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8)
“저를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지난 삶에서 구로다 히로키는 특별히 나에게 관심을 표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즈키 이치로나 마쓰이 히데키 쪽이······. 아!!
“제 피칭 때문이군요.”
“맞아.”
간단한 이유였다.
그때는 내가 타격만 했으니 같은 타자였던 이치로나 히데키가 관심을 보인 것이고 지금은 투타겸업을 하고 있으니 투수인 구로다 히로키가 관심을 보인 것이다.
“깜짝 놀랐어. 101.3마일이라니.”
“에이, 뭘 놀라시기까지······. 사사키도 그렇고 일본에 더 빠른 공 던지는 사람들 많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내가 구속이 꽤 나오기는 하지만 이게 리그 최고 수준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뭐 역대 한국인 가운데는 최고가 맞지만, 일본을 기준으로 보면 당장 작년에 빅리그에 진출했던 사사키 로키만 하더라도 최고 105마일. 시즌 평균 구속이 99마일의 괴물이고 오타니 쇼헤이도 최고 103마일에 평속은 97마일을 찍는다.
“게다가 이번에 그 05년생 3인방도 다들 100마일 찍지 않았나요?”
그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구속혁명이 먼저 시작됐던 만큼 평균적인 투수의 구속 자체가 꽤 높다. 작년을 기준으로 리그 평속이 한 1마일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본 자체가 인구수만 1억 2천6백만으로 국가의 규모만 따지더라도 미국의 40% 정도는 되고 가장 신체 능력이 좋은 사람은 NFL로 빠지는 미국과 달리 야구에 몰빵한 환경이니까.
“맞아, 료타로 그 녀석. 지난 겨울에는 다 똑같은 160인데 걔들은 뒤에 우수리 좀 붙어서 100마일이고 자기만 99마일이라고. 도량형 자체가 문제라고 투덜거리더니 결국 100마일을 던지더라고. 확실히 같은 나이에 경쟁자가 있으니 그게 좋더군.”
“그런데도 제가 던진 101마일에 놀라셨다고요?”
“그래.”
구로다 히로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하, 궁금한 표정이군. 미안. 나이를 먹으니 괜히 이야기를 돌려 하는 악취미가 생기더라니까.”
“아닙니다.”
“보니까 네 피칭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것 같던데. 맞지?”
“네, 뭐······.”
구로다 히로키가 웃었다.
“네가 등판한 경기들을 꽤 많이 찾아봤어. 이왕이면 고화질로 말이야. 영상을 확대해도 정말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확실히 기술 발전이 좋긴 좋더라고.”
“아, 제 피칭폼에서 뭔가 문제라도?”
“아니. 피칭 폼이야 개개인별로 다 다른 건데. 그건 잘 던졌던 전직 투수의 영역이 아니라 제대로 인체를 배운 과학자들이 알려줄 수 있는 영역이잖아. 내가 본 건 네 표정이었어.”
“표정이요?”
그가 말을 이어갔다.
“어, 어느 경기를 우연히 봤는데 아마 7이닝 2실점이었나? 내가 생각할 때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적일 텐데 네 표정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더라고. 그래서 궁금했어. 대체 어느 정도면 네가 만족할 수 있을까?”
표정?
그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 했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노히트? 뭐 나쁜 표정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게 막 엄청 만족스러운 표정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더라고.”
“아, 제가 선발로 등판하면 포커페이스를 좀 지향하거든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보통 퍼펙트를 하면 미친 놈처럼 기쁜게 정상이잖아. 근데 넌 한번 우렁차게 환호하고는 자기를 축하해주는 사람들의 행가레를 너무 민망해하더라고. 퍼펙트조차도 정신이 나갈 만큼 기쁘지 않았다는 뜻이지.”
“······.”
내가 그랬나?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근데 네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일 때가 있었어.”
“73홈런 쳤을 때요? 아니면 마린스 우승 했을 때?”
