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6)
맥스 프리드는 최수원에 대하여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온 홈런왕.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AA수준에서 풀시즌을 치르고 홈런 신기록을 세운다고? 그래,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단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그만한 재능이라면 그런 기록을 세울 때까지 AA에서 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 그저 그것뿐이다.
초구.
존에서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코스.
91.1마일의 빠른 공.
보더라인에 걸치게 하려던 의도와 달리 너무 많이 빠진 것 아닌가 싶었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괜찮았다. 0-0에서 볼카운트를 하나 내주는 것이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휘둘러 준다면 내야 땅볼이나 혹은 파울 정도로 끝날 테니 유리한 카운트로 승부를 시작할 수 있을 테고.
‘너무 신중했나?’
아니, 아니다.
어쨌거나 녀석은 적어도 자신이 AA는 완전히 박살 낼 수준임을 스스로 증명한 녀석이고 그 말은 곧 녀석이 빅리그에서 뛸 최소한의 소양 정도는 갖췄음을 의미했다.
-딱!!!
최수원의 방망이가 바깥쪽으로 존을 벗어나던 91.1마일의 속구를 두들겼다. 그래, 그건 분명 존을 벗어난 91.1마일의 속구였다.
“어?”
오늘 경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우익수를 맡은 타일러 콜린스가 달렸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이 질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높게 뜬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그것은 KBO 시절의 최수원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마이너에서만 무려 8년을 굴러먹은 타일러 콜린스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 어떤 외야수도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타구를 낚아챌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미친?”
물론 양키스의 선수들은 이틀 전에 있었던 도밍고 로드리게스와 수원의 라이브 배팅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존 안쪽으로 최선을 다해서’라는 단서 조항이 달린 라이브 배팅이었다.
“야, 작년에 맥스 프리드 라인드라이브가 몇 퍼였냐?”
“12.3%인가? 뜬공까지 합쳐도 35% 정도밖에 안됐을걸?”
“와······. 근데 그런 투수를 상대로 저렇게 대뜸 초구를 갈겨서 홈런을 만든다고?”
만약 지금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마운드에 선 투수가 그저 그런 40인 언저리 투수였다면 어땠을까? 장담하건대 아무리 대뜸 초구를 갈겨서 홈런으로 만들었더라도 절대 이런 감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맥스 프리드다. 이틀 전 수원과 라이브피칭을 진행했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대단한 투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건강한’이라는 전제만 붙인다면 맥스 프리드 역시 절대로 도밍고 로드리게스와 비교해 모자란 투수가 아니었다.
그라운드를 가볍게 한 바퀴 돌아 최수원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의 입이 잠시 멈춰 섰다.
“뭐야? 이거 정식 경기도 아닌데 ‘그거’ 하는 거야?”
아니,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건 절대로 다수가 아니었다. 그 기묘한 정적은 아직 빅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이 타자가 정말 홈런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품격을 지녔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심지어 그 나이가 고작 스무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비현실적인 괴리감이 만들어낸 정적이었다.
“야, 스완.”
“어?”
앤서니 볼피가 그 불편한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수원에게 말을 걸었다.
“너 진짜 스무살은 맞지?”
“뭐라는 거야.”
그날, 양키스의 선수들은 한국의 주민등록체계가 미국의 사회보장번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운이 좋았다.
아, 물론 여기서 운이 좋았다는 말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른 방망이에 우연히 얻어 걸린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뭐랄까?
맥스 프리드라는 투수가 지금 나에게 좀 궁합이 맞는 투수였다고 해야 할까?
90마일 초반대의 속구.
훌륭한 체인지업.
괜찮은 커브와 슬라이더.
그래, KBO에서 뛰었던 왕년의 에이스 임광형과 비슷한 레퍼토리다. 차이가 있다면 임광형의 구속이 맥스 프리드보다 좀 느리다는 점. 대신 그의 체인지업이 더 끝내주게 훌륭하다는 점 정도의 차이다.
