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11)
잭 휠러.
유명한 투수다.
물론 2028년 시점에서 이미 38살인 만큼 회귀하기 전 2034년에 메이저에 데뷔했던 나는 한 번도 상대해본 적이 없는 투수이기도 했다.
그에 관한 데이터는 이미 받아봤다.
우타자를 상대로는 바깥쪽 낮은 코스 커브와 슬라이더. 몸쪽 깊숙한 코스로 싱커 혹은 투심. 그리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 까다로운 점은 포심과 싱커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복판에 가까운 느낌으로 들어오다 포심은 바깥쪽 낮은 코스로 살짝 움직이고 싱커는 몸쪽 깊숙한 곳으로 움직인다.
1루에 선 애런 저지가 딱 두걸음의 리드폭을 가져갔다.
절대 달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사실 잭 휠러와 같은 투수를 공략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1루에 나간 저 애런 저지와 같은 ‘힘’을 갖는 것이다.
실제로 회귀하기 전의 나도 그와 비슷했다. 아마 그 시절의 나였더라면 방금 애런 저지와 같은 상황에서 녀석보다 타구에 실린 힘은 부족했겠지만 발은 녀석보다 훨씬 빨랐던 만큼 결과 자체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 루키. 요즘 아주 유명하던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뉘신지?”
나에게 말을 건 포수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니, 근데 진짜 모르는 사람이다. 필리스 포수면 J.T. 리얼무토 아니었나?
“개럿 스텁스. 오늘 네가 상대할 타자 이름 정도는 좀 알아뒀으면 좋겠는데?”
“아, 미안. 신인이다 보니 기억할 이름이 워낙에 많아서.”
이름을 들으니까 이제야 기억이 났다.
아마추어시절 제법 유명했던 대학리그의 포수로 조니 벤치 상까지 받았던 녀석이다. 내가 뛰던 2034년 당시에는 진짜 노장 중의 노장으로 포수가 아니라 1루수로 뛰고 있었는데 지금은 필리스의 백업 포수인 듯싶다.
“배짱 하나는 두둑하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나도 언제까지 내 배짱이 이렇게 두둑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확실한 건 그 언제가 오늘은 아닐거야.”
사실 이 정도 대화는 도발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
마운드의 잭 휠러가 1루를 한번 살피더니 그냥 과감하게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슬라이드스텝이야 안 한다 치더라도 1루에 주자가 있는데 와인드업이라니. 근데 솔직히 저기 두 걸음 떨어져서 절대 뛰지 않겠다는 의지를 풀풀 풍기는 애런 저지의 꼬라지를 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복판?
아니, 그럴 리가.
-뻐엉!!!
몸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투심? 혹은 싱커.
“스트라잌!!!”
심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이게 스트라이크라고?
내가 살짝 시선을 돌려 심판을 한번 힐끔 바라봤다. 과감하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것은 내가 메이저를 기준으로는 신인이기 때문이었다. 2034년에 진출했을 때도 몇몇 꼰대 같은 심판은 FA로 진출한 베테랑 취급이 아닌 신인 취급을 했는데 마이너 계약으로 온 지금은 더 하겠지.
“공이 보이지도 않았나봐?”
“공이 제대로 보였으니까 방망이 안 휘두른 거지.”
“스트라이크에 안 휘두르면 언제 휘두르려고?”
“내 기분 내킬 때?”
개럿 녀석이 또 한 번 내 성질을 긁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냥 대충 무심하게 답해주고 마운드의 투수에게 집중했다.
방금 공은 확실히 예리했다.
내 기준에서는 볼이라고 판단되긴 했지만 사실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것이 3차원임을 생각해보면 존의 앞쪽에서는 살짝 스쳐 들어오는 공이라 기계로 판정해도 스트라이크가 나왔을 수도 있다.
원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회복 속도가 늦어지고, 그 결과 선발투수들의 경우 기복이 좀 심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든 투수가 시즌 평자책 3점대 중후반이 나온다는 말은 잘 긁히는 날에는 본인 전성기의 슈퍼에이스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 번째.
초구와 흡사한 공.
나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그리고 체감하기로는 정말 홈플레이트의 바로 앞.
공의 방향이 초구와는 정반대로 틀어졌다.
바깥쪽. 물론 애초에 복판에서도 살짝 몸쪽으로 치우쳤던 코스이기에 존을 빠져나가는 공은 아니었다.
-딱!!!
정말 반쯤 어거지로 가져다 댄 방망이가 그 공을 밀어냈다.
