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4)
도밍고 로드리게스와 내가 합의한 사항은 ‘봐주는 것 없이 존 안쪽으로.’ 하지만 에이스의 자존심이라는 것일까? 그는 처음 자신이 제안했던 ‘적당히 치기 쉬운 공’을 던졌다.
아,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도밍고 로드리게스 수준에서의 ‘적당히 치기 쉬운 공’이었다. 아무리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속구라고 해도 최고 99마일을 던지는 좌완 에이스의 속구라면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타자도 부지기수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던진 공이 3구 연속으로 두들겨 맞았고, 특히 마지막 세 번째는 담장까지 넘어간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이야기했던 ‘적당히 치기 쉬운 공’을 넘어서 ‘봐주는 것 없이 존 안쪽으로’ 던지는 공을 선택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라이브배팅이라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은 ‘에이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네 번째는 높은 확률로 변화구일 것이다.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구사하는 변화구는 총 네 가지. 세 종류의 커브와 슬라이더. 커터. 그리고 결정구로 사용하는 서클 체인지업이다.
‘결정구인 체인지업을 던지지는 않을 거야.’
앞서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속구만 세 개를 연속으로 던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커브, 슬라이더 그리고 커터다. 커브의 경우 보통 손을 떠나는 순간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물론 지금 저 녀석의 디셉션이 워낙 대단한지라 확신까진 할 수 없겠지만 저 녀석이 구사하는 세 종류의 커브에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그 공이 얼마나 떨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구와 마찬가지로 커브 역시 존 안에 들어온다면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
남은 것은 커터와 슬라이더.
솔직히 이건 투수 입장에서는 구종을 구분해서 던지겠지만 타자 입장에서는 구속과 궤적의 차이만 좀 있을 뿐 어쨌거나 몸쪽으로 휘어 들어오는 공이다.
네 번째.
앞서와 마찬가지로 반의반 숨 정도 되는 미묘한 타이밍의 차이. 그리고 중간에 프레임 몇 개가 빠진 것 같은 기묘한 동작으로 그의 왼손이 머리 뒤에서 갑자기 쑥 하고 뽑혀 나왔다.
빠르다.
그의 세 가지 커브 가운데는 파워커브라고 할 만큼 빠른 공도 있었지만, 지금 이 공은 크게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내 직감은 보통 맞아 떨어진다.
커터. 혹은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가능성에서 지워놨던 만큼 방망이를 움직이는 타이밍은 얼추 맞았다. 코스가 절묘했다. 복판에서 살짝 안쪽. 여기서 더 들어온다면 정말 아슬아슬하게 보더라인에 걸치는 까다로운 공이다.
오른쪽 겨드랑이를 더 크게 조였다. 그리고 그대로!!
-부웅!!
나의 방망이가 멋지게 헛돌았다.
‘와······. 미친.’
마운드의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웃었다.
그래.
저 녀석 선발 투수다. 이 바닥에서 가장 미친 놈들. 심지어 사이 영까지 받은 가장 미친 놈들 가운데서도 탑급으로 미친 놈이다. 그러니까 이 타이밍에 여기서 한복판에다가 또 속구를 집어넣을 수 있는 거겠지.
괜히 머리를 굴린다고 커터니 슬라이더니 하는 생각을 하다가 방망이를 헛돌렸다.
“서비스는 여기까지. 이제 진짜로 봐주는 거 없이 존 안쪽으로만 던진다.”
마운드의 녀석이 나에게 소리쳤다.
아니, 솔직히 이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고 저쪽에 지켜보는 애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저거 봐. 내가 말했잖아. 도밍고가 지금 봐주는 거라고.’
‘봐주기는 개뿔? 저거 누가 봐도 이 악물고 던져놓고 홈런 두들겨 맞으니까 이빨 터는 거잖아.’
‘속구만 네 개를 연속으로 존 안에 집어넣었는데 그게 봐준 게 아니면 뭐야.’
‘도밍고 성격에 진짜 봐줬으면 저런 말도 안 했을걸? 저거 나름대로 진지하게 했는데 두들겨 맞고 빡치니까 자존심 때문에 하나 집어넣고 봐줬다고 하는 거잖아.’
