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79화 (279/305)

279화. 선발의 품격(2)

─뭐야? 탬파베이 1차전 왜 수원이 또 없음?

─이거 진짜 2차전에 선발로 등판하나본데?

─아니, 돌라크 얘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상식적으로 이미 KBO에서 타자로 출장하고 바로 다음날 투수 하고, 안 쉬고 바로 타자하는 거 이미 다 끝냈는데 대체 무슨 적응을 또 시킨다고 휴식일을 이렇게 길게 넣는 거야? 시즌 막판에 좀 퍼진 다음도 아닌데?

─브라이언 캐시먼 ‘최수원에게 적응은 필요하지 않다.’ 돌라크 ‘최수원에게 적응의 시간을 줄 생각이다.’ 양키스 새끼들 말 좀 맞추지. 그게 그렇게 어렵나?

1차전 경기가 끝나고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고작 18시간 후에 있을 탬파베이와의 경기를 위해서였다.

“예전에 누가 그러던데. 아시아에서 야구하다가 온 친구들은 경기 끝나고 공항으로 가는 거에서 미국에 온 걸 실감한다고 하던데. 어때? 미국에 온 게 실감이 좀 나?”

내가 처음 메이저리그의 터프함을 느낀 것은 데뷔 1년 차에 지옥 같았던 원정 14연전인가? 15연전인가 때였다. 근데 내가 회귀 한 게 벌써 3년이 지났으니 그게 무려 12년 전 일이다. 솔직히 기억도 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고작 첫 번째 시리즈 끝나고 비행기 타러 가는 거에 메이저리그를 실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기껏해야 2시간 30분 비행에 버스까지 해도 4시간도 안 걸리잖아. 그 정도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해봤어.”

“아, 그래?”

물론 버스랑 비행 중에 어느 게 더 빡세냐 하면 비행이 더 빡세긴 하다. 뭐 이런저런 연구결과가 있다는데 사실 잘 모르겠고 그냥 몸이 조금 더 피곤한 느낌이다. 특히 4시간 이상 장거리 비행이 되면 더더욱 그렇고.

요즘 메이저리그 팀 가운데는 전용기를 구매하는 팀보다 항공사에 임대를 하는 팀이 늘어나고 있는데 양키스의 경우는 당연히 전용기를 사용했다. 이게 뭐 중요한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항공사에 임대하는 비행기의 경우 내부 개조가 좀 미흡한 경우가 많다.

양키스 전용기의 경우 모든 좌석이 항공사 기준 1등석에 준하는 형태로 개조가 되어 있었는데 뭐 이것도 암묵적인 서열에 따라서 자리가 정해지긴 했다. 편함의 차이는 아니고 대충 감독이랑 거리, 내리고 타는데 편한 위치 등등의 아주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내가 짬밥을 많이 먹어보니까 이게 은근히 중요하긴 중요하다. 어딜 가건 자기 주제 파악 못 하는 신인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런 걸로라도 좀 눌러줘야 팀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현재 팀 내 위계 상 대충 내 위로 애런 저지랑 도밍고. 그리고 게릿이 있고. 딜런은 짬밥이 있으니까 존중해줄 만하고, 감독이랑 코치진은 별개. 아, 호세까지도 짬 대우를 해줄 필요가 있다. 볼피는 좀 애매하기는 한데······.

‘거기에다가 내가 2차전 선발이니까.’

계산이 섰다.

딱 볼피까지만 존중해주면 되겠다.

오래된 메이저 짬밥으로 좋은 자리 순을 계산해서 적당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게 만약 문제가 있으면 백프로 시비를 거는 놈이 나오기 마련이다. 바꿔 말하자면 좀 불평을 늘어놓는 놈들이 생기더라도 공개적으로 시비 거는 놈이 없으면 그게 내 자리라는 뜻이다.

“스완.”

“어? 왜?”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앤서니 볼피가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게 바로 아무런 문제 없는 내 자리라는 증거였다.

탬파베이와의 시리즈 1차전.

내일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을 해야하는 만큼 제법 집중해서 타자들의 스윙을 살폈다. 동영상과 각종 데이터들을 미리 받아보긴 하지만 솔직히 경기 끝나고 잠자고 밥 먹고 나와서 몸 푸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거 일일이 분석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경기 중에 지켜보는 게 다 데이터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 4선발인 앤드릭 나바가 진짜 신나게 털려준 덕분에 타자들을 아주 오래 지켜볼 수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참고로 이건 반어법이다.

