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10)
앤서니 볼피는 양키스의 차기 프랜차이즈로 당연히 세간의 평가에 의하자면 그 역시 ‘천재’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이 ‘천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천재라는 작자들이 가지고 있는 비범함이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저 앞.
마운드 위에 선 최수원만 봐도 알 수 있다.
스무살.
그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와서 보여주는 저 모습들을 보라. 솔직히 오늘 애런 저지에게 하려던 짓은 그도 식겁했다.
아니, 선발 투수 놈이 야수 버스에 타서는 팀 내 최고 프랜차이즈에게 비키라고 하는 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인가? 보통 미친놈이 아닌데 그게 자연스럽다. 그것은 실력을 떠나서 그냥 저 녀석이 가진 기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타석에 선 브라이슨 스토트가 배트를 들어 홈플레이트에 가로로 한 번 세로로 한 번씩 선을 그었다. 선수들에게 제법 흔한 형태의 루틴이다.
세간의 평가에 따르자면 브라이슨 스토트의 실력은 앤서니 볼피보다는 반 수정도 아래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객관적인 성적만 보자면 그의 성적은 앤서니 볼피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단지 앤서니 볼피가 타격에 조금 더 재능이 있고 브라이슨 스토트는 수비에 조금 더 재능이 있는 차이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몇 주 전. 구로다 히로키와의 만남 이후로 녀석은 확실하게 나아졌다. 그 기이한 발전을 앤서니 볼피는 최수원의 천재성이라고 이해했다. 본래 천재라는 족속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무언가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큼성큼 나아가기 때문이다.
-딱!!
브라이슨 스토트의 방망이가 최수원의 공을 따라갔다.
3루 내야 관중석으로 빠지는 파울.
그리고 두 번째는 아슬아슬하게 파울라인에 걸치는 타구로 파울.
볼카운트 0-2.
연속해서 파울이 나오곤 있지만 브라이슨 스토트의 방망이는 최수원의 속구를 확실히 따라가고 있었다. 대체 지금 구속이 얼마나 나오고 있는 걸까? 앤서니 볼피가 습관적으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
‘아, 여긴 구속이 표시가 안 되지 참.’
바로 지난 등판에서 최고 98마일까지 나왔던 걸 고려한다면 아직 1회 초니까 95마일 정도? 세 번째와 네 번째. 느린 커브 하나를 그냥 보내고 네 번째 속구를 또 다시 두들겨 볼카운트는 1-2.
앤서니 볼피의 경험에 따르자면 최고 수준의 유망주들이 처음 좌절을 경험하는 곳은 보통 AA리그다. 투수고 타자고 할 것 없이 다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AA와 AAA의 어딘가 즈음 된다는 KBO를 19살에 박살 낸 최수원의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글쎄. 속구는 당장 메이저에 올라가도 통할만큼 좋은데. 브레이킹볼이 좀······. 커브는 나쁘지 않은데 그거 하나로는 좀 힘들다고 본다. 아마 정상적인 루트 밟았으면 AA에서 한 1년 정도는 더 있지 않았을까?”
스프링 트레이닝 초반.
수원의 공을 받던 호세 트레비뇨의 평가였다.
실제로 싱글A와 더블A의 가장 큰 차이는 브레이킹볼에 있다. 그걸 제대로 구사하면 AA급 이상의 투수가 되는 거고, 그런 공을 공략하기 시작하면 AA급 이상의 타자가 되는 거다.
사실 이건 KBO가 AA급을 살짝 상회하는 리그라고는 하지만 리그 자체의 특성이 조금 차이가 있기에 생긴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루키부터 싱글A까지도 100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선수의 숫자는 KBO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반면 변화구만 따진다면 오히려 KBO 쪽이 더 나은 면도 있다. 결국 상대적 희소성의 차이다. 그러니 101마일짜리 공을 던지던 최수원에게는 어지간한 AA보다 KBO가 오히려 더 쉬운 리그였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KBO에서 뛰던 당시에는 잘 안 풀린다 싶으면 그냥 냅다 속구 던져도 어느 정도 통했던 것 같아. 주로 힘으로 윽박지르려는 경향이 있더라고. 뭐 물론 100마일짜리 속구를 스트라이크랑 볼 구분이 가능하면 어느 정도 통하기는 하는데······. 앤서니 너도 잘 알잖아. 여기서 뛰려면 그거 어느 정도 다 적응해야지 뛸 수 있는 거.”