물론 그 구속의 차이가 막 10마일씩 났다면 꽤 까다로웠을거다.
어쨌거나 나는 93마일만 던져도 강속구 투수 소리 듣던 KBO에서 1년을 뛰다 이제 막 메이저로 건너온 참이었고 그 타이밍을 조정하려면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맥스 프리드는 그 명성에 비해 구속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듣기로는 전성기에는 그래도 최대 98마일까지 던졌다고 하는데 작년에 던진 가장 빠른 공은 그보다 2마일이나 느린 96마일에 불과했다.
게다가 초구로 던진 공이 바깥쪽 낮은 코스 빠른 공이었던 것도 꽤 괜찮았다. 거긴 약간 밖으로 빠지더라도 방망이를 휘두를 만큼 내가 자신 있어 하는 코스였으니까.
나에게 홈런을 두들겨 맞은 맥스 프리드가 피칭을 이어갔다.
-딱!!!
“와······.”
“내가 말했지? 수비 미쳤다고. 150이닝 이상만 뛰면 골드글러브는 무조건 저 양반꺼라고.”
앤서니 볼피의 말처럼 움직임이 진짜 대단했다. 애초에 피칭폼 자체가 좀 단단하긴 했는데 공을 던진 직후에는 정말 다섯 번째 내야수가 된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나한테 홈런 한 방을 두들겨 맞았음에도 곧바로 침착하게 피칭을 이어가는 것이 확실히 베테랑은 베테랑이다.
“무조건 멀리 날려야겠네.”
“그게 어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걸?”
-딱!!!
내야 뜬공 아웃.
맥스 프리드가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경기가 계속됐다.
덕아웃 구석에 말없이 앉아있던 게릿 콜이 마운드로 올라가기 전 나를 한 번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하는 마음으로 같이 노려볼까 하다가 좋은게 좋은 거라고. 그냥 응원이나 해주기로 결심했다.
“파이팅!! 아니, 고온!!”
-풋······.
대충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는 볼피 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게릿 콜이 미간을 찌푸렸다. 193cm에 110kg에 가까운 근육질의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가지는 않았다. 그대로 마운드에 올라간 게릿 콜이 피칭을 이어갔다.
-뻐엉!!
96.7마일의 속구가 호세의 미트를 꿰뚫었다. 이제 3월 초. 게다가 게릿 콜의 나이가 올해로 37세임을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위력이다.
아, 물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이 모두 그 공을 그냥 지켜보거나 방망이를 붕붕 돌리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게릿 콜은 노장이었고 굳이 미리미리 몸을 만들 필요가 없는 남자였는데 반하여 원정 경기를 뛰러 온 브레이브스의 야수들은 오늘 경기 끝나는대로 짐 빼야 할지도 모르는 절박함 속에서 몸을 만들어 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딱!!!
내야를 훌쩍 넘는 타구.
주자가 1루를 넘어 2루까지 도착했다.
“세이프!!”
그리고 그런 안타를 허용한 것은 게릿 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몸이 덜 만들어진 것은 브레이브스의 33살짜리 투수 맥스 프리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3회 말.
원아웃에 주자 2루.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
등 뒤의 녀석이 제법 성가셨다.
앤서니 볼피.
양키스에서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27살의 젊은 유격수다. 현재 빅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핫한 유격수 중에 하나로 수비는 평균에 살짝 미달하지만 컨택과 파워가 모두 수준급으로 2할 8푼에 20홈런이 가능한 타자다. 주력 역시 제법 준수해서 방금도 어지간하면 단타로 끝낼 수 있을만한 타구를 2루타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금 짜증이 살짝 올라오는 건 앤서니 볼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타석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방심?
그래, 뭐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맥스 프리드는 최고 96마일. 평균 92마일짜리 속구로 고작 163.1이닝을 던지고 사이 영 3위를 차지한 남자였다.
