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선발의 품격(1)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3연전은 어렵지 않게 흘러갔다.
그래,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야구는 3번 싸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고 그리고 나머지 한 경기로 승패가 결정나는 게임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는 ‘야구’였다.
1차전이 두 에이스의 투수전이었다면 2차전은 에이스급 투수를 두들기는 타자들의 난타전이었다. 그래, 2차전에서 우리는 ‘알동’다운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게릿 콜의 피칭이 나빴는가?
아니다. 193cm에 110kg에 달하는 이 37세의 남자는 특유의 투박한 폼으로 최고 97마일. 평균 94마일의 속구를 기반으로 무려 네 가지의 공을 적절히 배합하며 보스턴의 타자들을 상대했다.
근데 그냥 보스턴 타자들이 잘 쳤다.
그렇다고 보스턴의 2선발인 태너 하우크가 제대로 못 던졌는가 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그는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제구가 긁히는 날에는 오른손으로 던지는 크리스 세일. 안 긁히는 날에는 on sale이라고 불리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다 과거의 이야기다. 재작년 시즌을 기점으로 제구를 잡아낸 이후로는 컨텐더팀의 솔리드한 3선발. 어지간한 팀을 가더라도 2선발 역할은 톡톡히 해내 줄 만한 투수라고 평가받는다.
-딱!!!
[쳤습니다!! 호세 트레비뇨!! 빠른 타구!! 좌중간!! 안타입니다!!]
[오늘 양키스 타자들의 전반적인 기운이 아주 좋습니다. 태너 하우크. 작년 평자책 3.71의 투수를 상대로 그야말로 불방망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 주자 1, 3루. 타석에 앤서니 볼피!! 앤서니 볼피가 올라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의 타자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제는 리그 에이스급 투수인 후안 몬테로의 컨디션이 워낙 바짝 올라있던 터라 그리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 타선 역시도 그 컨디션이 상당히 올라와 있던 상태였다.
1점을 내주면 2점을 찾아오고, 2점을 내주면 3점을 찾아온다. 경기를 직관하는 관중들에게는 그야말로 재밌기 짝이 없는 경기였다.
11:8.
그렇게 2차전에서 9회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수원 5타수 3안타(2루타 1개)!! 압도적 타격 능력!!]
[브라이언 캐시먼 ‘시즌 전부터 누누이 이야기해왔지만 스완에게는 증명이나 적응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낸 타자이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마음껏 방망이를 휘두를 기회뿐입니다.’]
[최수원의 3차전 결장 소식!! 부상일까?]
[앤서니 볼피 SNS를 통해 여론의 흑색 선전에 답하다. ‘헛소리!! 스완은 아주 건강하다.’]
“감독님!! 오늘 최수원 선수의 결장에 관하여 혹시 부상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부상은 절대 아닙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아직 신인 선수고 이것저것준비할 것이 많은 선수라서 하루 휴식일을 준 것 뿐입니다.”
“두 경기 연속으로 5할 이상의 타율. 매 경기 장타를 치고 있을 만큼 타격감이 물 오른 상태인데 지금 굳이 휴식일을 가져갈 필요가 있을가요?”
“네. 있습니다.”
“아, 혹시 그게 최수원 선수의 투타겸업에 관련된 이유인가요? 오늘 불펜으로 등판할 예정입니까?”
“글쎄요.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고 있습니다.”
[투타겸업 드디어 시동? 최수원 3차전 불펜 등판 예고?]
[20살에 101마일을 던지는 투타겸업의 유망주를 굳이 불펜으로? 그것도 이미 한국에서 풀시즌 선발을 치르는 것으로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 선수를? 이해할 수 없는 제프 클라크 감독의 발언!!]
[최수원의 4차전 선발 가능성은?]
[타자로는 이미 증명을 완료한 최수원!! 이제 남은 것은 투수로의 증명뿐!!]
3차전의 경우 스타팅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졌다. 그리고 이건 찻잔 속의 태풍을 넘어 정말 화끈하게 여기저기에서 화젯거리가 됐다. 일단 한국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뉴스에 도배는 물론 각종 커뮤니티들. 심지어 야구가 메인이 아닌 다른 여러 커뮤니티들까지 관련 주제로 시끌벅적해졌다. 내가 지난 두 경기에서 워낙 좋은 활약을 보인 덕분이었다.
뭐, 덕분에 어느 감독이나 한 번 정도는 붙는 칭호인 ‘돌’의 칭호가 제프 클라크 감독에게도 붙었다.
하지만 진짜 내가 체감할 수 있게 시끄러웠던 것은 뉴욕의 언론이었다. 한국의 언론사야 어차피 특파원들 위주로 해서 열 명 남짓인 데 반하여 여기는 진짜 파파라치부터 해서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보스턴 상대로 두들겨 패서 그렇지 뭐. 아마 너 지금 맨몸으로 보스턴 가서 저녁에 혼자 외출하면 잘하면 총도 맞을 수 있을걸?”
“양키스 이기게 하려고 그렇게까지 한다고요?”
