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정답은 존재한다(1)
“푸핫하하하. 이봐. 도밍고. 너 이 녀석 인터뷰 봤어?”
“뭔데요?”
“하퍼가 이번에 단단히 일낼 것 같은데 어차피 내셔널 리그라서 우리 집 아니고 옆집 일이라잖아. 너희 진짜 골 때리는 녀석이 신인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진짜 또라이 같은 놈 하나 들어왔다고. 걔 라커룸에서 자기 뒷담까는 애들 있었다고 청백전에서 눈치 안 보고 허벅지에 97마일짜리 하나씩 박아 준 놈이에요.”
“아, 그래? 잘했네. 그런 놈들은 일단 한 방씩 먹여주고 시작해야지. 근데 걔들은 대체 뭐하는 머저리들이길래 투수 뒷담을 까는거야? 그것도 100마일짜리 던지는 투수한테? 혹시 자살지망자야?”
“······.”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래. 이 양반 원래 이런 양반이었지?
“그나저나 이 녀석 특기가 속구랑 커브라고 그랬나?”
“네, 뭐 슬라이더도 좀 던지고 체인지업도 깔짝거린다고는 하는데 그건 영······.”
“뭐, 그거야 아직 스무 살이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아니, 아니다. 스무 살인데 벌써 빅리그에서 그러고 있으니 훈련할 시간이 좀 부족하려나? 게다가 투타겸업까지 하는 애잖아.”
“글쎄요. 장기적으로는 타자로 전향하지 않을까요? 애런이 그러는데 타격 진짜배기라고 하던데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100마일 던지는 유망주가 스트라이크도 던질 줄 아는데 멘탈이 이 정도면······. 아무튼 기회 되면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네. 내가 또 커브랑 체인지업 원 포인트는 세계제일 아니냐. 너도 체인지업 엄청 구렸는데 나 덕분에 사람 됐잖아.”
“애초에 엄청 구리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시면 이번에 캠프나 한 번 놀러오시지 그러셨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너랑 인연이 있다지만 그래도 내가 양키스 캠프를 가는 건 좀 그렇지. 기자들이 또 내 아버지가 누군지 찾을 게 뻔하잖아.”
“은퇴한 지 벌써 20년쯤 되셨잖아요. 이제 별로 신경 쓰는 사람들도 없을 것 같은데······.”
“은퇴한 지는 아직 19년밖에 안 됐고 나 정도 되면 100년이 지나도 기억하게 돼 있어. 생각해봐라. 샌디 코팩스가 자이언츠 캠프에 가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 별 이야기 없을 것 같은데요? 샌디 코팩스가 자이언츠랑 뭐 사이가 좀 안 좋았나요?”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 라이벌리와 함께 가장 강력한 라이벌리로 꼽히는 LA 다저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라이벌리를 모르다니.
그가 혀를 한차례 찼다.
“쯧, 하여간 요즘 놈들은 역사를 모른다니까. 아무튼 기회 되면 나중에 훈련 올 때 한 번 데리고 와 봐.”
“근데 저 걔랑 사이 별로 안 좋은데요. 애가 또라이라니까요.”
“내가 보기엔 도밍고 너도 정상은 아니야. 그러니까 정상 아닌 애들끼리 친해지면 되겠네.”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
개막전.
4만 5천석의 양키 스타디움이 과장 하나 없이 정말 가득 들어찼다. 이런 걸 보면 진짜 미국인들이 얼마나 스포츠에 미쳤는지, 그리고 양키스가 얼마나 인기팀인지를 알 수 있었다.
외야석을 기준으로 20달러가 넘어가고 지금 포수 뒤편의 가장 비싼 자리는 1만 달러가 넘어갔다. 평균 가격으로 따져도 100달러 정도. 물론 항상 이 가격은 아니고 오늘이 개막전에다가 상대가 보스턴이라서 좀 비싼 편이기는 했다.
오늘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당연히 도밍고 로드리게스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밍고의 성적은 꾸준히 게릿보다 미세하게 앞섰었는데 이번 시범 경기에서는 확실하게 수준 차이가 난다고 해도 될 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사실 당연한 것이 도밍고의 경우 올해로 29살. 투수로는 한창 절정을 달릴 나이였는데 반하여 게릿은 37으로 언제 훅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기 때문이다.
마운드에 선 도밍고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공을 뿌렸다.
나 역시 제법 관심있게 그 피칭을 살폈다. 물론 이번 시리즈에서 내가 보스턴을 상대로 등판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는 같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내가 양키스에서 공을 던지는 이상 언젠가는 상대할 녀석들인 만큼 타자의 버릇을 조금이라도 봐두는 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선두 타자인 알렉스 버두고에게 선제 안타.