“그거야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순간이고. 내가 말하는 건 마운드 위에서 말이야.”
내 이야기인데 궁금해졌다.
대체 내가 언제 그렇게 기뻐한 것일까?
“처음 160을 던졌을 때. 그리고 처음 구속이 163을 돌파했을 때. 뭐 활짝 웃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뻐 보였어. 그때 깨달았지. ‘아, 이 녀석. 목표가 지금 눈앞에 있지 않구나. 진짜 대단한 걸 목표로 하고 있구나.’라고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한다.
내가 진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난 그런 녀석을 둘 정도 잘 알고 있거든.”
“그게 누군가요?”
“쇼헤이. 그리고 클레이튼.”
쇼헤이라면 오타니 쇼헤이를 말하는 걸 거다. 근데 클레이튼? 그게 누구······.
“커쇼요?”
“그래. 클레이튼 커쇼. 내가 본 녀석들 가운데 가장 대단한 재능을 가진 녀석이었지. 네가 공을 던지는 걸 보고 있으면 뭐랄까? 그 녀석이 한창 애송이이던 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와, 너무 뜻밖의 이름이라 깜짝 놀랐다.
클레이튼 커쇼.
150년이 넘어가는 야구의 역사에서도 이만한 투수는 드물다.
투수의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 ERA(평균자책점)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하는데 단순 ERA는 워낙에 투고타저였던 데드볼 시대를 따라잡을 수 없지만 ERA+(조정 평균자책점). 그러니까 그 해의 평균적인 ERA와 구장의 평균치를 보정한 숫자에서 클레이튼 커쇼는 메이저 전체 역사를 통틀어 2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가운데 1위다. 그에 비견될만한 투수는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페드로 마르티네즈. 이름부터가 좌완 투수 그 자체인 레프티 그로브 정도뿐이다.
“내 메이저 첫 시즌이 클레이튼의 데뷔 시즌이었어. 팀 동료였지. 그때 박형도 같은 팀이었는데······. 아니, 잠깐만. 네가 08년생이라고 했지? 맙소사. 그러네. 알 수가 없겠네. 그때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으니까.”
“구로다씨도 메이저 데뷔를 다저스에서 했던 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클레이튼 커쇼의 데뷔 시즌이었는지는 몰랐지만요.”
“그래, 아무튼 녀석과 나는 굳이 따지자면 메이저 데뷔 동기라고 볼 수도 있지. 하하.”
데뷔 동기라는 그 말이 본인 나름의 개그였던 것일까?
구로다씨가 크게 웃었다.
“그런데 제 어떤 점이 커쇼를 닮았다는 건가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처럼 뚱한 그 표정이 닮았어.”
“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아까 전에 내가 말했지. 101.3마일에 깜짝 놀랐다고. 그러니까 넌 그렇게 말하더라. 사사키를 비롯해서 일본에도 그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있는데 그게 뭐 놀랄 거리냐고.”
“네, 그랬죠?”
“넌 네가 말하는 그 투수들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그리고 그 녀석들이 스무 살 때 어떤 공을 던졌었는지?”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 한 표정이네. 그래, 맞아. 널 보고 있으면 스무 살 시절의 클레이튼 그 녀석이 떠올라.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전혀 만족을 하지 못해. 뭐, 향상심이 높은 건 칭찬할 만한 일이지. 아마 그 녀석. 스무 살 시절에는 나보다 잘 던지는 것 정도를 목표로 했었을 거야. 미리 말하지만 이건 자랑이 아니야. 뭐 지금이야 스무 살 시절 커쇼의 목표가 저 구로다 히로키였습니다. 이런 말 하면 충분히 자랑같이 들릴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라고. 고작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14년을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투수보다 ‘당장’ 더 잘 던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웃긴지 말이야.”
그의 이야기에 나는 나의 작년이 어땠는지를 돌아봤다.
비슷했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내심 경쟁 상대로 삼았던 것은 36세의 임광형. 그리고 28살의 조창혁이었다.
