 타자예요. 아마 지금 양키스의 팬들은 당장 브라이언 캐시먼에게 달려가 키스를 퍼붓고 싶은 심정 아닐까요.]
타석에 앤서니 볼피가 올라왔다.
[바로 직전 이닝에서 2루타를 기록했었죠? 타석에 1번 타자. 앤서니 볼피 선수가 들어옵니다.]
[앤서니 볼피 선수 같은 경우 양키스가 아주 오랜 시간 찾아왔던 No. 2 데릭 지터의 후계자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2023년부터 꾸준히 양키스의 주전 유격수로 출장하고 있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기대치에 비하면 뭔가 살짝 아쉽단 말이죠. 물론 26살의 나이에 벌써 두 번이나 올스타에 나간 훌륭한 선수이긴 합니다. 아무튼 이번 시즌에는 부디 한 번 더 성장해서 정말 데릭 지터의 후계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크게 무리하지 않는 두 걸음 반.
어지간하면 슬라이딩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혹시 모르니 장갑은 도루 장갑을 바꿔 꼈다.
그 모습을 본 탬파베이의 1루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워워, 슬라이딩까지 하려고? 이봐. 시즌은 충분히 길다고. 투수에다가 타자까지 하면서 달리기까지 하려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글쎄, 어제 너무 푹 쉬는 바람에 몸에 힘이 좀 넘쳐서. 게다가 또 앞이 이렇게 탁 트여있으면 나도 모르게 전력으로 달리고 싶어지거든.”
파울, 볼, 볼, 파울, 파울.
그리고 여섯 번째.
-따악!!
힘껏 밀어친 볼피의 타구가 빠르게 날아갔다.
쭉 뻗어 나가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
타구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안타다.
나의 몸이 2루를 향해 쭉쭉 뻗어나갔다.
[앤서니 볼피 쳤습니다!! 2, 3루간!! 강한 타구!!]
[1루 주자 최수원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합니다!!]
최근에 안타만 치면 내 앞에는 항상 애런 저지가 있었다. 규만 선배만큼 느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미묘하게 답답했었다.
[빠릅니다!! 최수원!! 굉장히 빨라요. 벌써 2루 지나 3루로!!]
[조쉬 윌콕스 공을 잡아 3루에!! 3루에서!!]
벤트레그 슬라이딩.
나의 왼발이 3루 베이스를 밟았다.
-뻐엉!!!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최수원의 멋진 주루 플레이!!]
[원아웃에 주자는 1, 3루. 타석에 애런 저지 선수가 올라옵니다.]
“나이스 주루.”
3루에 작전 코치가 나의 엉덩이에 흙먼지를 툭툭 털어주었다.
[와, 그나저나 최수원 선수 굉장히 빠르네요. 어쩌면 앤서니 볼피 선수만큼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타순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게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최수원 선수는 애런의 뒤에 배치하기에 너무 빠른 타자예요. 이 선수 우타자인데 4.1초 내외가 나오는 타자에요. 작년 MLB평균보다 거의 0.5초가 빠른 셈이죠. 게다가 방금 3루까지 고작 6.4초밖에 안 걸렸거든요. 만약 저지 선수의 다리가 완전하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처럼 조심스러운 주루플레이를 하는 상황에서는 저는 최수원 선수의 타순이 저지 선수의 앞에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딱!!!
[바로 이렇게요.]
애런 저지의 깔끔한 2타점짜리 단타.
2회 초.
탬파베이와의 점수 차이가 6점까지 벌어졌다.
-딱!!!
아, 이걸로 8점.
그리고 메이슨 몽고메리가 1.1이닝 만에 강판당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
현지 시간 저녁 8시.
그리고 오전 9시.
오규환 씨는 자연스럽게 화장실 가장 오른쪽 칸으로 향했다.
“아······.”
워낙에 신나게 양키스가 탬파베이를 두들긴 덕분에 경기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 고작 3회 말.
점수는 여전히 8:0.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앞선 2회 말 역시도 가볍게 막아내고 8번 하위 타순에서 시작되는 3회 말. 이건 사실 오랜 시간 수원이가 등판하는 경기를 봐왔음에도 영 어색한 광경이었다.
아니, 점수가 8:0이라니.
심지어 8이 상대 팀도 아니고 수원이네 팀이라니.
그렇게 오래 최수원을 응원해온 오규환 씨에게도 수원이가 소속된 팀이, 그것도 수원이가 등판한 경기에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폭행하는 광경은 너무나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오규환 씨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앞으로 우리 수원이의 앞에 펼쳐질 꽃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딱!!!
‘어?’
탬파베이 레이스의 8번 타자 잭슨 캐롤의 방망이가 최수원의 초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