예전에는 저런 선발 투수 놈들 마인드가 진짜 이해가 안 됐었다. 그냥 여자들 한 달에 한 번 생리 하는 날 전후로 예민해지는 것처럼 쟤들은 닷새에 한 번씩 생리하는 거다. 이 정도로 생각했었다. 근데 내가 직접 선발로 던져 보니 알겠더라. 이게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환경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성격 자체가 좀 변하는 것도 있고.
아무튼 나름 속구 하나로 자존심 좀 챙겼으니 이제부터 진짜다.
커브와 슬라이더 그리고 커터.
다섯 번째.
-부웅!!
뜻밖의 서클체인지업이 나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헛스윙.
아, 근데 잠깐만.
“도밍고?”
“아, 미안미안. 존 안에 넣는다는 게 살짝 빗나갔네. 이건 없던 걸로 하자고.”
이 새끼가?
존 안쪽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서클체인지업.
그래, 과연 에이스 도밍고 로드리게스의 결정구라고 할만한 위력이었다.
내가 그 ‘엿같은 토니 그윈’처럼 공의 스피드 체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토니 그윈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비교적 체인지업을 잘 쳐내는 타자 중 하나였다.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그냥 내가 남들보다 눈이랑 배트 컨트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눈과 배트 컨트롤로도 방금 이 공은 어려웠다.
‘아니지. 만약 체인지업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아무튼 이후로 라이브 배팅이 이어졌다.
존에 들어오는 속구 하나에 빠져나가는 체인지업 하나. 그걸로 자존심이 다시 좀 충족이 됐는지 이후로는 비교적 정상적인 형태의 라이브 배팅이었다.
그래, 내가 14번째 공을 다시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내기 전까지 말이다.
몸쪽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커터였다.
상당히 아슬아슬했는데 여러 가지로 좀 아다리가 맞아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담장을 넘어간 것이 좀 의외였다. 과거 전성기 시절 120kg이 나가던 시절에야 이 정도면 당연히 담장을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10kg 증량한 게 효과가 있긴 있나보네.’
이번 겨울의 증량은 순전히 피칭을 위한 증량이었는데 타격에도 조금 힘이 붙긴 한 모양이었다.
“재밌네.”
그리고 그 홈런에 도밍고 새끼 또 눈이 돌아갔다.
약속된 15개의 공 가운데 마지막 15번째.
서클체인지업.
아니면 말고라는 느낌이긴 했지만 아무튼 서클 체인지업에 몸의 타이밍을 맞췄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는 건 진짜 ‘선발 투수’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앞서 14번이나 연달아 봤음에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디셉션.
그의 손에서 공이 날았다.
방망이가 움직였다.
타이밍은?
좋았다.
딱 맞아 떨어진다.
나의 시선이 공을 따라갔다.
투수의 손에서 중간 지점까지의 궤적.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나의 머리가 경험적으로 공이 통과할 궤적을 연산했다.
-딱!!!
나의 방망이가 존 밖으로 살짝 빠져나가려는 공을 두들겼다.
높게 뜬 타구.
도밍고 녀석의 얼굴에 거대한 당혹감이 깃들었다.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씁······.’
하지만 손맛이 좋지 못했다.
얼얼한 손바닥.
도밍고 녀석의 서클체인지업이 내가 예측한 궤적보다 약간 ‘덜’ 휘었던 탓이다.
우측 담장 워닝 트랙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
타구가 떨어졌다.
‘저건 플라이 아웃이네.’
‘에이, 저건 안타지. 저거 잡을 만한 외야수가 몇이나 된다고.’
‘나라면 무조건 잡지.’
‘웃기시네. 지금 타구 속도 못 봤어? 네 느려터진 발이면 공 떨어지고 한참 있다가 도착했어.’
‘그건 정상위치였을 때 이야기지. 근데 프런트가 제 정신이면 저런 타자 상대할 때 후진 수비 안 시킬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아, 그런가?’
15개의 라이브 배팅.
3개의 스트라이크. 그리고 1개의 내야 뜬공과 3개의 땅볼. 그리고 8개의 타구가 외야로 날아갔으며 그중 2개가 담장을 넘어갔다.