‘투수를 위대하게 해주는 것은 단단한 팔이 아니라 귀와 귀 사이의 뇌라는 기관이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설적인 투수인 그렉 매덕스가 한 이야기다. 물론 그렉 매덕스 본인이 스스로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전설적인 투수로 생각하는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분명 맥스 프리드는 ‘에이스’라는 이름이 붙은 투수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타입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수원의 실력을 깍아내리지 않았다.
비록 저 최수원이라는 녀석이 대뜸 두들겨서 홈런을 만든 공이 자신이 던지는 공 가운데 가장 장타를 맞을 확률이 높은 속구라고는 하지만 그게 저 녀석의 파워를 폄훼할만한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경기 시작 전에 최수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점. 그리고 홈런을 두들겨 맞자마자 자료를 요청했음에도 3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료가 준비되지 못했던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앞선 타석으로도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녀석에게 존 밖을 살짝 빠져나가는 공조차 담장 밖으로 날려보낼 힘이 있다는 점이었다.
세상에 스트라이크존 전체가 핫존인 타자는 없다. 21세기 가장 완벽한 타자였던 전성기의 마이크 트라웃조차도 그러했으며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던 배리 본즈 조차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이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하여 본다면 녀석의 약점은 높은 확률로 몸쪽 공.
맥스 프리드는 커터를 우타자 몸쪽 보더라인에 공 한 개정도 차이로 정교하게 넣고 뺄 줄 아는 능력을 갖춘 투수였다. 거기에 확실하게 빠져나가는 백도어성 슬라이더까지 더해지면 보통 타자는 정신을 못 차리기 마련이다.
초구.
몸쪽 깊숙한 코스로 파고드는 커터.
-뻐엉!!!
그의 예상처럼 몸쪽 공에 약한 것일까?
최수원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스트라잌!!!”
게다가 운도 좋았다.
사실 방금 공은 스트라이크콜이 나오지 않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공, 아니 스트라이크콜이 나온 게 오히려 좀 이상한 공이었다.
볼카운트 0-1.
고작 스무살짜리 타자다. 심판에게 어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공에 스트라이크 콜이 나온 이상에서야 심정적으로 조금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
두 번째.
또 몸쪽 공.
이번에는 확실하게 빠지는 슬라이더다.
-부웅!!!
“스트라잌!!!”
속았다.
볼카운트 0-2.
-후우.
가벼운 심호흡.
여기서 섣불리 삼진을 잡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어쨌거나 한 방이 있는 타자다. 세 번째는 약간의 함정.
녀석이 자신있어 하는 코스로. 하지만 확실하게 존에서 빠지는 유인구를 하나 던진다. 심지어 타이밍까지 교란하면서.
세 번째.
바깥쪽 코스.
확실하게 빠져나가는 체인지업.
최수원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됐다!!’
녀석이 또 다시 속아 넘어갔다.
물론 마지막까지 방심하지는 않는다. 투수는 본래 공을 던진 직후에는 한 명의 내야수가 되야 하는 법이니까.
-딱!!!
놀랍게도 녀석의 방망이가 그 체인지업을 두들겼다.
아니, 대체 저 공을 어떻게 쳐낼 수 있는 걸까? 저 녀석 나중에 히트맵을 그리면 아마 바깥쪽은 존 밖으로도 시뻘겋게 물들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다. 타구가 1루 파울 라인을 훌쩍 넘어갔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쉬운 공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유인구 하나 더.
네 번째.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
만약 심판이 초구처럼 판정을 내려준다면 이건 외통수다. 휘두르면 땅볼이고 안 휘두르면 삼진일 테니까.
최수원의 몸통이 크게 돌아갔다.
저걸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맥스 프리드는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욕설을 내뱉었다.
“Fxxx······.”
-딱!!
높게 떠오른 타구.
2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1타점짜리 2루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