1루 파울라인을 따라 빠져나가는 공.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시즌 시작까지 이제 사흘이 남은 상황. 확실히 전성기에 가까운 기량을 보여주는 메이저 최정상급 투수의 피칭은 매서웠다.
세 번째.
바깥쪽으로 살짝 높은 코스.
‘유인구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뚝 떨어지는 커브. 확실히 포심도 그렇고 이 녀석 던지는 공은 그 자체로 살짝 바깥쪽으로 휘는 경향이 있다.
거의 바닥에 처박히는 공을 개럿이 깔끔하게 받아냈다.
“제법이네?”
“너야말로 이걸 참다니 제법인데?”
“그러면 우리 둘 다 제법인 걸로 하지 뭐.”
“······.”
정확히 얼굴을 살피지는 않았지만, 개럿 저 녀석 아마도 똥 씹은 표정이 아니었을까?
마운드의 잭 휠러가 네 번째 공을 준비했다.
와, 근데 애런 저지 저 녀석. 한 걸음 걸어갔다가 다시 한 걸음 나오는 저 느릿한 움직임 진짜 실화인가?
바깥쪽 커브는 대충 구분할 수 있다.
문제는 포심과 투심인지 싱커인지 모를 저 공이다.
하나를 노리고. 나머지는 걷어낸다는 마음으로.
바깥쪽으로 살짝 몰린 코스.
빠른 공이 날아왔다.
이대로 존을 빠져나가는 포심일까? 아니면 복판에 파고 들어오는 투심일까? 하나를 노리고 나머지를 걷어낸다는 마음으로 대비하려고 했는데 이건 만약 포심이면 그대로 헛스윙이 나올 각이다.
그대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멈춰 세워야 할까?
선택의 순간.
나는 주저 없이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뻐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개럿이 1루심을 향해 나의 스윙 여부를 확인했다. 하프스윙이냐 체크스윙이냐. 개인적으로 체크스윙을 확신했지만, 마운드의 투수가 베테랑이고 나는 신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하프스윙까지 한 10cm는 남은 이 스윙도 하프스윙 판정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루심의 판정은 체크스윙. 1루를 어슬렁거리던 애런 저지가 심판과 뭐라뭐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볼카운트는 이제 2-2.
마운드의 잭 휠러가 다섯 번째 공을 뿌렸다.
복판.
살짝 낮은 코스.
여전히 이게 포심일지 투심일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코스라면 설사 내가 노리던 코스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방망이를 가져다 댈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순간 최근에 들었던 구로다 히로키의 그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타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나 같은 경우 무릎 쪽으로 꺾이는 싱커를 몇 개 던져서 타자 머릿속에 남겨 두면 바깥쪽 공이 더 멀어 보이지. 이러면 타자는 존에 걸치는 바깥쪽 공을 빠지는 공으로 착각하게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바깥쪽 공만 세 개 연속 보여줬으니 이제 노리는 것은 투심이 아닐까?
과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홈플레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잭 휠러의 공이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너무 깊숙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들어오는 공.
왼팔을 다 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그대로 강렬한 몸통 스윙. 하체의 회전이 그 스윙을 그대로 따라갔다.
-딱!!!
양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무시한다.
그리고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망이를 잡아당겼다.
그대로 날아오르는 타구.
각도는 그리 높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아마 YES 네트워크를 통해 이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들이라면 해설자의 감탄사를 듣고 있지 않았을까?
빨랫줄처럼 뻗어가는 라인드라이브성 타구.
애런 저지가 달렸다.
각도가 한 3도만 높았어도 홈런을 확신했을 것 같은데 일단 담장에 맞을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나도 열심히 달렸다.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달리려는데 이 새끼 나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이제 2루를 밟았다. 이거 홈런이 아니면 반강제로 나도 단타로 끝나겠구나 싶은 상황.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내 귀를 때렸다.
브라이트 하우스 필드를 찾은 양키스의 팬들이 필리건들의 압박 속에서도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준 것이다.
그럭저럭 달리기에 가까운 꼴을 보여주던 애런 저지가 이제 숫제 산책하듯이 걸었다. 이거 따라잡기도 어색해서 나도 그냥 조깅하듯 설렁설렁 뛰었다. 그렇게 달렸는데도 3루 지나는 시점에서 거의 열 걸음 정도 차이를 두고 나란히 홈을 향해 걷게 됐다.
“소문이 실력만 못한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소문이랑 실력이랑 엇비슷했을 겁니다.”
“겸손이야?”
