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77화 (277/305)

277화. 정답은 존재한다(2)

“역시 소문의 슈퍼 루키. 첫 타석부터 안타라니 다르긴 다르네. 아, 난 트리스턴. 트리스턴 카서스라고해. 한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백강호라고 알아? 나 그 녀석이랑은 인연이 좀 있어서 말이야. 재작년인가 까지만 하더라도 자기도 여기 올 거라고 그랬었는데 어쩌다 보니 연락이 끊겼거든.”

백강호라니.

보스턴 1루수 트리스턴 카서스의 입에서 뜻밖의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마린스의 정규시즌 우승이 결정 날 때부터 연락이 좀 뜸해지더니 플레이오프에서 돌핀스가 브레이브스한테 밀려난 이후로 아예 연락이 두절 됐다.

“아, 알긴 알지. 그런데 나도 최근에 빅리그 진출 때문에 조금 바빠서 연락을 못 했네. 근데 백강호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어, 2017년 U-18 야구월드컵 때 결승전에서 붙었는데 그때 우리가 좀 잘했었거든. 아무튼 8:0인가? 9:0으로 이겼는데 그때 백강호만 혼자 2루타 2개 치면서 인상이 좀 깊었지. 게다가 2020년에 도쿄 올림픽에서도 두 번이나 만났었고. 그때도 나랑 둘 다 4번 타자를 치는 바람에 언론 인터뷰도 한 번 같이 한 적 있었어.”

아,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나랑 알렉스의 관계 정도 되는 사이였다. 물론 그 수준은 우리보다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기회 되면 이야기 한 번 해볼게.”

“고마워.”

상당히 수다스러운 보스턴의 1루수를 뒤로 하고 적당히 두 걸음 반 정도를 걸어 나갔다. 당연히 도루는 꿈도 꾸지 않았다.

[사실 애런 저지 선수의 발이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거든요. 작년을 기준으로도 리그 평균수준은 됩니다. 다만 지금은 전력으로 달릴만큼 몸이 완전한 상태는 아닌 것 같네요. 그래도 애런 저지 선수의 타격을 생각하면 제프 클라크 감독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보긴 어렵죠.]

[아니!!]

‘스털링!!’

[후······.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좀 힘들지만. 네, 뭐 그래요.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고 그 판단 근거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만을 따지기에 사람은 감정이 퍼포먼스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딱!!!

나와 달리 체중 감량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타일러는 결국 자신이 목표하던 체중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올해부터 연봉조정 자격을 얻어 무려 380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그는 자신이 어째서 38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지를 이 한 방으로 증명했다.

외야 깊숙한 곳까지 날아가는 타구.

애런이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빨랐느냐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주루였다. 앞서 내 안타에도 저렇게 달렸다면 어쩌면 3루까지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주루다.

[저것 보십쇼. 아까 말했듯이 애런 저지 선수가 느린 선수가 절대 아니거든요. 노련한 경험으로 달려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판단했을 때 아까 그건 위험 대비 득이 적었고 이건 전력을 다하면 위험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뭐 그런 건가?’

항상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라는 건 분명 보기 좋다.

게다가 KBO에서는 분위기 자체가 그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실제로 고과 산정에도 들어가는 팀이 있었고. 하지만 빅리그는 조금 다르다. 특히 애런 저지처럼 연봉이 3600만 달러. 한국돈으로 400억이 훌쩍 넘어가는 돈을 받는 슈퍼스타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파이팅이 만약 부상으로 이어진다면 그게 팀에 끼칠 손해가 훨씬 크다는 계산이다.

아, 참고로 난 한국 사람이라서 저거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물론 내 메이저 데뷔 첫 타석 기록이 2루타가 아니라 단타가 된 것도 저게 마음에 안 드는 아주 중요한 이유다.

아무튼 원아웃에 주자 1, 3루.

점수는 다시 1:1.

그나저나 이 시점에서 나는 약간의 반성을 하게됐다.

내가 KBO에서 뛰면서 너무 주인공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뭐 그런 반성이었다.

마린스 시절에야 다른 선수들과 나의 수준 차이가 워낙에 압도적이었던지라 그들의 의견보다 내 직감이 거의 100%확률로 더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여긴 KBO가 아닌 메이저리그였다.

또한, 여긴 마린스가 아닌 양키스였다.

내가 홈런을 치지 않더라도 점수를 낼 수 있는 팀이다.