아니, 털려도 좀 너무 심하게 털렸다. 잘하면 1회에 타자 1순도 가능하겠다 싶은 상황.

타석에 탬파베이의 8번 타자가 올라왔다.

‘어?’

잭슨 캐롤?

몹시 익숙한 이름이었다. 근데 얼굴이 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명이인인가 하고 자세히 봤는데 내가 아는 잭슨 캐롤이 맞았다. 원래 수염을 무슨 바이킹처럼 기르는 놈인데 아직 앳된 얼굴에 보송보송한 상태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원래 자이언츠에서 드래프트 돼서 거기 프랜차이즈가 되는 녀석인데 대체 왜 탬파베이에서 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저 녀석이 진짜 무서운 타자라는 점이다. 내가 뛰었던 34시즌부터 43시즌까지 아홉 시즌 동안 리그 전체를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타자 중 하나다. 심지어 나랑 다르게 수비도 좋아서 골드글러브도 다섯 개나 탔다.

약간의 긴장감.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깔끔한 삼진 아웃.

1회 말 탬파베이의 공격이 그렇게 끝났다.

4:0.

작년 말의 마린스였다면 아마 이 타이밍에 ‘파이팅’ ‘가즈아!!’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같은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난리가 났을 거다. 하지만 양키스는 조금 달랐다. 무거운 분위기? 아니다. 이건 묵직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패배를 생각하는 느낌이 아닌 우리는 양키스고 당연히 승리를 목표로 한다는 느낌이다.

[아······. 앙헬 카브레라의 아쉬운 헛스윙 삼진. 1회 말. 양키스의 공격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 3구!! 몸쪽 공!! 완더 프랑코가 제대로 잡아 당깁니다!! 큼지막한 타구!! 아······. 이게 또 넘어가네요. 점수는 5:0. 경기 계속됩니다.]

[3회 초 원아웃 상황. 앤서니 볼피의 경기 두 번째 타석입니다!! 앞선 타석에서 아쉬운 외야뜬공으로 물러났던 앤서니 볼피!! 하지만 타구질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딱!!!

[2, 3루간 빠른 타구!!]

“아웃!!”

[하지만 유격수 완더 프랑코가 잡아냅니다. 아, 완더 프랑코 오늘 투타 양면에서 너무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앤서니 볼피가 아쉬운 초구 범타로 물러납니다.]

이어지는 애런 저지의 순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다.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

하지만 거인은 그 거대한 등으로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래, 애런 저지라면 이 갑갑한 상황을 뚫어줄 수 있을 것이다.

양키스의 99번은 그런 번호이니까.

-뻐엉!!!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5구째 깔끔한 삼진.

애런 저지가 대체 어떻게 이걸 스트라이크를 줄 수 있느냐는 강렬한 눈빛을 심판에게 보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1차전.

전체적으로 우리 팀이 못했느냐 하면 그래, 이건 진짜 못 하긴했다. 하지만 앤드릭 나바가 강판된 4회 이후로는 추가점도 내주지 않은 채 진짜 필사적으로 따라잡았고 실제로 운만 조금 따랐더라면 역전도 가능할 만큼 따라갔다.

5:3 패배.

그래, 마린스 시절 6, 7점 차이 패배에도 안타 숫자는 거의 비슷했다며 ‘아쉬운 석패’같은 단어를 쓰던 것과 달리 진짜로 이건 아쉬운 석패였다. 그렇기에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라커룸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수원, 탬파베이는 처음일 텐데. 내가 괜찮은 레스토랑 소개해줄까? 타일러랑 제이크도 같이 가기로 했어.”

“아니, 괜찮아. 내일 중요한 날인데 오늘은 좀 부담 없이 먹고 싶어서.”

볼피의 제안을 거절하고 진짜로 가볍게 샌드위치 하나를 챙겨 먹었다. 그리고 구단에서 미리 준비해준 자료들을 훑어보고 정확한 시간에 침대에 누웠다.

선수들 가운데는 원정을 다닐 때 전용 베개까지 들고 다니는 애들이 제법 되는데 회귀하기 전의 나는 그게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다음 원정부터는 베개를 들고 다녀야겠어.’

묘하게 잠이 좀 안 오는 느낌?