그리고 이어지는 트레버 스토리에게 진루타.
그리고 현재 보스턴에서 가장 핫한 타자인 라파엘 데버스가 외야 깊숙한 곳까지 날아가는 안타를 쳐내며 1회 초부터 보스턴이 1점을 획득했다.
충분히 2루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타구였는데 우리 우익수인 타일러의 어깨를 의식한 것인지 라파엘 데버스가 1루에서 발을 멈췄다.
원아웃에 주자 1루.
점수는 1:0.
그나저나 도밍고 저 녀석 자신만만하던 얼굴치고는 결과가 영 별로인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4번 타자인 요시다 마사타카를 상대로 내야 땅볼을 끌어냈다. 앤서니가 가볍게 공을 주워 2루에. 그리고 다시 1루의 나에게.
“아웃!!!”
깔끔한 더블아웃.
“아······.”
요시다가 아쉬움 가득한 탄성을 내뱉었다. 솔직히 그렇게 아쉬워할만한 타구는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딱히 태클을 걸 이유는 없었다.
오늘 보스턴의 선발 투수는 후안 몬테로.
솔리드한 선발은 많은데 딱히 에이스라고 할만한 선발은 하나도 없었던 보스턴이 2026년 겨울에 트레이드로 데려와서 재작년에 무려 8년 2억 달러를 안겨준 에이스급 투수다.
도미니카인가 멕시코인가 하여간 남미 출신의 선수인데 작년에는 4점 초반대 평자책 기록하다가 하반기에 부상으로 드러누워서 욕 좀 먹었던 투수다. 겨울 사이 부상을 다 회복했는지 시범 경기에서는 또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솔직히 컨텐더팀의 압도적인 에이스급 투수라고 하기에는 영······.
-부웅!!!
“스트라잌!!”
98.9마일.
높은 코스 빠른 공.
앤서니 볼피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후안 몬테로!! 아직 4월 초에 불과한데도 1회 초구에 대뜸 98.9마일.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죠. 이 선수 시즌 중에는 최고 104마일까지 던지는 투수거든요. 역시 보스턴이 연 3천만 달러를 줄 만한 투수입니다.]
[그렇죠. 작년에는 엉덩이 쪽 부상으로 좀 고생을 했습니다만 사실 건강한 후안 몬테로면 충분히 사이 영도 노려볼만한 투수거든요.]
구속도 구속인데 궤적이 내가 예측했던 것보다 더 쭉 뻗어 오는 느낌이다.
물론 펜스에 붙어서 본 거라 정확한 건 아니다. 조금 더 정확한 건 대기 타석에서. 그리고 타석에 직저 들어가봐야 알 것 같다.
이어지는 두 번째.
-딱!!
앤서니 볼피의 방망이가 공을 두들겼다.
그런데 저거 싱커? 투심? 아무튼 볼피의 몸쪽으로 좀 감겨 들어오는 변화구였던 것 같다.
[3루수 정면 느린 땅볼!! 라파엘 데버스 받아서 트리스탄 카사스에게!!]
“아웃!!”
볼피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덕아웃을 향해 걸어왔다.
“후안, 저 녀석 오늘 컨디션 너무 좋은 것 같은데? 볼 끝이 막 쭉쭉 뻗어 오는 느낌이야.”
“반의 반개 정도?”
“어. 대충 그 정도?”
내 방망이를 뽑아 대기타석으로 나가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타석에 들어간 것은 애런 저지.
일단 양키스 최고의 프랜차이즈다.
KBO처럼 앰프가 빵빵 울려 퍼지는 그런 응원은 없었다. 하지만 4만 5천 명의 환호와 박수가 주는 웅장함은 그와는 조금 다른 맛이 있었다. 실제로 경기장을 찾은 팬들 대부분의 등에 새겨진 번호는 99였다.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점수는 1:0.
뭔가 작년의 나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확실히 앤서니 볼피와는 그 압박감이 달랐던 덕분일까? 앤서니를 상대로는 과감하게 높은 코스 속구를 꽂아 넣던 후안 몬테로가 최대한 신중하게 승부를 풀어갔다.
볼, 파울, 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포심과 투심. 그리고 체인지업과 커브.
그 공들이 그려내는 궤적을 최대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볼카운트 3-2.
무려 일곱 번째.
몸쪽 꽉찬 코스.
방망이를 반쯤 돌려가던 애런 저지가 뒤로 몸을 피했다.
-뻐엉!!