그렇다면 그런 평가를 받던 최수원은 대체 어떻게 나아진 것일까?
다섯 번째.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커브. 앞서 세 번째로 헛스윙을 유도했던 그것과 비슷한 공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보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방망이가 흘러 나왔다.
헛스윙 삼진일까?
-딱!!!
하지만 브라이슨 스토트의 방망이가 이것마저도 건드렸다.
‘아······.’
내야땅볼이 될 법도 했건만 타구가 아슬아슬하게 파울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이미 최수원의 피칭에 관해서는 브라이슨 스토트도 잘 알고 있다.
속구와 커브.
어려운 공이었지만 오직 두 가지의 가능성만을 머릿속에 두고 있었으니 이런 반응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어지는 여섯 번째 높은 코스.
바로 앞선 커브와 거의 흡사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브라이슨 스토트의 방망이가 살짝 늦었다.
커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높은 코스 빠른 속구다.
-딱!!
높게 떠오른 타구. 하지만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내야 뜬공.
앤서니 볼피가 매우 간단하게 그 공을 낚아챘다.
원아웃.
느리고 낙차 큰 커브 이후에 이어지는 가장 빠른 공.
매우 정석적인 조합이었다. 실제로 최수원 역시 지난 겨울 커브에 집중하던 때부터 염두에 두던 볼배합이기도 했었다.
구로다는 수원에게 아낌없이 정말 많은 조언을 건넸다.
“무빙 패스트볼? 글쎄. 100마일을 던질 줄 아는 투수라면 난 그냥 그걸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 물론 점진적으로 레퍼토리를 늘려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넌 파워 피쳐잖아. 메이저라고 쫄지 말고 네 공을 믿고 어그레시브하게 가. 아직 시즌이 시작도 안한 시점이라 투수는 몸이 덜 풀렸고 타자는 그래도 몸이 좀 많이 풀린 상태잖아. 내가 보기엔 지금에서 100마일까지만 구속이 올라와도 충분히 통할거야. 그 이상? 그 이상이라면 공부해야지. 비디오 열심히 보고. 타자 정보 머릿속에 넣고. 너한테 중요한 건 아마 타자의 반응 속도? 그리고 스윙 궤적 정도 되겠다. 타자가 강한 공 약한 공 같은 거는 거의 쓸모 없어. 비디오에 나오는 공은 네가 던진 공이 아니잖아. 그 부분은 결국 경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어.”
“타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그리고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공으로 범타를 끌어내고 전혀 다른 공으로 헛스윙을 끌어내는 거야. 가장 좋은 건 역시 커브의 낙폭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 많은 조언들 가운데 수원에게 가장 유용했던 것은 역시 이 한마디였을 것이다.
“겁 내지 마. 좀 두들겨 맞아도 괜찮아. 넌 이제 스무 살이야. 팀에서도 마이너를 거치지 않은 투수가 완성되어 있기를 바라지는 않아. 실전이 가장 좋은 연습이라는 말에는 보통 동의하지 않지만, 투타겸업이라는 너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너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4점대 중반. 아니 5점대의 투수라도 괜찮다.
타석에 브라이스 하퍼가 올라왔다.
‘하지만 두들겨 맞는 건 역시 기분이 별로란 말이지.’
초구.
높은 코스 뚝 떨어졌어야 하는 커브.
하지만 실투였다.
-딱!!!
잠시 주춤하던 하퍼의 방망이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공을 두들겼다. 속구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느린 타이밍을 맞춘 결과물이었다.
강한 타구.
높게 떠오른 타구가 외야를 향해 쭉쭉 뻗어나갔다.
‘쯧······.’
하지만 공을 두들긴 하퍼가 혀를 찼다.
‘저 애송이 녀석 설마 커브의 낙폭을 조절할 줄 아는 건가?’