내가 생각할 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메이저에 가야 하는 선수고 KBO에 메이저급 선수란 곧 그들이었으니까.
“커쇼는 내가 아는 투수 중에서 제일 대단한 재능을 지닌 녀석이었어. 그런데 그 녀석의 스무살 때 성적을 좀 보라고. 100이닝 정도 던지고 평자책이 4.26이었나? 녀석뿐만이 아니야. 내가 메이저에서 적응하도록 도와줬던 마스터도 스무살, 스물한 살 때는 빌빌거렸었다고.”
“마스터요?”
“젠장, 미안하다. 네가 08년생이라는 걸 자꾸 까먹는군. 그렉, 그렉 매덕스 이야기야. 아, 이름을 말해도 모르려나?”
······.
“아무리 08년생이라도 야구 선수인데 그렉 매덕스를 모르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래, 아무튼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너의 101.3마일은 충분히 대단하다는 거야. 사사키 녀석도 열아홉 살 때는 제대로 컨트롤한 공은 159밖에 못 던졌었어. 그에 비하면 넌 이미 100마일짜리 공을 수시로 존 안에 제대로 집어넣고 있었지. 안 그래?”
나는 내가 메이저에서도 정말 특별한 레벨의 선수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기준은 메이저에서도 정말 특별한 레벨의 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로다 히로키의 말처럼 지금 나는 회귀 전처럼 서른넷이 아닌 고작 스무살의 어린 선수였다.
물론 타자로써의 나는 서른넷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던 만큼 신체적인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메이저 최정상급에 준하는 기량이 당연하다. 하지만 투수로써는? 그래, 아무리 내가 메이저 최정상급의 재능을 지니고 있더라도 고작 스무 살이다.
“다시 한번 말할게. 향상심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야. 선수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마인드지. 하지만 그 향상심이 조급함이 되면 절대 안 돼. 특히나 그 재능이 특정 수준을 넘어선 선수라면 그건 더더욱 금물이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니, 회귀하기 전의 나도 젊은 선수들에게 종종 해주는 이야기였다. 프로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을 입지 않는 것이다. 조급함은 부상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그 부상은 재능 자체를 깎아 먹는다.
“젠장. 내가 이런 멋지고 중요한 이야기를 20년 전에도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참 아쉽단 말이지. 만약 커쇼 그 녀석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면 녀석도 어쩌면 훨씬 대단한 커리어를 남길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야. 아무튼 절대 잊지 마.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101마일짜리 속구를 스트라이크존 안에 넣을 수 있는 건 정말 대단한 재능이고 너에게는 아직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았어. 너의 경쟁 상대를 지금 당장 사이 영을 받는 스물일곱 스물여덟의 투수들로 보지 마. 그들의 스무살 시절. 아니, 아예 커쇼의 스무살 시절을 경쟁 상대로 생각 해. 그러면 마음의 초조함이 조금은 사라질거야.”
“조언 감사합니다.”
당장 피칭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오늘 아침에도 생각했었던 이럴 거면 투타겸업을 하느니 타자에 전념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마음이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들어주는 좋은 조언이었다.
“쓸데없는 잔소리를 조언으로 들어주니 참 좋네. 그러면 운동장으로 나가볼까?”
“네?”
“마인드에 관한 잔소리는 잔소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피칭하는 거 직접 한 번 보기는 봐야지. 재능있는 인스트럭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은퇴 이후로 제법 노력은 했어. 어쨌거나 나도 카프의 감독으로 가야 하는 입장이니까. 대단치는 않더라도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 거야.”
나의 피칭을 몇 차례 살펴 본 구로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나의 투구폼에 관해서는 조금도 터치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선수 시절 공을 던질 때 감각은 어떠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타자를 상대할 때의 몇 가지 요령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간단한 이야기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된 것일까?
탬파베이와의 시범 경기.
놀랍게도 나는 무려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