후안 몬테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만했다. 분명 녀석이 오늘 던지는 공들은 매우 좋았다. 어쩌면 내가 회귀해서 경험해본 공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내야 땅볼로 물러난 볼피조차도 은퇴하기 전에 올스타는 몇 번 해볼 만한 선수다. 애런 저지와 나는 말할 것도 없이 명전급 타자고.

이어지는 우리의 5번 타자는 아마추어 유망주 시절에 미키 맨틀부터 마이크 트라웃까지 온갖 전설적인 선수들을 죄다 소환했던 제이크 도밍고였다. 03년생으로 올해 25살인데 당연히 미키 맨틀이나 마이크 트라웃은커녕 올스타급 외야수로도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올해로 메이저리그 3년 차.

앞선 2년 동안 누적 성적이 0.257/0.331/0.449에 37홈런.

그래도 장타력은 확실히 있는 선수다.

-딱!!!

적극적인 타격.

누가봐도 희생플라이라도 하나 쳐서 1점을 추가하겠다는 시원한 스윙이었다.

그 결과는 파울, 또 파울.

그리고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후안 몬테로가 제이크 도밍고에 이어 앙헬 카브레라까지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도밍고 로드리게스.

후안 몬테로

다시 도밍고 로드리게스.

그리고 다시 후안 몬테로와 도밍고 로드리게스.

그렇게 에이스들의 피칭이 이어졌다.

[1회 초에 조금 흔들렸던 양 팀의 에이스들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압도적인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밍고 로드리게스 선수가 6이닝 동안 삼진이 무려 열 개. 후안 몬테로 선수 역시 5이닝 동안 삼진이 아홉 개입니다.]

[자, 6회 말 점수는 아직 1:1. 양키스의 공격. 선두 타자는 애런 저지. 애런 저지 선수입니다. 현재까지 앞선 타석에서 볼넷 하나와 삼진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양키스가 기록한 안타는 총 세 개. 3번 타자인 최수원이 하나. 4번 타자인 타일러 비트 선수가 두 개를 기록했거든요. 그들에게 이어지는 애런 저지의 이번 타석. 매우 중요합니다.]

미트를 내려놓고 안전장비들을 착용하고 방망이를 뽑은 채 대기 타석으로 걸어갔다. 앞선 타석에서 투심에 속는 바람에 내야 땅볼로 물러났는데 솔직히 저 투심이랑 포심은 어떻게 구분해야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투심의 횡변화가 저런거야 그렇다 치겠는데 무슨 포심이 횡으로 저렇게 휘어지는 건지······. 하긴, 그러니까 빅리그에서도 에이스 소리 듣는 거겠지.

애런 저지가 신중하게 후안 몬테로를 상대했다.

애런 저지의 기본적인 접근 자체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것은 애런 저지의 막대한 힘. 그리고 그의 명성과 파워를 경계하는 투수의 태도였다.

최대한 보더 라인에 걸치게 던지려는 신중한 태도가 거듭 볼을 만들었다.

3-1의 볼카운트.

이쯤 되면 자신 있는 공을 좀 안쪽으로 밀어 넣을 법도 한데······

-뻐엉!!

후안 몬테로는 마지막까지 애런 저지에게 안되면 볼넷으로 내보내야지 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존에서 바깥쪽으로 확실하게 빠져나가는 포심.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넷.

애런 저지가 또다시 1루로 걸어 나갔다.

노아웃에 주자 1루.

[자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이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 안타 하나와 내야 땅볼 하나. 오늘 후안 몬테로의 공에 확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선수입니다.]

[뭐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이 선수가 빅리그에 진출을 선언했을 때 이 선수의 타격을 의심했던 구단은 없었으니까요.]

초구.

1루를 한차례 살펴본 후안 몬테로가 세트 포지션에서 나에게 공을 뿌렸다.

살짝 바깥 코스.

-뻐엉!!

확실하게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포심이었다.

“뭐야? 안타 하나 얻어맞았다고 바로 도망가는거야?”

“헛소리하고 있네. 기껏해야 메이저 경험 두 타석짜리가 어디서 감히 입을 털고 있어. 남들이 슈퍼루키 슈퍼루키 하면서 대접해주니까 네가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아?”

보스턴의 포수 코너 웡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거 잘하면 써먹을 수도 있겠는데?