“아니, 너 최수원인 줄은 몰랐지만, 최수원 닮아서 기분 나쁘다고 쏠 수도 있어.”
“하하, 재밌네.”
당연히 농담이었다. 내가 10년 가깝게 살아본 바로는 아무리 미국이라도 그렇지 보스턴이나 시카고, 캘리포니아 쪽은 비교적 안전하다. 거기 애들은 애초에 평소엔 총도 잘 안 가지고 다닌다.
“그래, 뭐 아무튼 꼭 경호원이랑 다녀라.”
“······.”
농담······. 맞지?
아무튼 언론이 그렇게 시끌벅적했지만, 걔들도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내가 다음 탬파베이와의 경기에 선발이 확정이라서 일단 쉬어가는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떠들어대는 것은 그런 ‘심심한 진실’보다는 저런 자극적인 이슈가 본인들 트래픽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3차전.
우리 3선발은 딜런 리.
작년으로 기준으로 평자책 3.98. 인상적인 점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신 이닝을 무려 201.1이닝을 소화했다. 2선발인 게릿 콜이 나이 때문에 좀 흔들리는 경기들이 있어서 불펜이 총동원될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다음 경기 등판인 딜런이 이렇게 든든하게 이닝을 소화해주면 그게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그리고 보스턴의 3선발은 크리스 세일.
그래, 바로 그 크리스 세일이다.
2미터에 가까운 키에 80킬로 중반대의 비쩍 마른 몸.
나도 회귀했을 때 189에 82킬로라 완전 멸치급이었는데 크리스 세일은 그보다 더 하다. 심지어 저것도 폭식에 가까운 식단으로 억지로 찌워서 저 정도다.
아무튼 저 체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유리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9세 시즌까지 이렇게 빅리그에서 선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만한 기량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아, 물론 지난 2034년에 FA 재계약을 앞두고 보여줬던 불꽃 같았던 피칭이 제일 크긴 했다. 35세 시즌에 마치 전성기의 기량이 돌아온 것처럼 평속 93마일을 찍어대며 알동에서 2.99의 평자책을 기록했으니 보스턴이 35세 투수에게 4년 1억 3천만짜리 재계약을 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
그는 또다시 평범한 3선발급 투수였다. 나쁜 투수는 아니었지만 1년에 3천만 달러 이상 받아가는 투수라면 찍어서는 안 되는 성적을 보여줬다는 뜻이다. 심지어 3년 동안 소화한 이닝은 고작 380이닝. 연평균 130이닝이 채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3차전 경기는 우리의 승리 확률이 당연히 높아 보였다.
아마 감독도 그걸 생각하고 이것저것을 실험해보기 위해 나에게 휴식을 준 것일 테고.
그런데 말입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오늘 우리 타선에 좌타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리고 5회까지 크리스 세일은 그 모든 좌타자들을 모조리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렇다고 우타자들이 그를 뻥뻥 쳐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땅볼, 삼진, 외야 뜬공. 어쩌다 나오는 안타.
그래. 39세의 노장 크리스 세일은 FA의 마지막 해인 올해 첫 경기에서 지난 2034년에 보여줬던 그 각성 크리스 세일의 모습을 또 보여주었다.
속구 평속이 무려 92.7마일. 최고 98마일을 찍었다. 전성기 슬라이더 그대로에 체인지업은 무슨 중간에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은 형상이다.
장담하는데 오늘 크리스 세일이 보여준 모습은 이틀 전 경기에서 후안 몬테로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보여줬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6회 초 보스턴의 공격이 끝난 시점에서 점수는 4:0.
그나마 희망을 품을만한 점은 이번 공격이 다시 1번 앤서니 볼피부터 시작하는 상위타순이었으며 이게 세 번째 타석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1번 타자인 앤서니 볼피와 2번 타자인 애런 저지가 모두 우타자라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스완 준비해라.”
“네?”
“이번 이닝에 찬스가 나오면 대타로 올라갈 거야. 몸 좀 풀어둬.”
수석코치인 해롤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쉬어둬라, 어째라 이야기했다고는 하지만 당장 이런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면 내가 못 나갈 이유도 또 없긴 하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아서 크리스 세일의 투구를 아주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고.
볼피가 그의 피칭을 끈질기게 따라갔다.
세일의 경우 좌완 쓰리쿼터로 포심은 우타자 기준 바깥쪽으로 엄청나게 흐르고 슬라이더는 당연히 몸쪽으로 쑥 하고 들어온다. 물론 약점은 있다. 횡무브먼트가 미친 대신에 종무브먼트가 상당히 부족한데······.
-딱!!!
[아!! 살짝 빗맞은 타구!! 1루수 트리스탄 카사스 가볍게 받아서 크리스 세일에게!!]
“아웃!!”
대신 저렇게 체인지업이 종적인 변화가 상당해서 매우 까다롭다.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애런 저지!! 애런 저지가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는 삼진과 볼넷 하나. 아직 안타는 없습니다.]