‘봐주는 것 없이 존 안쪽으로.’라는 조건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
마운드 위에서는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대충 ‘하하, 역시 홈런 신기록 세울 만하네. 아직 몸도 제대로 안 올라왔는데 이렇게 적당히 하는 걸로는 상대하기 어렵겠어.’같은 비루한 말을 내뱉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더 없어 보인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지나 한 번 치켜 세워주고 돌아올 것을······.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손에 쥔 것을 집어 던지려다가 참았다.
괜히 여기서 큰 소리 나면 오히려 더 없어 보인다.
“씹······.”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치자.
뭐 무조건 존 안쪽으로 집어넣기로 했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체인지업은 달랐다. 심지어 그 공은 애초에 약속했던 것처럼 존 안쪽으로 집어넣겠다는 각오로 던진 공도 아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살짝 존 안에 걸치긴 했지만 공을 던진 도밍고 로드리게스 본인은 그게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공을 거기까지 쳐낸 최수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완패.
애초에 라이브 배팅은 승부가 아니었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세면대의 차가운 물로 얼굴을 한 번 씻어 내렸다. 얼굴에 몰려왔던 열기가 조금 사그라드는 기분이다.
“뭐야? 진심으로 덤볐었나 보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게릿 콜.
하필 이 녀석이 여기 왜.
“뭘 그리 화들짝 놀래. 팀에서 이 화장실 쓰는 사람 너랑 나 포함해서 몇이나 된다고.”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면 누구나 놀라기 마련이죠. 그보다 진심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그냥 타구가 담장을 뻥뻥 넘어가길래 설렁설렁 던져줬나 했는데 표정을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뭐, 아니었으면 말고.”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정 궁금하시면 한번 세워놓고 라이브피칭 해보시던가요. 저처럼 무조건 존 안쪽으로 던지는 조건으로요.”
“글쎄······. 야구가 무조건 빠른 공 던지면 이기는 공놀이도 아니고 굳이?”
게릿 콜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됐습니다.”
“페이퍼타월로 닦으면 피부 상할 텐데.”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뒤에 남은 게릿 콜이 기분 좋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닦았다.
‘최수원······.’
얼마 전 자신의 권유를 거절했던 건방진 신인.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더 얄미운 놈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줬으니 이제 용서해야겠다.
시범 경기.
도밍고 로드리게스가 3이닝 동안 무려 7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올라온 수원이 마찬가지로 2이닝 동안 삼진 3개 포함. 1피안타로 상대의 타선을 실점 없이 막아냈다.
아직 시범경기가 한창인 타이밍.
등판을 끝낸 수원이 몸을 씻고 그대로 라커룸으로 향했다.
“여어, 슈퍼 루키. 벌써 퇴근하려는 거야?”
“콜 씨?”
“아무리 자기 등판 끝나면 퇴근해도 괜찮다지만 이제 1년 차인데 그래도 좀 남아서 같이 으쌰으쌰 해주는 게 좋지 않겠어?”
“글쎄요. 그런 건 좀 취향이 아니라서.”
모처럼 조언을 칼같이 끊어내는 그 모습에 게릿 콜은 불과 2시간 전에 먹었던 용서와 화해의 마음이 완벽하게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라이브 배팅.”
“네?”
“나도 한 번 해줄게. 타자로는 모레 출장이라고 그랬지? 감각 많이 떨어졌을 텐데 오늘처럼 조건 걸고 설렁설렁하는 거 말고 제대로 진검승부도 해봐야지. 안 그래?”
결국 이 애송이의 콧대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그 실력이라는 것은 ‘타격’이고.
오늘 도밍고 그 등신이 이상한 짓거리로 이 녀석의 콧대를 더 높여줬지만 게릿 콜은 확신했다. 아직 메이저에 데뷔도 못 한 녀석이라면 메이저의 리그에이스급 투수의 제대로 된 변화구는 절대 공략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의 문제다.
아무리 녀석이 추후 메이저를 강타할 재능을 지녔다고 해도 ‘지금’ 타이밍이라면 얼마든지 콧대를 눌러줄 수 있다. 게다가 이제 20살. 오늘 도밍고를 상대로 그만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네, 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일······. 아니, 잠깐만. 뭐라고?”
“안 그렇다고요. 어차피 시범 경기 자체가 그 감각 끌어올리는 연습인데 연습을 위해서 굳이 또 연습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게릿 콜이 라커룸에서 최수원에게 두 번 연속으로 까이는 순간이었다.