“멍청하기는. 선후가 바뀌었잖아. 남들이 슈퍼루키 슈퍼루키 하면서 대접해줘서 내가 뭔가 된 것 같은 게 아니라, 내가 이룬 게 있으니까 남들이 나를 슈퍼루키라면서 대접 해주는 거지. 이 간단한 게 이해가 안 되나?”

“이 ㅆ······. 미······. 하······. 너 조심해라.”

뒤의 심판을 의식했는지 혀끝까지 나온 욕설을 참아내는 녀석에게 보란 듯이 타석으로 바짝 다가섰다.

“조심은 개뿔. 너야말로 잊지 마. 나 투수다. 그것도 101마일짜리 던지는 투수. 내 대가리가 한 번에 안 터지면 바로 다음은 무조건 너야. 아니지. 양키스에서 내 중요성 생각하면 감히 너랑 비교할 게 못 되지. 네 스스로 잘 생각해봐. 나만큼 중요한 선수가 보스턴에서는 누구인지. 그리고 걔 대가리 터지면 그거 전부 다 너 때문인 거야.”

“······.”

자, 과연 이제 어떻게 나올까?

분명 여기서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라면 빈볼이나 몸쪽 바짝 붙이는 위협구를 던질 생각을 버렸을 것이다.

그래,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라면 말이다.

두 번째.

빠른 공.

‘왔다.’

어마어마한 하체의 회전과 그것을 지탱하는 뒷발.

거기에서 이어지는 강한 몸통 회전.

반쯤 접힌 왼팔은 끝까지 그대로 유지한다.

-딱!!!

마지막 팔로우 스로우에서 털어낸 오른손.

그리고 이제야 자연스럽게 쫙 펴진 왼팔.

왼손으로 잡고 있던 방망이를 자연스럽게

-툭

바닥에 떨어트렸다.

여긴 메이저리그다.

그래, 치킨런을 하면 합리적인 선에서 멈추는 대신 자기 대가리 깨질 때까지 달려드는 놈들이 더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갔다.

실로 깔끔한 손맛.

볼 것도 없었다.

이건 넘어갔다.

[잘 맞은 타구!! 좌측으로!! 좌측으로!! 좌측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개막전. 세 번째 타석. 스무살의 루키가 데뷔전에서 투런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외야 2층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

[맞는 순간에 곧바로 홈런임을 알 수 있는 아주 시원한 홈런이었어요.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이 이번 겨울 정말 대단한 선수를 하나 데려 왔네요.]

[6회 말. 팽팽하던 경기가 최수원의 홈런 한 방으로 기울어집니다. 점수는 이제 3:1. 양키스가 2점을 앞서 나갑니다.]

1회 말에 쳤던 안타와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단순히 홈런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조금 전에는 앞에서 길을 막고 있고 있던 애런 저지가 상당히 거슬렸는데 지금은 길을 막고 있는 똥차가 아니라 나에게 1타점을 더해준 소중한 선행 주자로 보였다.

그래, 야구에는 어느 상황에건 통용되는 ‘홈런’이라는 확실한 정답이 존재한다. 그 정답 앞에는 선행주자가 빠르건 느리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있기만 하면 된다.

[최수원!! 개막전 4타수 2안타 1홈런!!]

[양키스 개막전 3:2 승리!!]

[아시아의 홈런왕!! 팀의 승리를 결정짓는 투런포 작렬!!]

[이제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홈런왕으로? 최수원 팀 내 홈런 1위 등극!!]

─이제 한 경기 1홈런 했는데 그걸로 팀 내 홈런 1위라는 기사가 메인에 뜬다고? 이거 실화냐?

─하여간 어딜 가나 꼭 이런 쿨찐들 있다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그냥 닥치고 좀 응원하자.

─맞아. 대승적 결단으로 메이저에 진출한 최수원 까면 사형임. 수원아 이대로 메이저에서 은퇴까지 파이팅!!!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우리에겐 손흥민의 왼발과 박지성의 오른발. 그리고 최수원의 빠따가 있다.

─야,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1홈런 치고 두유노 클럽 회원 가입은 좀 이르지.

─그래도 오늘 홈런 쳤으니까 일일명예회원 시켜주자.

─그나저나 뭐랄까? 좀 섭섭한데? 뭔가 수원이는 멀티 홈런 치고 경기는 패배해서 고통받아야 좀 제맛인데. 고작? 5할에 홈런 하나 치고 승리라니. 그냥 다시 마린스 와서 고통받는 거 보고 싶다.

─아니다 악마야!! 우리 수원이 그냥 메이저에서 행복 야구하게 냅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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