박자를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떨어진 탓에 제대로 두들기지 못했다. 오늘 좌익수로 출장한 마크 토마스가 그 타구를 가볍게 잡아냈다.
투아웃.
최수원이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타자를 맞이했다.
속구, 커브, 커브, 커브.
볼카운트는 2-2.
다섯 번째.
높은 코스.
타자의 머릿속에 새겨진 커브가 반의반 박자를 빼앗았다.
만약 지금 이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였다면 반의반 박자를 놓쳤음에도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타자가 그와 같은 감각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뻐엉!!!
타자가 ‘어어어’하는 사이
“스트라잌!!!”
루킹삼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공격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
오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선발 투수는 잭 휠러. 한때 명실상부한 특급 투수였지만 이제는 은퇴를 코앞에 둔 38세의 노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3점 중반대의 평자책을 기록할만한 기량을 가졌고 올해를 끝으로 맞이하는 세 번째 FA 역시 2년에서 3년의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양키스의 선두 타자는 앤서니 볼피로 리그도 지구도 다른 선수였기에 그리 자주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는 타자였다.
초구.
96.1마일의 높은 코스 빠른 공. 존에서 살짝 벗어나는 그 공을 앤서니 볼피가 참아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낙차 큰 71마일짜리 커브.
-부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1-1.
세 번째.
살짝 몰린 95.7마일의 속구.
-딱!!!
앤서니 볼피가 그 공을 잡아 당겼다.
하지만 정확히 스윗스팟을 맞추기에 잭 휠러가 던진 속구의 볼끝은 너무 더러웠다.
낮게 깔린 타구.
브라이슨 스토트가 가볍게 타구를 낚아채 여유롭게 1루로 송구했다.
-뻐엉!!
“아웃!!!”
원아웃.
타석에 애런 저지가 올라왔다.
2미터가 넘는 키에 140kg에 가까운 체중.
그리고 그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는 막대한 힘. 그야말로 ‘거인’이라는 칭호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였다.
한때 메이저 최정상급 투수였던 잭 휠러조차도 긴장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괜찮아.’
잭 휠러가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그의 괜찮아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애런 저지는 대단한 타자지만 그 대단함은 절대 완전무결하지는 않았으니까.
내구성.
그래, 거인의 힘을 버텨내기에 인간의 신체는 너무 약하다. 그의 뼈와 근육은 거인의 그것이었지만 연골과 힘줄은 인간의 그것이다. 많은 거인들이 그러했듯 애런 저지 역시 몇 년의 눈부신 전성기 이후 꾸준히 잔부상을 안고 살았고 지난 겨울에는 3개월짜리 수술까지 감행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닐 터.
잭 휠러가 과감하게 공을 뿌렸다.
바깥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빠른 공.
-딱!!!
보통 사람보다 더 넓은 존을 갖고 있는 애런 저지의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강하고 빠른 타구.
잭 휠러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결과는 폴대를 벗어나는 거대한 파울 홈런이었다.
‘후······.’
잭 휠러 본인도 이게 홈런이 될 수는 없을 것을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긴장하게 되는 것은 지금 타석에 선 타자가 애런 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빠른 공.
존 안쪽으로 파고드는 그 공에 애런 저지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스플리터다.
애런 저지가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헛스윙에도 느껴지는 거대한 압력.
자칫 잘못하면 넘어간다는 그 압력이 잭 휠러를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이 38세의 노장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몸쪽 깊숙한 코스.
93.7마일의 투심.
-딱!!
애런 저지의 방망이가 이 공마저도 두들겼다. 하지만 명백하게 스윗스팟을 벗어난 상황.
‘막대한 힘은 종종 기술을 뛰어넘는다.’
애런 저지의 스윙에는 회귀 전 전성기 시절 120kg의 최수원이 갖고 있던 그 철학이 담겨 있었다.
좌중간 워닝 트랙까지 날아가는 빠르고 강한 타구.
36세의 거인이 1루를 밟고 멈춰 섰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지만 굳이 2루까지 달리지 않은 것은 이제 막 부상에서 복귀한 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3번 타자의 헛스윙 삼진.
그리하여 투아웃에 주자 1루.
그리고 최수원의 차례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