몸쪽 깊숙한 코스.
그런데 저렇게 극적으로 몸을 날릴만큼 위험한 공은 아닌 것 같았는데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야유가 후안 몬테로를 향해 쏟아졌다.
판정은 당연히 볼.
애런 저지가 볼넷으로 1루에 걸어 나갔다.
[자, 원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는 이번 시즌 태평양을 건너 양키스에 합류한 슈퍼 루키. 새로운 아시아 출신의 투웨이.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고작 스무살. 아직 메이저 경험 한번 없는 신인에게 대뜸 3번 타자를 맡기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표할 팬분들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렇죠. 오직 정규시즌 경기만 보고, 인터넷 뉴스 이런 거 절대 확인 안 하고, 무엇보다 저희 YES 네트워크를 겨울에는 절대 켜지 않는 그런 팬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겁니다.]
[하하, 스털링. 이제 겨우 개막전인데 벌써부터 독설을 시작하면 곤란하죠. 아무튼 스털링이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저 어린 선수가 지난 시범 경기 동안 보여줬던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뭐 작년 KBO에서 고작 114경기에 74개의 홈런을 쳤던 것은 제쳐 두더라도 시범 경기 17경기에 타자로 출장해서 51타석 동안 홈런을 무려 네 개를 기록했거든요. 안타는 16개. 볼넷은 7개로 팀 내에서 가장 훌륭한 성적입니다.]
[맞습니다. 저 신인은 정말이지 환상적이에요. 지금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애런 저지 선수가 2번. 그리고 저 선수가 3번에 섰다는 부분 정도일 겁니다. 사실 제가 생각할 때는 저 둘의 타순은 바뀌는 게 옳거든요.]
[워워, 스털링.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 겨우 개막전입니다. 독설은 아주 조금 뒤로 미뤄도 괜찮아요.]
앤서니 볼피의 말에 따르자면 반의 반 개. 하지만 대기 타석에서 봤을 때 그것보다 오히려 더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거 어떻게 할까?
마운드에 선 후안 몬테로가 1루를 한번 살폈다.
그래도 시범 경기 때와는 다르게 개막전이라고 애런 저지가 세 걸음을 나가 있었다. 물론 절대 도루 같은 걸 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슬라이드 스텝.
그리고 초구.
후안 몬테로의 손을 떠난 공이 쏜살처럼 날아왔다.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궤적은 후안 몬테로가 지금 던지는 공의 정확한 궤적이 아닌 나의 경험이 만들어낸 속구에 대한 가상의 궤적이다. 그렇기에 그 가성의 궤적 위에 앞서 대기 타석에서 관찰했던 후안 몬테로의 공이 그려내던 모습을 더했다.
남의 말과 내 판단이 다를 때는 보통 내 판단이 옳다. 그게 남이 한 건 직접경험이고 내가 한 건 간접경험이더라도 야구에서는 보통 그렇다. 더욱이 실패하더라도 남의 말 듣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내 판단이 틀려서 실패하는 편이 기분상 더 낫기도 했다.
그러니까 볼피가 말했던 반의 반 개보다는 조금 더 떠오른 위치.
그 가상의 점을 향하여 나의 방망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높은 코스 빠른 공.
99마일? 어쩌면 100마일.
내가 휘두른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딱!!!
그리고 그 순간 바로 느꼈다.
‘아, 볼피 녀석 공 좀 볼 줄 아는구나.’
살짝 낮은 각도.
심지어 타이밍도 살짝 밀렸다.
2루수인 트레버 스토리가 몸을 날렸다.
[쳤습니다!! 빠른 타구!! 2루수 트레버 스토리의 글러브를 피해 쭉쭉 날아갑니다!!]
[좌익수 요시다 마사타카!! 빠르게 공을 향해 달려오지만 늦습니다!!]
[애런 저지!! 2루에!! 그리고!! 그리고!! 아, 멈춰 섰습니다. 그 사이 최수원 선수는 무사히 1루에. 최수원 선수의 깔끔한 안타!! 태평양을 건너 온 슈퍼 루키가 데뷔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합니다.]
[자, 아까 이야기를 잠깐 이어 하자면 바로 이 점이 제가 최수원이 2번. 저지 선수가 3번을 쳐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방금 보세요. 솔직히 이거 최수원 선수 발이면 2루까지 갈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워워, 자 스털링 일단 진정하시고. 자, 타석에 타일러 비트!! 타일러 비트 선수가 올라옵니다.]
젠장······.
그래, 그래도 규만 선배보다는 빠르다. 규만 선배보다는.
경기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