그렇게 살짝 뒤척이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본래 일어나려던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은 기상. 약간 늦잠을 자서 그런가? 총 수면 시간으로는 차이가 없을 텐데 이상하게 몸이 좋았다.

조금 불길했다.

피칭이라는 게 원래 밸런스가 중요한 거라서 컨디션이 뻗치면 오히려 커맨드가 좀 꼬이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KBO에 있을 때도 그런 적이 있었고.

“퉤퉤퉤!!”

눈을 뜨자마자 몹시 상쾌한 기분이었다.

몸도 가볍고. 나의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투수 데뷔를 축하하는 것처럼 날도 적당히 흐린 것이 딱 좋다. 미리 주문해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챙겨 먹었다. 갈비찜이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여긴 그 갈비찜을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새롭게 시작한 루틴이다.

호텔 비즈니스 미팅룸에서 간단한 미팅를 했다.

코치들과 전력분석관 그리고 오늘 나의 공을 받아 줄 오스왈드까지 포함한 회의로 피칭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정해진 시간에 경기장에 가서 훈련을 끝내고 간단한 식사.

그리고 명상.

아, 참고로 오늘 내 타순은 9번이다.

아, 물론 타율이 5할이 넘는데 9번이 말이 되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나마도 첫 선발등판인데 투수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하는 거, 투타겸업으로 투수 할 때는 타자도 같이 하는 게 몸에 익어서 그게 훨씬 편하다고 우겨서 간신히 받아낸 거다.

“어웨이 경기다. 빅리그의 선발 등판은 또 다르고 그런 경기에서 굳이 타자로 먼저 뛰고 투수로 뛸 이유는 없다. 현재 팀에서는 너를 가장 중요한 유망주로 보고 있고 장기적으로는 너의 성장이 양키스의 세 번째 왕조에 핵심이 되길 원한다.”

제프 클라크 감독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별 도리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명전급까지는 아니어도 15수 정도는 했던 감독이다. 솔직히 애런 저지라고 해도 제프 감독 정도 커리어의 감독이 저렇게까지 말하면 ‘네, 이번 경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야 한다. 데이터 야구니 뭐니 하면서 프론트 위주의 야구를 하더라도 결국 감독은 선수 출신을 주로 쓰는 건 이런 커리어에 대한 존중 때문이니까.

아무튼 그런 관계로 1회 초.

상대는 탬파베이의 5선발인 제이슨 몽고메리.

-딱!!!

[앤서니 볼피!! 쳤습니다!! 빠른 타구!! 잭슨 캐롤이 달려가봅니다만 살짝 늦습니다. 그 사이 볼피는 2루까지!! 2루에서!! 2루에서!! 세잎!! 세잎입니다.]

-딱!!!!!!

[애런 저지의 큼지막한 안타!! 앤서니 볼피는 홈까지!! 애런 저지는 1루에 안착했습니다.]

-따아악!!!!

[타일러 비트!! 타일러 비트의 타구가 쭉쭉 뻗어나갑니다!! 담장!! 담장 넘어갑니다!! 시즌 1호 홈런!! 점수는 이제 3:0. 아웃카운트는 여전히 0개. 양키스가 1회 초부터 탬파베이의 제이슨 몽고메리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제 경기 탬파베이가 우리 앤드릭을 완전히 박살 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탬파베이의 5선발인 제이슨 몽고메리를 영혼까지 탈탈 털어댔다.

‘이거 9번이고 뭐고 1회부터 방망이 먼저 드는 거 아니야?’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진 너무 행복회로였다. 7번 타자인 마크의 병살타로 끝나버린 1회 초.

점수는 4:0.

정말 아무 부담도 없는 상황에서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

“!@#$^%!#^!#%^!”

저 멀리 탬파베이의 덕아웃에서 뭔가 으쌰으쌰하자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젊은 팀이다. 저런 팀일수록 기세를 타면 무서운 법이고.

한국과 다르게 원정팀에게 경기장 절반을 내주는 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의 경기. 탬파베이 구장에는 탬파베이의 팬들이 제법 그득했다. 같은 평일임에도 어제보다 관중수가 훨씬 많은 것은 역시 어제 경기에서 탬파베이가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겠지만 트로피카나필드의 천장은 그 흐린 하늘을 완벽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투수 데뷔전을 치르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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