“아,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 하는데. 소문은 작년 실력이고. 제가 겨울 사이에 또 한 단계 스탭업을 한 거라서요.”
“몸쪽 공인 건 어떻게 알았어? 저 양반 오늘 컨디션 아주 발딱 서서 구분하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찍었습니다.”
홈플레이트를 먼저 밟은 애런 저지가 덕아웃으로 가지 않고 등을 돌려 나를 기다렸다.
“훌륭하네.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30홈런은 쳐낼 자격이 있는 거거든.”
내가 제법 마음에 든 것일까?
그가 큼지막한 주먹을 쭉 뻗었다.
-툭
가벼운 피스트 범프.
애런 저지가 잇몸이 드러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2:0.
경기가 계속됐다.
***
브라이스 하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저 녀석 듣던 것보다 더 괴물이잖아?”
“구단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영입하려고 했다고 하더라. 너한테도 SNS로라도 똥꼬쇼 좀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어?”
“했지.”
“근데 왜 안 한 거야?”
“그땐 저렇게 잘하는 줄 몰랐지. 그리고 쟤가 나보다 팔로워가 많더라고. 짜증나게.”
하퍼의 대답에 리얼무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좀 너무 찌질한 거 아니야?”
“찌질이라니. 팔로워 70만 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플루언서의 세계거든?”
“그래, 인플루언서. 근데 나 올해가 마지막인 거 알지?”
“알지. 잭도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지난 2023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구단주인 존 미들턴은 참으로 패기 넘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위대했던 팀들을 기억하는가? 당연히 다들 기억할 것이다. 1927년의 양키스, 29년의 애슬레틱스, 75년의 레즈. 그런데 여기 그들이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 있는가? 그럴 리가. 애초에 그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필리스로 돈을 버는지 못 버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필리스의 구단주로 있으면서 얻은 최대 업적이 고작 돈을 잃지 않는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불쌍한 일 아닐까?”
그래서 존 미들턴은 자신의 인터뷰를 다 지켰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절반은 지켰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지키지 못했다 라고 할 수 있었다. 분명 존 미들턴은 자신의 말에 어울리는 광폭 행보를 보여주었다. 2020년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뉴욕 메츠와 함께 메이저리그에 가장 거대한 돈지랄을 했던 팀이었다.
하지만 그의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여전히 위대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위대함’을 위해 영입했던 선수들은 이미 첫 번째 FA를 끝내고 단년 혹은 2년짜리 연장 계약에 들어갔거나 혹은 8년, 10년짜리 장기계약의 끄트머리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은퇴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위대해봐야지.”
브라이스 하퍼가 자신의 방망이를 뽑아 들고 타석으로 올라갔다.
3회 초.
마운드에는 여전히 최수원이 서 있었다.
점수는 여전히 2:0.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그리고 고작해야 시범 경기.
35세.
이제 슬슬 전성기의 끄트머리에 선 이 사내는 자신보다 팔로워가 170만이나 높은 저 투타겸업의 루키를 향해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첫 번째를 커트했고 두 번째를 그냥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높은 코스.
뚝 떨어지는 커브볼.
브라이스 하퍼의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딱!!!
공을 쪼갤듯한 터무니 없는 파워.
완벽하게 정확한 포인트를 두들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서른다섯의 타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확성을 이기는 힘.
브라이스 하퍼가 이번 시즌이 자신의 네 번째 몬스터시즌이 될 것임을 그 홈런을 통하여 예고했다.
3이닝 1실점.
수원의 시범 경기 마지막 등판이 그렇게 끝났다.
***
“최수원 선수. 오늘 홈런도 그렇지만 피칭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특별히 아쉬운 점이 있을까요?”
“아뇨, 최선을 다한 경기였습니다. 솔직히 마지막 하퍼 선수의 홈런도 뭐 실투 이런 거였으면 아쉽기라도 했을 텐데 진짜 기가 막히게 집어 넣은 공이었고 실제로 하퍼 선수의 방망이도 좀 밀렸거든요. 근데 그게 그렇게 넘어가는 걸 보고 역시 메이저리그는 메이저리그구나 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아, 하지만 괜찮습니다.”
“네? 뭐가 괜찮다는 말씀이시죠?”
“하퍼 선수가 이번 시즌 단단히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인데 필리스가 내셔널리그 팀이라서요. 어차피 이번 시즌에 세 번밖에 안 만나거든요. 그러니까 뭐랄까? 지금 불난 집은 우리 동네가 아니라 옆 동네다. 뭐 그런 느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