대부분 투수들이 그렇듯 매우 신중한 피칭이었다.
끈질기게 따라오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존에 체인지업을 집어 넣었던 앤서니 볼피와는 사뭇 다른 접근. 홈런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들의 정석적인 마음가짐이다.
물론 그런 정석적인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꼭 정석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딱!!
네 번째.
아마도 실투라고 생각되는 가운데로 몰린 공.
애런 저지의 방망이가 그 공을 제대로 잡아당겼다.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
애런 저지가 달렸다. 워낙에 장대한 체구인지라 느려 보이는데 묘하게 느리지 않다. 1루를 지나서 2루로.
좌중간에 떨어진 타구를 요시다 마사타카가 잡아서 그대로 2루를 향해 강하게 던졌다.
-뻐엉!!
하지만 살짝 높았던 송구.
“세이프!!!”
심판의 양손이 쭉 펴졌다.
원아웃에 주자 2루.
드디어 찾아온 득점 찬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나를 쓰는 대신 그대로 타일러 비트를 타석에 올렸다. 오늘 경기에서는 비록 2타석 연속 삼진이기는 했지만 지난 두 경기에서 나 다음으로 잘 쳤던 타자였던 만큼 그 나름의 기대를 걸어보는 듯 싶었다.
하지만 잘못된 기대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크리스 세일!! 정말 매섭습니다. 오늘 경기 좌타자들을 상대로는 정말 무적 그 자체입니다.]
[지금까지 벌써 삼진만 12개. 이닝당 평균 삼진이 2개가 넘어갑니다.]
투아웃에 주자 2루.
다음 타자는 제이크 도밍고. 팀 내에서는 장기적으로 최소 올스타급으로는 성장해줄 것이라 믿고 있는 25세의 중견수다.
“스완.”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은 장기적인 안목이고.
지금 당장은 2할5푼에 OPS가 0.8 남짓한 타자에다가 마찬가지로 좌타자라서 오늘 경기 모든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바가 있다.
[아!! 양키스 덕아웃!! 대타!! 대타입니다. 타자는?]
[0번!! 최수원!! 최수원입니다. 아, 드디어 나오네요. 제가 앞서도 누누이 말했지만 제프는 조금 더 일찍 스완을 교체 시켰어야 했습니다. 오늘 크리스 세일이 좌타자를 상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타선에 좌타자를 다섯이나 그대로 내버려 둘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심지어 덕아웃에는 현재 가장 뜨거운 우타자를 내버려 둔 채 말이죠. 만약 오늘 경기에서······. 아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하, 보셨습니까 여러분? 스털링이 드디어 ‘자제’라는 것을 배워 온 것 같습니다.]
몸 상태는 어떤가.
당연히 좋았다.
다만 오늘은 선발 출장도 아니고 이틀 후에 있을 선발 데뷔전에 대비해서 투수 루틴만을 수행했던 만큼 살짝 감각이 어긋난 느낌이기는 했다.
하지만 야구라는 게 원래 1년에 162경기나 뛰는 게임이고 이 정도 상태는 예전에 시즌 막판에 발목을 삐끗했는데 그대로 출장 감행할 때와 비교하면 어디 불편한 것도 아니다.
마운드의 크리스 세일이 나를 노려봤다.
39세의 노장.
하지만 원래 저 나이의 노장이 갑자기 컨디션 폭발해서 한 경기 정도 전성기 기량을 보여주면 그게 더 무섭다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마치 채찍처럼 휘어 들어오는 팔뚝.
길고 얇아서 그런지 매우 효과적이다.
까다로운 코스의 빠른 공이었다.
슬라이더? 포심?
사람의 눈은 고작 10마일 남짓의 차이를 구속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구속이 96마일쯤 되면 끝까지 공을 보고 휘두를 수도 없다. 심지어 크리스 세일의 슬라이더는 한때 20-80스케일에서 70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그 터널링 구간 역시 매우 길다.
그러니까 그냥 초구는 포심으로 생각하고 휘두른다.
아무튼 투수가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은 포심인 법이니까.
-따아악!!!
실로 깔끔한 타격.
노리던 공이 노리던 코스로 완벽하게 들어왔다. 공을 던지는 투수와 나의 생각이 일치한 것이다.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이건, 뭐 볼 것도 없었다.
시즌 2호 홈런포.
이번에도 2타점짜리였고, 여전히 내 앞에는 애런 저지가 있었다. 조금 달랐던 점은 그가 2루에서 출발한 덕분에 내 앞을 가로막는 일은 없었다는 점 정도다.
[최수원!! 고작 3경기 만에 2홈런!!]
[건강 이슈를 일축하는 최수원의 깔끔한 홈런포!!]
[6회 대타로 출장하여 초구를 강타!! 경기를 추격하는 투런포를 기록하는 최수원!!]
[양키스 아쉬운 6:3 패배!!]
[제프 클라크의 실수? 경기 2타수 1안타 1홈런. 만약 그가 처음부터 경기에 나왔다면 결과는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